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grations To Southeast Asia / 중국인의 동남아시아 이주

 

중국문명의 성장을 중국 내 인구이동 및 동남아시아 이주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국인이란 누구인가 질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국 민족이란 어떤 것인가요?

 

중국경제의 바다에 대한 의존은 남송시대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북방으로부터의 침공에 밀려 남쪽으로 온 송나라는 동남아시아 방면의 교역에서 수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몽골족이 전 중국을 석권하자 그 필요가 더 커졌습니다. 원나라에 의한 이슬람권과의 연결은 대륙을 가로지르는 길만이 아니라 중국과 서남아시아 사이의 해로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연결 덕분에 인도양에서 중국인의 교역 활동도 쉬워졌습니다.

 

이 추세가 원나라가 무너진 후 절정에 이르러 명나라가 정화 함대를 일곱 차례 내보내 벵골만과 페르시아만에서 중국의 장기적 활동 영역을 탐색하기에 이릅니다. 모든 대외교역을 공식적 조공체제로 통제한다는 명 태조의 방침에 따라 민간 교역이 금지되었습니다. 푸젠성과 광둥성의 활동적 상인들은 다른 길을 찾아 밀무역에 나섰지만, 해금(海禁) 정책의 압박으로 인해 동남아시아로 나가는 중국인의 수는 줄어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가는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해외에 정착해 현지 여성과 결혼했고 그 자손은 현지에 동화했습니다.

 

1500년 이후 유럽인이 말라카, 마카오와 마닐라에 나타나면서 사정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주하는 중국인이 늘어나고 교역 활동이 늘어났습니다. 1644년 중국을 정복한 만주족은 바다에 관심이 없었고, 명나라의 해금 정책을 이어받았습니다. 조공체제를 통한 교역을 늘리는 데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마카오에 자리 잡은 포르투갈인을 통해 대외관계를 통제했습니다. 그러나 남중국 상인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해금 정책의 시행을 명나라처럼 엄격하게 하러 들지 않았습니다.

 

청나라 황제들은 내륙 방면으로 만주와 몽골고원, 그리고 그 너머 후에 신장성 행정구역이 될 투르크계 사람들의 영역에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옛날부터 유라시아 중심부에 속해 온 지역입니다. 실크로드와 관계된 이 지역은 러시아제국의 동방 팽창에 따라 새로운 관심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인의 만주 경계선 진출은 청나라에게 중대한 안보 문제였습니다. 그 결과 중국이 유럽세력과 최초의 조약을 맺게 됩니다. 네르친스크조약은 대륙 전체의 상황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육로를 통한 유럽인의 진출과 아시아 해상교역에서 유럽인이 이뤄 온 패권 사이의 관계를 청나라에서 간과한 것이 중국의 진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실입니다. 18세기 내내 만주족과 몽골족 기인(旗人)들은 러시아인의 모든 움직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반면 인도양에서 남중국해, 동중국해까지 영국인, 네덜란드인과 프랑스인이 활동을 늘리는 데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국인이 히말라야산맥을 넘어올 기미를 보이자 비로소 건륭제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네르친스크조약 백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육로를 통해 영국인이 티베트를 넘본다는 보고를 받은 후에도 건륭제는 교역 촉진을 제안하러 해로로 온 영국 사절단을 태연하게 응대했습니다. 점잖게 제안을 거절하는 황제의 태도에서 대단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영국의 인도 지배와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동남아시아 지배가 해군력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반세기 후 영국-프랑스 군대가 북경에 들이닥칠 때까지 청 조정은 별다른 위기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청 조정은 상인과 인력을 북쪽의 만주와 서쪽의 회교도 지역으로 보내는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수백만 중국인이 남양의 유럽인 식민지로, 그리고 태평양 건너까지 돈 벌러 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청나라 지도자들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많은 중국인이 교역을 위해 해외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역 지배층을 상대하다가 차츰 유럽 상인들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들 대부분이 식민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유럽인의 중국 교역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유럽인의 지배를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시기에는 노동력 수요가 커지는 데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로 이주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지역 중국인들은 고매한 문명의 문화적 가치를 받드는 베이징의 관료들과 관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푸젠성과 광둥성의 자기 고향에 소속감을 가졌을 뿐이었습니다. 북방 사람들보다 더 오래 만주족의 정복에 저항했고, 청나라를 자기 나라로 여긴 적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을 끌어들인 남양의 교역과 취업의 조건에 적응하려는 경제적 동기였습니다. 해외의 교역과 취업을 금지하는 조정의 공식적 정책을 어긴 그들에게는 청나라의 보호를 바라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1893년에야 해제된 해금 정책은 이미 의미없는 문서가 되어 있었습니다.

 

남양 중국인들의 생각이 북방 사람들과 달랐다는 사실은 스스로 당인(唐人)”을 자처한 데서 나타납니다. 그들이 남방의 지역문화에 소속감을 느낀 것은 현지에서 상대하게 된 유럽인 관리들과 비슷한 방식이었습니다. 영국인이 영국에 소속감을 느끼고 네덜란드인이 네덜란드를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죠. 민족이란 관념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방언을 공유하는 집단에 대한 소속감에서 당당한 문명의 구성원이라는 자신감을 찾았습니다.

 

이에 더해 남과 북을 구분하는 또 하나 의식의 층위가 있었습니다. 대륙의 경험과 해양의 경험 사이의 차이입니다. 바다에 열려있는 지역의 중국인들은 해양활동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차이는 인구의 2%도 안 되던 같은 지역의 선비계급과의 사이에도 존재했습니다. 최고의 교육을 받는 선비계급은 전 사회의 존중을 받는 위치였습니다. 중국문명의 중심 가치를 대표하는 위치에서 모든 공직을 독점하는 계급이었습니다.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농민, 공인과 상인은 자기네 지역문화를 빚어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일하며 선비계급과 많이 어울리지 않는 것을 편안해했습니다. 유식한 사람들을 존경은 하면서도 자기네가 경전을 공부하고 과거시험을 치르고 관리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유가의 도통(道統) 유산이 북쪽으로부터 전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천명을 받은 어느 왕조든 섬기는 원리는 남방 사람들을 2백 년간 두려움에 떨게 한 오랑캐를 당인 선비들이 임금으로 받들게 했습니다.

 

이런 배경 위에서 중국인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중국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질문이 따라 나옵니다. 근대세계에서는 1911년 청나라의 멸망에 이어진 상황이 이 질문에 관계됩니다. 19세기에 유럽 국가들은 각국의 국경 내 주권을 인정하는 일련의 국제법에 합의를 보고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앞서의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국경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영토는 명나라에게 넘겨받은 18개 성()보다 넓은 영역이었습니다. 만주족과 그와 연합한 몽골족은 자기네 영토를 정복한 명나라 영토에 합쳤습니다. 각 성 인구의 주류가 한족이라는 사실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왕조 입장에서는 중국의 오랜 전통대로 통치를 위한 천명을 획득한 것이었습니다. 서양 열강과 맺은 조약에는 청나라가 통치하는 영역이 곧 중국으로 표시되었습니다. 한자를 함께 쓰는 일본과 한국에서는 중국을 대청제국(大淸帝國)”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의 범위에는 늘 애매한 점이 있었습니다. 외국인을 응대하는 관리들과 상인들도 그랬습니다. 서양인 식민 관리들이 중국인의 방언 집단을 구분은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업무는 현지의 공용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당인을 모두 중국인으로 인식하는 편이 쉬웠습니다. 그 관행은 아편전쟁 후 서양세력이 중국 개항장에 들어온 뒤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 중국인들이 반()-청 전통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든 태평양 건너편에서든 서양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서양의 민족 개념에 입각해서 만주족 지배에 대한 반란의 지원에 나섰습니다. 해외에 나간 남방 중국인 대부분은 이민족 지배에 항거하는 한족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