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대문화들은 황하와 장강 두 거대한 강 유역에서 수천 년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문명으로 빚어졌습니다. 그 문화들과 유라시아 중심부의 부족문화들 사이의 관계가 중국 역사의 핵심적 줄거리였습니다. 수백 년 동안 중국의 학자와 사상가들은 중국인은 어떤 사람들이고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하는 질문에 이 관계가 아주 중요한 열쇠라고 보았습니다. 새로운 민족으로서 오늘의 중국과 그 문명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꼭 생각해야 할 질문입니다.
Relevance Of The Eurasian Core To China / 유라시아 중심부가 중국에 끼친 영향
중국문명과 다른 문명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다가 유라시아 중심부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사회나 독자적 문화를 가진 반면 문명은 여러 사회가 공유할 수 있다는 데 문명과 문화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곳의 조그만 부족이나 공동체도 자기네 기원에 대한 믿음, 자기네 언어,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자기네 생각으로 구성되는 자기네 문화를 가졌습니다.
문명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경계선 없이, 마음에 들면 누구든 받아들일 수 있는 일련의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 문명입니다. 삶의 의미에 대한 같은 관점을 공유함으로써 각자의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어 서로 다른 종족과 사회들을 묶어주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문명은 도시화된 인구 밀집지역에서 발생했습니다. 국가를 세우고 표현과 기록을 위한 문자를 만들어 자기네 가치체계를 다음 세대에게 전승할 역량을 갖춘 곳입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여러 문명을 배합하는 문화권들도 있었습니다. 긴 세월을 통해 많은 문명이 발생했으나 확장된 것은 많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은 아주 적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근대문명은 지중해 일대에서 발원한 정치조직들이 서유럽과 북대서양 일대에 뿌리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문명의 주도권에 자극받아 근대화의 길을 걸어온 세 개의 문명이 더 있습니다. 인도아대륙에서 발생한 인도문명과 황하-양자강 유역에서 나타난 중국문명은 5천 년 이상 특색을 지켜왔습니다. 가장 젊은 것이 이슬람문명인데, 서양 기독교문명과 뿌리도 공유하고 유일신 종교도 공유하기 때문에 둘을 합쳐서 하나의 지중해문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지중해문명,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은 오랫동안 각자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들 사이의 차이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 신앙의 형태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는 다신교에서 유일신으로 옮겨갔고, 하나는 수많은 신들에게 열려있고, 또 하나는 신을 바라보지 않는 경향입니다. 내가 보기에 중국문명을 정말로 다른 문명들과 떼어놓는 것은 표의문자(表意文字)입니다. 드나들기 어려운 “울타리”입니다.
그런 시각에서는 유라시아의 의미를 알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할 때 나는 남쪽의 시각, 남중국해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내가 함께 사는 사람들은 중국 남부, 광둥성과 푸젠성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책과 기록에는 중국 북부에 중심을 두고 육상으로 오는 적들과 맞서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나일강,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갠지스강 유역에서 출발한 다른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중국문명도 큰 강 유역에서 시작했습니다. 중국 지도자들은 바다 건너 사는 사람들에게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쪽에는 위험한 적이 없다고 보고, 육상의 위협과 기회에만 집중했습니다.
인도문명도 비슷한 경험을 가졌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쪽도 중앙아시아 방면으로부터 계속 침략을 받았습니다. 세계의 역사를 계속 공부하다 보니 유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 지중해 방면으로 밀고 들어오는 부족 세력의 공격을 계속 받은 것입니다. 중앙아시아 부족들은 어떤 언어를 쓰든 자기네 문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문명의 필수 요소인 지속적 역사기록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문명 없는 사람들이 그런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역사상 최강의 대륙세력을 이뤘던 몽골족부터 살펴봤습니다. 그들은 서쪽으로 비에나 성문 앞까지 갔고, 남쪽으로 중동과 지중해 연안까지 진출했고, 동쪽으로 중국을 정복했습니다. 항해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던 그들은 송나라 수군을 동원해 자바와 참파를 공격하고 일본까지 위협했습니다. 놀라운 군사적 성취였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 나올 때는 문자가 없었고, 문명 지역을 정복한 뒤에야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초원지대에서 나온 미개인에게 여러 문명권이 유린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그 전에도 인도-유럽어계 언어 사용자들이 더 동쪽이나 더 북쪽에서 온 훈족, 흉노족, 투르크족, 몽골족 등의 조상에게 밀려난 기나긴 역사가 있습니다. 투르크족 몽골족 부족들이 다른 문명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채용해 수백 년 동안 유라시아대륙을 지배한 이야기는 읽을수록 재미있었습니다.
7세기 이슬람문명의 흥기에 관해서도 여기에 이어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백년이 안 되는 기간에 이슬람세력은 지중해 일대 대부분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로 펼쳐나가 중국과 인도의 경계선에 이르렀습니다. 그 힘이 대단해서 중앙아시아 유목부족 대부분이 이슬람을 받아들였습니다. 불교를 지킨 몽골족 정도가 예외였지요. 500년간의 지배를 통해 아시아 대부분 지역에 대한 유럽인의 접근을 봉쇄하고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의 재부(財富)를 통제했습니다. 유럽인의 십자군은 그 봉쇄를 뚫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유럽 서쪽 끝의 나라들이 다른 길을 찾아 나서게 되었지요. 결국 포르투갈이 남쪽으로 인도양 항로를 열고 스페인이 인도를 찾아 컬럼버스를 서쪽으로 보내기에 이릅니다.
지구사(global history)는 바다의 역사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서유럽이 유라시아 중심부를 대신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항해능력 덕분입니다. 4백 년밖에 되지 않은 변화입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영국이 모든 바다의 제해권을 쥐고 세계사의 진로를 바꿨습니다.
이로써 유라시아대륙의 역사적 역할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수천 년 동안 많은 인구집단이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팍스 몽골리카의 확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대륙의 동서를 잇는 통합된 수송 체제가 만들어졌고, 뒤이어 남쪽으로 인도와 인도양도 연결되었습니다. 계절풍을 이용하는 상선이 육상 교역에 보조적 역할을 계속 맡았으나 위험한 활동이었습니다. 육상의 “실크로드”로도 캐러반의 운영과 통제는 늘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상황을 가져온 16세기의 항해술 발달은 교역활동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대륙식 사고방식과 해양식 사고방식 사이의 관계 변화는 수백 년 동안 정치적 상황에 계속해서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 지역과 중국의 해안 지대에서는 영국의 승리가 대세를 결정했습니다. 2차대전 후에는 미국이 영국의 역할을 넘겨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냉전에서 소련의 패배는 대륙에 갇힌 입장에서 미국의 지원 아래 대서양을 통제하는 해양 유럽에 대한 경제적 핸디캡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중국이 제2위 슈퍼파워가 된 것은 해양 지구경제에 참여할 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강력한 해군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전 세계의 시장과 자원에 대한 접근이 크게 힘들어질 것입니다. 한편 유라시아 중심부와의 관계도 중국에게 여전히 중요합니다. 중국이 이루고자 하는 기술적 변화와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전략적 유산 사이에 균형을 취하는 것이 중국의 장래를 좌우하는 최대의 시금석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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