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지폐가 널리 쓰였는데 왜 유럽에서는 그러지 않았을까? 학생 시절 어쩌다 이 문제로 토론을 벌이던 끝에 한 친구가 확실한 답을 내놓았다. “거기는 종이가 없었잖아!”

 

12세기까지 지폐가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답이다. 그런데 그때까지 종이가 없었던 사실은 어떻게 설명하나?

 

제지술은 진입 문턱이 그리 높지 않은 기술이다. 종이가 없던 사회에서 종이를 구경하고 그 좋은 점을 알게 되면 모방하기가 어렵지 않다. 식물성 재료를 빻아 섬유질을 분해한 다음 물에 섞었다가 체로 걸러내 말리면 된다.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재료를 선택하고 공정을 설계하는 데 먼 길을 걸어야 하지만, 일단 종이 비슷한 것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중국과 교류하는 사회에서는 종이를 구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부터 중국 왕조에서 내보내는 외교문서 대부분이 종이에 작성되었고, 황제의 하사품 중 중요한 품목 하나가 종이였다. 발레리 한센의 <실크로드, 문헌을 곁들인 새 역사>에 재활용지로 만든 수의(壽衣)가 연구 자료로 많이 활용된 데서도 종이 사용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105년에 발명된 제지술이 751년 탈라스(怛羅斯, Talas) 전투를 계기로 이슬람세계에 전파되고, 12세기 이후에야 유럽에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이처럼 유용하고 모방하기 쉬운 발명품이 이웃 문명권으로 전파되는 데 왜 수백 년씩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일단 이슬람권 전파를 보면, 6세기 반의 시차를 줄여 볼 여지가 있다. 2세기 초에 제지술이 발명되었지만 종이의 사용이 크게 확장된 것도, 황제의 하사품에 종이가 들어간 것도, 7세기 당나라 때의 일이다. 그리고 초기의 당나라가 상대한 것은 이슬람권이 아니라 유목민이었다. 유목민에게는 종이의 용도도 적고 식물성 재료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유입되는 종이를 사용했을 뿐, 제지술 자체를 도입하지는 않았다.

 

탈라스 전투는 새로 일어난 이슬람제국과 당 제국 사이의 최초의 정면대결이었다. 아바스 제국은 당나라 황제에게 선물(하사품)로 받는 종이로 만족할 수 없는 큰 잠재적 수요를 갖고 있었고, 또한 독자적으로 제지술을 발전시킬 재료와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s#/media/File:Battle_of_Talas.png (지금의 키르기즈스탄과 카자크스탄 사이에 있는 탈라스 지역에서 아바시드-티베트 연합군과 당나라 군대가 751년에 충돌한 탈라스 전투는 중화제국의 서방 확장을 끝낸 계기로 일컬어진다. 당나라 사령관이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라 해서 우리 사회에 잘 알려져 있다.)

 

이슬람권에서는 이슬람제국이 성립된 지 오래지 않은 시점에서 중국에서도 보편화된 지 오래지 않은 제지술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에 비해, 이슬람권에 서쪽으로 접한 유럽 기독교권에 제지술이 전파되는 데 장장 4세기의 시간이 걸린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종이의 재료도 흔한 유럽에 제지술이 늦게까지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종이의 수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종이는 다양한 용도를 가진 물품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용도는 기록이다. , , , 점토판, 파피루스, 죽간, 양피지 등 정보의 축적과 전달에 사용되었던 다른 어떤 재료도 따를 수 없는 정보 매체로서 큰 역할을 종이가 맡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Paper#/media/File:Various_products_made_from_paper.JPG (종이의 다양한 용도)

 

문명 발달 수준의 가장 중요한 지표가 정보처리 기술이다. 복잡한 내용의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언어가 문명 발생의 기반이었다. 정보를 보관하고 축적할 수 있는 문자의 발명이 다음 단계 문명의 발전을 뒷받침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가 정보의 대량 전파를 가능케 한 인쇄술이었다. 중국에서는 비단에 목판으로 무늬를 찍은 220년경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종이에 찍은 목판인쇄물은 7세기 중엽부터 나타난다. 이슬람권에서는 제지술 도입 후인 9-10세기 중에 인쇄술이 나타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내가 16세기 이전 유럽 문명을 매우 저급한 수준으로 여기게 된 것은 1985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방문했을 때부터다.(첫 서양 체류 때였다.) 코르도바는 8세기부터 이슬람제국 통치하에 있다가 13세기에 기독교세계로 수복(Reconquista)’된 곳이다. 8-9세기에 세워진 모스크 일각을 허물고 대성당을 지어서 코르도바 모스크-대성당(Mezquita-Catedral de Córdoba)’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모스크 건축의 우아함에 대비되는 대성당 모습의 사나움에 충격을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빠져 지내던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Mosque%E2%80%93Cathedral_of_C%C3%B3rdoba#/media/File:Mezquita_de_C%C3%B3rdoba_desde_el_aire_(C%C3%B3rdoba,_Espa%C3%B1a).jpg (8세기의 문명과 16세기의 야만이 한눈에 대비되는 코르도바 모스크-대성당)

 

https://en.wikipedia.org/wiki/Granada#/media/File:Granada-Day2-33_(48004306883).jpg (그라나다의 헤네랄리페 분수. 코르도바 모스크-대성당에 이어 이 분수를 보면서 이슬람 미술의 깊이를 실감했다.)

 

어렸을 때부터 유럽-서양을 흠모하던 마음이 뒤집히면서 반대쪽 극단으로 치우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운 마음도 있다. 그러나 8-12세기에 중국과 이슬람권이 제지술을 공유하고 인쇄술을 발전시키고 있는 동안 유럽이 어떤 상황에 있었을까, 유럽의 훗날의 위세를 덮어놓고 새로운 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아직 제지술을 배우기 전의 유럽은 중국이나 이슬람권과 대등한 수준의 문명을 갖지 못하고 이슬람문명의 외곽과 같은 위치에 머물러 있던 것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13세기 몽골인의 세계정복과 19세기 유럽인의 세계정복 사이에 통하는 점도 꽤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