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act of the Rise of a New China / 신(新)중국의 충격
이런 상황에서 동방학적 중국학은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1956년 파리 회의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원로-중견 학자 네 사람이 참석하면서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탈-식민주의 의식으로 “동방” 연구 자세에 불신이 일어나던 시점이었죠. 오래지 않아 유럽의 중국학자들은 “유럽 중국 연구자협회(European Association for Chinese Studies)”라는 새 간판을 내걸고 현대중국 연구를 연구 분야에 포함했습니다.
신중국의 성립 때문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중국을 냉전의 적국으로 여기던 1950년대 말의 미국에서 시작된 변화입니다. 새 세대 연구자들이 신중국이라는 현상을 연구하도록 연구비가 제공되었습니다. 중국도 세계 안에서 그 역할을 새로 설명하기 위해 과거의 역사를 활용하고 나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전적 중국학 연구자들도 태도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면 쳐다볼 사람이 없게 될 형편이었지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중국의 여정에 중단과 연속의 단계들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 한학과 현대적 중국 연구를 통합하는 협력의 길이 열렸습니다.
중국학이 동방학의 한 분야일 때는 근대 들어 문명의 보편적 기준이 세워졌다고 하는 유럽인의 믿음에 따랐습니다. 진보를 위해서는 무조건 이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과학혁명과 산업자본주의를 앞세운 유럽인의 주장에 일리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아니었습니다. 지난 150년간 중국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보면 지금의 중국인들이 자기네 풍부한 유산의 일부라도 지키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초기의 중국학 연구자들은 중국을 문명의 비교연구 영역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은 중국 문명이 지중해 지역 문명들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리고 중국의 가치관이 인도나 중앙아시아-북아시아 유목사회의 가치관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지 밝혀냈습니다. 오래된 문명들의 연구를 체계적으로 연결해 중국 문명의 독특한 성격을 밝혀낸 것입니다. 고대 중국의 문화적 정치적 성취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이 방향의 연구는 당시 유럽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1793년 매카트니 사절단의 건륭제 방문 이후 찬탄이 실망으로, 그리고 불신과 경멸로 옮겨갔습니다. 청나라가 그리 강하지 않고 그 백성들도 가난하고 불만이 많다는 사실을 제국주의 세력들이 알게 되면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청나라 황제는 곧 자리를 잃을 “동방 군주”의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말이 되자 서양 열강들은 중국의 사상과 제도가 승승장구하는 자기네 가치관에 따라 모두 바뀔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연구자들은 중국의 국가와 사회를 연구하는 데 과학적 방법을 쓰게 되었고 전통적 중국학은 힘을 잃었습니다.
Chinese Scholars Respond / 중국 학자들의 반응
중국의 학자들은 새로운 상황에 대한 대응에서 방향을 잘못 잡기도 했습니다. 해외유학생들이 돌아올 때 첫 번째 착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 학문을 비판하고 원하는 진보를 이룰 다른 방법들을 찾았습니다. 하나의 두드러진 예가 1840년대 아편전쟁을 중국근대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 이전의 역사를 모두 “고대사”로, “봉건적”인 것으로, 심지어 “퇴행적”인 것으로 보면서 중국 몰락의 원인을 찾는 대상으로만 여긴 것입니다.
두 번째 착오는 내전과 일본의 침공 앞에 국민당 정권이 무너질 때 나왔습니다. 중국학-한학과 경쟁하기 위해 나온 근대적인 “국학(國學)”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국학을 대신한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틀에 맞춘 이데올로기 역사서술이었습니다.
그후 19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30년 동안 서방 연구의 전면적 배척으로 인해 중국 연구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안에서는 볼 만한 연구 성과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편 서양에서 일하는 중국인 연구자들은 서양 연구자들과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홍콩과 타이완으로 밀려난 중국 학자들이 근대적 중국학 연구자들과 협력을 통해 국학의 전통을 쇄신하고 나섰습니다.
덩샤오핑 개혁을 계기로 새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학술교류가 재개되면서 인민공화국 학자들이 사회과학자들의 공헌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내 연구자들은 제쳐두었던 국학을 되살려내는 작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수백만 해외 중국인 중에서도 모국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종족과 문화들 사이에서 생활하고 일하면서 중국이 어떤 나라이며 중국인이라는 사실의 의미가 무엇인지 독특한 시각을 키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자아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종류의 한학이 나타나 중국 연구의 영역을 더욱 넓혔습니다.
Defining Pluralist Sinology / 복합적 중국학이란 어떤 것인가?
1980년대의 어느 시점에서 복합적 중국학이 나타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국의 흥기로 인해 외부의 관심이 늘어나고 대륙의 연구 활동이 확장된 것이 그 조건입니다. 1980년대 국제학회에서 타이완과 홍콩 학자들이 자기네 작업을 “한학”이라고 부르자고 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서양 학자들은 대륙 학자들과 힘을 합쳐 한학을 발전시키자고 했고, 대륙 학자 중에도 이 제안에 호응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중국 연구의 중요한 방향을 몇 갈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참혹한 몰락을 겪은 후 다시 일어나는 한 오래된 문명의 연구입니다. 서방의 지배에 도전하는 한 새로운 세력의 연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존중받던 위치를 되찾고자 하는 한 민족국가의 연구이기도 합니다. 중국 연구에는 이 여러 가지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의미를 놓고 본다면 복합적 중국학의 넓은 길이 역시 적합한 방향 같습니다..
여기서 복합성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세 개 층위의 협력을 통해 지난 여러 세대 중국학의 가장 뛰어난 성과를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초기의 한학 내지 동방학적 중국학이 하나의 층위이고, 백년 간의 국학 연구가 또 하나, 그리고 사회과학의 성과를 포괄하는 새로운 중국학이 또 하나의 층위입니다.
중국 내에서 일어난 국학은 서양 학자들의 한학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중국 학자들이 보기에 한학은 골동(骨董)의 취미인 반면 자기네 국학은 경세(經世)의 전통에 입각한 진지한 노력이었습니다. 여기서 사회과학의 역할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사회과학은 물질적 진보라는 현세적 문제를 다루는 학문으로, 서양식 경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럽과 일본의 대학을 모델로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중국 대학들은 처음에 중국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중국 고전을 섭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학자들은 중국의 발전을 위해 현대적 연구방법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경제학, 법학과 행정학, 사회학, 지리학과 심리학이 매력을 끌었고, 그 본석적 방법론을 받아들인 연구자들은 전통적인 전체론의 관점이 비과학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 해서 전체론적 관점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종류의 협력관계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학문은 그런 방향으로 폭과 깊이를 더해 갔습니다. 여러 분야의 기술과 관점을 자발적으로 조합해 내는 과정을 통해 학문의 복합성이 형성되었습니다. 전통적 한학의 연구방법을 현대적 국학의 연구방법과 함께 활용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 안팎의 고전 연구자들이 이제 사회과학 연구방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합성에는 반갑지 않으나 피할 수도 없는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강하고 의욕적인 중국이 유일한 슈퍼파워인 미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두 강대국의 경쟁 속에서 복합적 중국학은 방어를 위해서든 공격을 위해서든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자기 작업에서 직업윤리에 충실할 뿐 아니라 빗나간 견해나 정략적 의도로 불을 지르는 방화범들을 진압해야 할 것입니다. 학문적 지식의 오-남용을 바로잡고 반박하는 일입니다.
2020년 탕장(唐獎)상 수상 기념강연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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