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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권의 확장 과정에서 지리적 조건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중심부-외곽-배후지의 세 층위로 나눠 분석하는 시각을 나는 제안한다. 바필드가 <위태로운 변경>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중심부(중국)와 외곽(유목사회) 사이의 관계였다. 한편 크리스천은 각 문명권 중심부 외의 광대한 지역을 ‘내부 유라시아’로 지목하면서 그중에서 각 문명권과 인접한 지역이 가지는 ‘경계지역’의 특성을 설명했다. 크리스천이 말하는 경계지역을 각 문명권의 외곽지대로 파악하고 내부 유라시아의 ‘안쪽’을 특정 문명권에 편입되지 않은 배후지로 보자는 것이 내 제안이다.

 

문명권의 외곽에는 문명 발달의 결과를 수용하면서도 중심부와는 다른 문화 현상을 보이는 지대가 있다. 중국 서북방의 건조지역에서 중국 문명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유목사회가 형성되었지만 농경사회와 다른 문화가 전개된 것이 그런 예다. 외곽 지역은 중심부에 비해 기술 발전이 뒤지기 때문에 중심부와의 대결에서 밀리는 입장이다. 농경기술의 발전에 따라 농경이 건조지역으로 꾸준히 확장해 나간 것은 유목 등 다른 생산양식이 그에 필적할 만한 생산력 향상의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술력에서 밀리는 외곽지역이 중심부로부터의 압력에 어느 정도 버티는 힘은 자원의 강점에서 나왔다. 중심부에 비해 인구밀도가 희박한 외곽지역에서 중심부로부터 전파된 새 기술로 더 큰 효과를 얻는 일이 종종 있었다.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등자(鐙子)였다.

 

말의 사역은 기원전 3000년경 재갈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병(騎兵)의 전투력을 뒷받침해 주는 등자는 기원 전후에 와서야 발명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전의 전투에서는 말의 역할이 전차(戰車, chariot)의 형태로만 나타난 것이다. 섬유 재질의 등자가 먼저 쓰이기 시작했지만 안장의 한쪽에만 달려 있어서 말에 올라타는 동작만 쉽게 해주는 정도였다. 철제 등자의 출현 덕분에 달리는 말 위에서 화살을 자유자재로 날리는 기병의 위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철제 등자는 중국의 제철기술 발달에 힘입어 나타난 것인데, 그 효과가 유목사회에서 크게 일어난 것은 말(馬)이라는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외곽지역에서는 지역 내의 자원만이 아니라 배후지의 미개발 자원도 동원할 수 있었다. 유목민의 농경사회 약탈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만 배후지의 미개인에 대한 약탈이 더 많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미개인에 대한 약탈은 노예 획득에 주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미개인에게는 약탈당할 재산을 모아놓는 길도 별로 없었으니까. 농경사회의 약탈에서도 주민을 포획해 노예로 사역한 일이 많았다. 유목민 전사들이 군사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축 돌보는 일을 노예에게 맡기기도 했지만, 사회조직이 복잡해지는 데 따라 새로운 일거리가 늘어나면서 인력 수요가 커진 측면도 있었다.

 

노예 인력의 일반적 용도 하나가 ‘노예 전사(戰士)’였다. 앞에 언급한 김호동의 책에도 칭기스칸이 개발한 새로운 조직 원리의 하나로 주종관계(boghol)가 소개되어 있다. 칭기스칸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은 후 아버지가 이끌던 부족에게 버림받아 생사의 기로를 겪는 등 유목민의 전통적 조직 원리에 환멸을 느낄 일이 많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새로운 조직 원리를 활용했는데, 그중 중요한 하나가 노예였던 것이다.

 

‘노예’라고 하면 우리에게 먼저 떠오르는 것이 미국 남부의 목화밭이다. 그러나 그런 단순노동은 역사상 존재한 노예의 모습 중 한 가지일 뿐이다. 또 하나의 모습이 노예 전사였다. 극한적 전투행위의 수행에 있어서나 주인에 대한 충성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점에 있어서나 노예 전사는 자유민 전사에 비해 장점을 가진 존재였다. 이슬람권에는 ‘맘루크(Mamluk)'라는 이름의 노예 전사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250년에서 1517년까지 노예 전사 집단이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를 지배한 맘루크 술탄국이지만, 노예 전사 제도는 9세기에서 19세기까지 이슬람권 전역에서 널리 시행된 것이었다.

 

문명권의 중심부와 외곽, 그리고 배후지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인력 교류 측면의 가장 중요한 현상이 군사력과 노예제였고, 두 현상은 겹쳐져 나타나기도 했다. 때에 따라서는 노예제의 활용이 행정과 상업 활동에도 나타났다.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국이 성립한 배경에는 특수 노예로 양성된 맘루크에게 행정 요직을 맡기는 관행이 있었다. 청(淸)나라 황제에게 한족 신하들이 자신을 ‘신(臣)’이라 칭하는 한쪽에서 만주족 신하들이 ‘노재(奴才)’라는 말을 쓴 관행에서도 주종관계의 친근함을 강조하는 뜻을 읽을 수 있다.

 

맘루크 술탄국을 격파한 오토만 제국에는 ‘제니체리(Janissary)'란 이름의 노예 전사가 19세기 초까지 있었고 그에 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그 주축은 발칸반도 기독교권에서 잡아온 소년들인데, 혹독한 훈련을 받고 술탄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다가 40세가 지나면 결혼도 하고 자기 직업도 가질 수 있었다. 출세에 유리한 길이라서 후기에는 자유민이 뇌물을 써서 제니체리에 편입하려는 풍조까지 있었다고 한다. 

 

초기의 제니체리는 각자의 고향과 절연시켰지만 후기에는 연락을 유지하게 하고 만년에 고향으로 은퇴도 허용되었다. 이 변화에 오토만 제국과 발칸 지역 사이 관계의 변화가 비쳐져 보인다. 제국 초기에는 아직 큰 영향력을 못 가진 발칸 지역을 약탈 대상으로만 여겼지만, 영향력이 확대-강화된 후기에는 제니체리의 활용이 그 개인의 봉사에 그치지 않고 출신 지역의 관리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노예 제도의 기능이 극대화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맘루크와 제니체리가 보여준 것과 같은 인적 자원 교류의 기능은 여러 시대 여러 지역의 노예 제도에서 널리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몽골제국의 최정예 군대였던 친위대(keshig)에서도 노예 전사의 특성이 나타났다. 칭기스칸이 휘하 세력 수령들의 자제를 인질(turqaq)로 받아 1만 명으로 조직한 친위대 대원들은 대칸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발판으로 “그의 은총을 보장받고 장차 그와 함께 제국 통치에 동참하는 엘리트 집단”이 된 것으로 김호동은 설명한다.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109쪽) 친위대에 자제를 보낸 휘하 세력 중에는 몽골족과 접촉이 별로 없던 투항 집단도 있었고, 그런 집단들이 몽골제국에 융화되는 데 친위대가 매체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