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몽골제국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몇 차례 더 써야겠다. 중요한 현상이기도 하려니와, 아직까지 해명이 잘 되어 있지 않은 현상이기 때문이다. 몇 차례 더 쓴다 해서 명쾌한 그림이 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 성과를 잘 살펴보면서 맥락을 넓게 더듬어보면 몽골제국의 성격을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흐릿하게라도 뽑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그림을 뽑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 막 도착했다. Thomas T Allsen, Commodity and exchange in the Mongol empire: A cultural history of Islamic textiles (몽골제국의 물품과 교역: 이슬람세계 직물의 문화사, 1997). 직물과 복식, 천막에 관한 이야기만 담긴 100여 쪽 길이의 작은 책인데, 내가 어렴풋이 생각해 온 몽골제국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지금까지 본 어느 책보다 잘 보여준다. 

 

여러 면에서 몽골 시대는 이 직물 교환의 역사에서 정점을 이루는 것이며, 장차 유럽 해상제국의 출현으로 열리게 될 새로운 단계의 전주곡, 또는 그 배양기(incubator)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101쪽)

 

흉노와 돌궐, 거란과 여진의 경험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몽골제국의 흥기를 설명할 만한 틀을 찾을 수 없다. ‘유례가 없다’는 것이 몽골제국의 특성이고, 그렇다면 몽골제국을 새로운 유례가 만들어지는 계기로 봐야 할 것 아닌가?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을 몽골제국에서 찾아볼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 방향으로 내가 하고 싶은, 그러나 아직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는 이야기를 올슨은 직물이라는 한 가지 물품의 움직임만을 놓고 꽤 분명하게 내놓는다.

 

유목민은 필요한 모든 물품을 자체 내에서 공급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아나톨리 카자노프의 표현으로 ‘비자족적(non-autarchic)’ 성격을 가진 사회다. 필요한 경제적 자원을 늘 정착사회로부터 획득하고, 문자와 종교 등 정착사회의 문화현상이 유용할 때는 쉽게 받아들인다. 차용 현상은 국가 형성 단계에서 특히 빈번해지기 때문에 유목민의 역사에서 주기적 현상처럼 나타난다. 그 단계에서는 정복 과정에서 정착사회와의 접촉이 늘어나고 각종 전문가에 대한 수요가 커지기 때문이다. (101쪽)

 

(문화 교류와 물자 교역에서) 유목민의 역할을 작게 보는 풍조는 정착민 세계의 오래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원에 사는 사람들을 아만인, 문명의 파괴자로 보거나 기껏 좋게 봐줘야 자연인이나 고귀한 미개인 정도로 보는 편견이다. 아틸라, 칭기스칸과 티무르의 추종자들이 각자의 우주관과 미적 기준과 도덕적-경제적 가치체계를 갖춘 복잡한 문화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오늘날 연구자들은 이런 편견 때문에 놓쳐서는 안 된다. 정착사회의 풍요로운 문화적 자산에 마주쳤을 때 그들이 차용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자기네 독자적인 세계관과 취향이었다. 초원 주민들은 여러 문명권 사이에서 이런저런 요소들을 아무 생각 없이 이리저리 옮겨다 주는 택배회사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문명권 사이의 중요한 접촉이 어떻게 이뤄진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역사와 그들의 취향을 충분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105-6쪽)

 

유목민은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여러 문명권의 외곽지대에 널리 존재했다. 유목민의 역사는 인접한 문명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생산양식을 공유하는 멀리 떨어진 유목사회들 사이에도 상황에 따라 긴밀한 접촉이 이뤄질 수 있었다. 접촉 중에는 군사적 접촉과 경제적 접촉이 있었다. 경제적 접촉은 유목사회 내부의 수요에 따라서만이 아니라 문명권 사이의 교역에 편승함으로써 큰 이득을 얻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군사적 접촉은 특정 문명권에서 급격한 기술 발달이 일어날 때 그 혜택을 받은 인접 유목민이 초원에서 군사적 우위를 누리면서 크게 확대될 수 있다.

 

몽골제국이 일어날 때는 유목사회 간의 경제적 접촉과 군사적 접촉이 모두 크게 확장되는 시점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내 가설이다. 그런 거대한 제국의 건설을 칭기스칸과 그 몇몇 후계자들의 의지와 능력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유목사회 간의 접촉 확장이 제국 건설이라는 형태를 취한 것으로 설명하는 편이 더 그럴싸해 보인다. 몇 가지 조건이 그 방향의 설명을 뒷받침해 주는 것 같다. 앞으로 두어 달 동안 더 세밀하게 살펴보려 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