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civilization)’의 기본 의미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문화(culture)'도 비슷한 뜻을 품은 말이다. 두 개의 말을 구분해서 쓰는 데는 사람마다 꽤 차이가 있는데, 나는 역사의 흐름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경우에 문명이란 말을 쓰고자 한다.

 

역사의 흐름에서 큰 줄기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장의 메커니즘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인접한 두 개 사회에서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갖고 있을 때, 한 쪽이 다른 쪽을 부러워해서 따라 할 수도(동화 assimilation) 있고, 더 큰 힘을 키운 쪽이 자기네 방식을 다른 쪽에게 강요할 수도(정복 conquest) 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 이후 몇 개 지역에서 농업을 기반으로 한 문명권이 형성되었다. 초기 농업에 적합한 자연조건(기온, 강우량, 지형)을 가진 곳의 인구 증가에 따라 인접한 사회들 사이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동화와 정복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문명권으로 합쳐지게 된 것이다.

 

각 문명권은 바다, 산악, 건조지대 등 농경이 불가능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상호 접촉이 극히 적은 반면 농경지가 연결되어 있는 하나하나의 문명권이 그 안의 사람들에게 세계(world)’로 인식되었다. 하나의 문명권이 하나의 제국(empire)'으로 정치적 통합을 이룰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문명권으로서 정체성은 그와 관계없이 계속 유지되었다. (’제국이란 말에도 혼란이 있는데, 나는 하나의 문명권을 포괄하는 정치조직이란 뜻으로 제한해서 쓰려고 한다.)

 

문명권의 위치와 규모는 일단 지리적 조건으로 결정된다. 그러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 발전으로 농경지가 확장되면서 문명권이 커지고, 인접한 문명권의 통합도 이뤄지게 된다.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강 유역은 별개의 문명으로 오랫동안 존재했지만 그 사이에 큰 지리적 장벽이 없기 때문에 접촉이 점차 늘어나다가 7-8세기 이슬람혁명을 통해 하나의 문명권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혁명 다음의 문명권 지각변동이 13세기의 몽골제국이었다. 그 사이 문명권의 분포를 개관한다면, 동아시아에 중국문명권이 있고 남아시아에 힌두문명권이 있었으며, 이슬람문명권이 서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유럽에 기독교문명권이 있었다.

 

몽골제국이 여러 문명권의 상당 부분을 정복해서 이룩한 역사상 최초의 다문명제국에서 문명권 통합의 추세를 읽을 수는 없을까? 김호동은 문명권의 울타리를 넘어 전 세계를 시야에 담는 세계사의 탄생이 몽골제국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주목한다.

 

필자는 세계사에서 ‘근대성’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었느냐에 대한 이처럼 다양한 논의들을 재론할 생각은 없다. 다만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논의들 가운데 아부 루고드의 제안을 제외한다면, 연구대상이 되는 시대는 대체로 ‘대항해의 시대’가 시작되는 15세기 후반 이후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 그러나 우리는 ‘대항해의 시대’가 어떻게 해서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하던 13-14세기는 ‘대항해의 시대’와 그 이후에 나타난 세계사의 전개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근대세계의 출현을 논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몽골 시대가 남긴 영향에 대해서 그다지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실상 별다른 영향이나 유산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농경지대와 정주문화를 중시하고 유목의 세계를 소홀하게 여기는, 편견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과거의 전통적인 관점 때문일까?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199-200쪽)

 

20세기에 보편화된 근대적 학술은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것이라서 유럽중심주의의 편향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유럽 패권 이전을 살피는 역사학에서도 그렇다. 모든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유럽 전통에서 찾으려는 심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객관적 시각을 지키려 애쓰는 학자들조차도 유럽사를 보는 틀에 모든 지역의 역사를 끼워 맞추려는 경향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대표적인 주제가 근대성(modernity)'이다. ’근대라는 시대를 유럽의 발명품처럼 여기고 모든 인류가 이 새로운 시대의 혜택을 받기 위해 유럽의 특성들을 본받아야 한다는 근대화의 바람이 20세기를 휩쓸었다. 근대문명이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근래 늘어나면서 근대성의 의미에 대한 냉정한 검토가 확대-심화되고 있다.

 

중세로부터 근대로의 이행을 문명권 간의 장벽 제거, 세계화라는 밑바닥 의미에서부터 검토하고자 한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단계를 거쳐 이뤄져 온 과정이다. 7-8세기 이슬람혁명도 문명권 통합이란 의미에서 이 과정의 한 단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13세기 몽골제국에서는 더 진전된 단계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