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년에 대몽골국을 세운 칭기즈칸은 1227년 죽기 전까지 역사상 최대의 초원제국을 일으켜놓았다. 서방의 서요(西遼, Qara Khitai)와 호라즘(Khwarazm, 花剌子模)을 격파하고(1218-1220) 카스피해 연안까지 진출했으며, 남쪽의 서하(西夏)를 멸망시켰다(1226). 흉노, 돌궐 등 종래의 어떤 초원제국보다 넓은 판도가 확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방대한 초원제국도 몽골제국 팽창의 첫 단계에 불과한 것이었다. 50년 후(1279) 남송(南宋) 정복이 끝날 때는 당시 알려져 있던 세계의 대부분이 그 판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인도와 유럽, 그리고 이슬람세계가 완전히 석권되지 않고 살아남은 사실이 오히려 설명을 필요로 할 정도다.

 

이 설명으로 많이 제시되는 것이 최고 통치자 대칸(Qaghan)의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다. 초대 칭기즈칸(1206-27)에서 5대 쿠빌라이(1260-94)에 이르기까지 계승 때마다 제국이 상당 기간의 마비 상태에 빠지고 내전을 겪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1229-41)가 물려받을 때는 그래도 순탄한 편이었지만 쿠릴타이(Kurultai) 절차를 거치는 데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그 동안 정복 사업 등 적극적 정책들은 보류 상태에 있었다.

 

오고타이 사후 그 아들 구육(1246-1248)이 물려받는 데 5년이나 걸린 데서 그 승계가 명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육의 뒤를 칭기즈칸의 막내아들 톨루이의 아들인 몽케(1251-59)가 물려받는 데는 3년의 시간이 걸렸고, 그 동안 칭기즈칸 가문이 두 개 진영으로 갈라졌다. 톨루이 계와 조치(맏아들) 계가 하나의 진영을 이루고 오고타이 계와 차가타이(둘째 아들) 계가 이에 맞서는 대립이 길게 이어졌다.

 

대칸의 계승이 거듭될 때마다 몽골제국 지도부의 분열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오고타이 계승 때는 쿠릴타이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만 정복 사업이 중단되었지만, 구육과 몽케의 계승 후에는 제국의 통합성이 약해졌다. 쿠빌라이 계승 때는 두 개 쿠릴타이가 따로 열리며 내전이 일어났고, 제국이 4개 칸국(汗國, Khanate)으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국가 규모가 커지면 왕위 계승을 예측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작은 조직에서는 지도자 개인의 능력(완력과 지혜)이 조직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하기 때문에 능력 위주로 후계자가 결정되고, 왕조가 세워진 뒤에도 형제 계승이 많다. 그러나 많은 후보자 중에서 선택할 경우 더 유능한 인물이 뽑힐 가능성은 크지만, 불확실성 때문에 혼란의 위험이 있다. 그래서 ‘정통성’의 기준을 세워 ‘선택’의 여지를 없애는 방법으로 제도를 안정시키게 된다. 중국 고대 상(商)나라에서는 왕위의 형제 계승이 많았지만 주(周)나라에서는 장자 계승의 원칙이 확립되었고, ‘신하가 군주를 선택하는(擇其君)’ 것은 반역의 죄목이 되었다.

그러나 장자 계승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도 적지 않았다. 한(漢) 고조(전206-전195)가 죽고 15년간의 혼란 후 문제(전180-전157) 이후에야 계승이 안정되었고, 당(唐) 태종(626-649)은 형제들을 죽이고 부황을 겁박해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송(宋) 태조(960-976)도 아우 태종(976-997)에게 계승되었다. 1392년 개국한 조선에서도 태종(1400-1418)과 세조(1455-1468) 즉위 과정에서 장자 계승 원칙이 유린되었다. 불확실성이 큰 창업(創業) 단계에서는 이념적 정통성보다 현실적 역학관계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족장회의에서 지도자를 선출하던 쿠릴타이의 전통에 계승 과정을 어렵게 만든 원인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럴싸하지 않다. 칭기즈칸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많은 조직 원리를 만들거나 채용했다. 남송(南宋)과 금(金)나라는 물론이고 서요와 서하에서도 황위의 장자 계승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으니, 좋아 보였다면 얼마든지 따라했을 것이다. 자신이 후계자를 지정하고 쿠릴타이가 추인하도록 하는 방법은 그가 정한 것이었다. 추인의 과정은 계승의 타당성을 모든 구성원에게 확인시키는 과정이었다. 쿠릴타이 석상에서 후계자를 반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반대하는 길은 참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후계자 옹위 세력은 쿠릴타이 기간 동안 군대, 영토, 재산 등의 재분배로 참석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칭기즈칸이 정한 계승방법이 그 자신의 계승에서는 꽤 원활하게 작동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형제간의 선택이 아니라 4촌간의 선택이 되면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키는 길을 찾기 어렵게 되어 내전의 위험까지 일어난다. 

 

모든 구성원은 아니라도 대다수 구성원을 만족시킬 길이 있다면 이 계승방법이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제국의 급속한 확장이 많은 구성원을 만족시킬 자원을 늘려주고 있는 한, 계승과정에서 불거지는 갈등은 구조조정의 열쇠로 순기능을 발휘했다. 쿠빌라이가 형인 몽케를 계승할 때 동생인 아리크 보케의 반발로 내전이 일어남으로써 이 계승방법의 한계가 드러났다. 쿠빌라이 이후는 장자 계승 제도가 채용되었으나 그 대신 4개 칸국에 대한 ‘대칸’의 통치권이 줄어들어 ‘몽골제국’은 실질적 분열 상태로 들어섰다.

 

몽골제국이 능률적인 계승방법을 채택해서 계승에 따른 혼란을 줄였다면 더 큰 제국을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상적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1200년대에서 1270년대까지 몽골제국은 파격적인 팽창을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거듭거듭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대칸 계승 때마다 한 차례 휴식기는 새로운 상황에 맞추는 제국의 구조조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 휴식기가 없었다면 제국의 팽창기가 60년 넘게 계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