A Sinic Civilisation That Is Also A Nation / 문명이면서 또한 국가인 중국

 

쑨원과 중화민국의 출현에 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만주와 내몽고 지역 외에 신장과 티베트까지 영토를 물려받는 중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도 질문이 나오고 있는 문제입니다. 유럽에서 나온 민족과 제국의 개념을 모든 나라에 적용하려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내놓는 질문입니다.

 

민족이 곧 국가라는 생각을 되짚어보겠습니다. 계몽시대에 나온 생각이었고, 미국과 프랑스가 최초의 민족국가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제국의 시대였고, 초기의 민족국가들은 동시에 민족제국이 되었습니다. 민족과 제국의 결합이라는 현상에 대한 문제 제기가 다음 세기 동안 이어지다가 두 차례 세계대전을 통해 이 결합이 쪼개졌습니다. 2차대전이 끝날 때, 모든 제국은 무조건 해체되고 식민지배자들은 각자의 민족국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민족국가로 구성되는 세계질서가 제국 체제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수혜자는 식민국가를 민족국가로 바꿀 수 있게 된 아시아-아프리카 점령지였습니다.

 

이 개념들은 지중해세계의 제국 시대 역사, 특히 그리스-로마의 도시국가와 제국에서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십자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반동종교개혁 전쟁들을 겪은 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주권국가의 국경을 정하면서 지속성 있는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계몽시대 사상가들이 민족 정체성을 가진 시민국가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어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에 자극받아 영국의 자치령들이 생기고 라틴아메리카에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변화를 통해 인구 구성이 비교적 단순한 새로운 형태의 민족국가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거대한 제국이 되어 세계 구석구석으로 확장해 나가는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럽 관료들이 마음대로 그린 경계선에 따라 나중에 만들어진 식민지들은 나중에 또 새로운 종류의 나라들이 되었습니다. 식민지에서 풀려나거나 독립전쟁을 거쳐 영역을 물려받은 현지인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그 나라들을 세웠습니다. 이런 나라들이 새로운 민족을 빚어내는 상황에서 제국의 힘이나 속임수로 억지로 합쳐져 있던 집단들의 존재 때문에 탈-식민 과업에 어려움과 고통이 컸습니다. 세계를 둘러보면 그 과정이 아직까지 진행되는 곳도 있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곳도 있습니다.

 

중국 경우를 본다면 제국에서 국민국가로 옮겨가는 과정의 출발이 혼란스러웠습니다. 1911년 우창 봉기와 뒤이은 남중국 몇 성의 제국 이탈 후 쑨원 세력은 난징에 정부를 세웠습니다. 쑨원이 중화민국을 선포하고 임시대총통을 맡아 외국의 비준을 요청했습니다. 아무도 호응하지 않자 쑨원은 전쟁의 확실한 승리 없이는 뜻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럴 만한 군사력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쑨원은 군사력을 가진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위안스카이가 소년 황제의 퇴위를 설득한다면 혁명세력이 그를 공화국 초대 총통으로 추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만주족을 박해하지 않을 것이며 황실이 자기 보호하에 자금성에서 계속 살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설득에 성공했습니다. 황제의 퇴위는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았고 위안스카이가 총통이 되었습니다. 새 공화국은 베이징을 수도로 하고 청나라 영토를 물려받는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의 범위는 불확실한 채로 남아있었습니다. 위안 총통은 자기 자리를 불편하게 여겼고, 불과 3년 후 군주제로의 회귀를 꾀하게 됩니다.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던 군벌들이 돌아서서 그의 야욕을 가로막기는 했지만, 공화국의 이념은 10년 이상 군벌들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 시기에 여러 정치단체가 중화민족의 의미를 토론했습니다. 쑨원과 국민당 지지자들은 프랑스와 미국의 국민국가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민족은 중화문명의 핵심인 역사적 유산으로 이뤄진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서방 중심 국제사회는 청나라로부터 획득한 조약상의 권리를 고수하기로 했습니다. 그 민족제국들에게는 중화민국을 새 민족국가로 볼지 청나라의 단순한 후계자로 볼지 애매하게 놓아두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대다수 중국인이 자기 나라를 하나의 민족으로 보지 않는 데 문제의 근원이 있다고 쑨원은 보았습니다. 2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국인의 존재를 규정하는 기준은 독특한 문화적 가치들과 하나의 문자, 그리고 여러 왕조가 지켜 온 정치적 규범을 확인해주는 역사적 기록의 공유에 있었습니다. 그 기준이 지켜지는 한 통치자가 누구이든 중국의 왕조들은 중화문명의 대표자였습니다.

 

출신이 중국인이든 오랑캐이든 중국의 지배자들은 중국의 정체성을 지키고, 가꾸고, 키우고, 바꿔 왔습니다. -한 제국의 정체성은 3세기 이후 북중국에서 위험을 겪었으나 당나라가 새로운 영광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 송나라는 다시 북방에서 닥쳐온 거란과 여진의 위협에 대응하면서 신유가(Neo-Confucian) 세계관을 세웠습니다. 이 세계관이 몽골 지배를 백년 이상 견뎌내게 해준 굳건한 문명의 초석이었습니다. 그래서 1368년 명나라가 몽골족을 초원으로 몰아낼 때 중국의 유산을 회복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한 제국으로부터 이어지는 유-법가 체제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의 민족이 세워질 수 있었을까요? 근대역사학의 논법으로는 민족 비슷한 것이 나왔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학인들이 깊이 인이 박인 천명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 그런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오히려 1644년에 명나라를 정복한 만주족은 그 천명을 재확인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청나라가 중화문명을 구현한다는 주장의 근거를 마련하면서 동시에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과 티베트족으로 구성된 제국을 세웠습니다.

 

청나라가 무너질 때 만주족은 식민제국 해체 때 영국인과 프랑스인 관리들이 한 것처럼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만주는 중화민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중화민국은 탈-제국 국가로서 주류인 한족과 수많은 소수민족을 하나의 중화민족으로 묶어내려는 민족주의 국가였습니다.

 

중국 내외의 근대 학자들은 이 중국을 어떻게 부를지 의견이 엇갈립니다. 그중 아래 세 가지 논점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중국을 하나의 문명-국가로 본다.

공산당은 당-국의 황실과 같은 존재다.

주류 한족이 결국 다른 종족집단들을 흡수해 중국 민족을 만들 것이다.

 

첫째 논점은 중국의 정체성이 문화적 가치 위에 세워지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로 한족 외에 55개 민족이 공인되어 있습니다. 전통적 학자들의 생각이 투영된 논점인데, 문명에는 정치적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과는 맞지 않습니다.

 

문명과 문명 사이에 경계선이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중국의 경험 중 가장 적절한 사례는 불교 도입의 상황입니다. 처음 중국에 온 불교 승려들은 유가와 도가 문헌에 나타나지 않던 형이상학적, 영성적 관념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중국인들은 그 관념들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로부터 2백년 동안 중국의 유가와 도가 학자들은 자기네 유산의 재해석에 불교의 가르침을 활용해서 오래된 경전에 깊이와 영성을 더했습니다. 결국 송--청 왕조 동안 여러 사상이 공식적 이데올로기로 합쳐져 1904년까지 시행되는 과거제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내용이 풍성해진 문명은 수백 년에 걸쳐 정치적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새로운 사상의 유입을 남의 것이라 하여 가로막으면 변화의 길이 막히게 됩니다.

 

두 번째 논점은 공산당의 통제를 당연한 일로 보는 것입니다. 당은 정치적 과정의 한 부분이 아니라 투쟁과 용기를 통해 확인된 중앙권력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당이 추구하는 국가 통합성을 위해서는 모든 종족 정체성과 그 차이를 포괄해서 국가의 성격을 결정하는 유일한 주체가 당이라는 인민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그런 구조로 중국의 발전이 보장될 수 있을지 의심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어떤 지도집단도 긴 시간 동안 무류성(無謬性)을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늦든 빠르든, 빠를수록 좋지만, 새로운 사상을 제공하는 다른 문명들을 향해 문호를 개방해야 합니다.

 

세 번째 논점은 한 민족이 하나의 문화로 합쳐지는 것이 좋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족의 문명은 모든 세계인의 존중을 받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이 유산을 모든 중국인이 자랑스러워할 국가정체성의 자원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이 논점은 문화의 개념과 문명의 개념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민족이 세워짐에 따라 근대의 문화에 경계선이 생겼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중국이 독특한 국가문화를 가진 당-민족이 된 이제 이 문화를 중화문명과 구분할 필요가 더 커집니다. 중화문명은 2천년 전부터 한국이나 베트남의 문화에도 선별적으로 수용되어 온 것입니다. 긴 세월 동안 두 나라 지배계층은 중국적 가치와 제도의 도입을 인정해 왔습니다. 두 개 사건이 이 태도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중국 전체가 몽골족이나 만주족 같은 오랑캐의 정복을 당하자 중국 내의 문명이 한국과 베트남에서 받아들인 내용보다 타락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거쳐 두 나라에 근대국가가 세워지면서 각자 자기 문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문화에 중국문명과 공유하는 요소들이 있다 해도 그것을 지금의 중국과 공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끝으로, 다른 나라의 중국계 사람들이 중화인민공화국 주민들과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데도 이 세 가지 논점이 도움이 됩니다. 해외 중국인이 역사 속의 중화문명을 공유하는 부분들이 있다고 해도 중화인민공화국 공민들과는 서로 다른 존재입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