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로타리에서 백 미터쯤 올라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 두 집째, 골목들이 마주친 모퉁이의 자그마한 왜식 집으로 이사한 것이 초등 3학년 올라갔을 때였던 것 같다. 부산 피난 후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우리 집' 살림을 시작한 곳이다. 대지 30평 남짓에 건물 열댓 평의 조그만 집이었지만 단칸방 셋방살이에서 풀려난 우리들에겐 대궐 같은 곳이었다. 대문 안으로 조그만 마당이 있었고, 현관을 들어서면 복도 끝이 부엌, 그 오른편에 조그만 욕실까지 있었다. 복도 양쪽이 방인데, 오른쪽은 6조 다다미방이었고, 왼쪽에는 조그만 방 둘이 미닫이를 격하고 있었다. 오른쪽 방이 사내아이들 방이었고 왼쪽 깊은 방이 여자들 방이었으며, 왼쪽 바깥방은 거실이었던 셈이다. 마당에서 집 왼쪽으로 들어간 곳에는 집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근처에서 '은행나무집'이라 불리기도 했다.

 

혜화동 집의 제일 큰 가구가 정릉 집에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 책장 하나를 가져온 것이었다. 6자 정도 폭에 밑은 한 자 남짓 깊이에 두 자 남짓 높이의 장 모양이고(꼭대기엔 서랍도 한 층 있었다.) 그 위에 세 자 가량 높이의 책장이 얹혀져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 전공서적도 그 안에 들어 있었지만,(아래쪽 장 속에) 내게 중요한 것은 세 뭉치의 책들이었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그리고 학원사 세계대백과사전.그 책들이 내 혜화동 생활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성분이었다.

책을 어떻게 읽으라는 가르침을 누구에게도 받은 기억이 없다. 그냥 "책이 거기에 있으니까" 읽을 뿐이었다. 대학생도 힘들어할 책들을 초딩이가 다 읽었다. 읽었다기보다 눈에 발랐다.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눈에 바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너무 어려워 못 읽어낸 책이 딱 한 권 있었다는 사실이 반증해 준다. <20세기의 지적 모험>이란 제목이었는데,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 생각을 하고 펼쳤다가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 니체 해설서 읽으면서 뻑뻑함을 느낄 때 그 기억이 떠오르며, 내가 원래 철학적 사고에 약점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의 게걸스런 책읽기에 스스로 혀를 차는 것은 무엇보다 백과사전까지 읽을거리로 활용했던 기억 때문이다. 세계 모든 나라의 수도와 인구, 산의 높이와 강의 길이 등등 온갖 쓰잘 데 없는 정보를 머릿속에 쟁여넣는 것이 뭐 그리 재미있었는지. 당시에 골든벨 같은 퀴즈대회가 있었으면 한 주름 잡았을 것 같다. 흰 종이에 검은 글자 찍어놓은 거라면 뭐든지 환영이었다. 우리 집에선 한국일보를 구독했는데, 네 면밖에 없던 게 다행이다. 요즘처럼 몇십 면 찍어 보내면 학교 갈 틈도 없지 않았을지...

어린이 잡지로 <새벗>과 <학원>을 대놓고 봤다. <학원>은 중고딩 용이었지만 세계문학전집을 머리에 담아놓은 초딩에겐 부담없는 읽을거리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만화가게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세계문학전집보다 훨~ 재미있었다. 이 취향은 고딩 때 무협소설로 발전하게 된다.

 

골목에서 아이들과 뛰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동작이 굼떠서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팽이도 못 돌리고, 제기도 못 차고, 달리기도 늦고, 힘도 약하고... 몸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했다. 게걸스런 책읽기는 그 반작용이었을 수도 있다.

형들이 골목에서 놀 때는 덕분에 끼어 놀 수 있었지만, 노는 재간이 없으니 늘 놀아봤자였다. 골목의 놀이친구들보다 더 요긴한 놀이 상대는 우리 집에서 2백 미터 가량 더 올라간 곳에 있는 박 선생님 댁 아이들이었다. 우리 집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박 선생님"이라 불렀던 박종홍 선생님은 어머니의 이화여전 때 은사였고, 아버지께는 대구고보 때 은사였으며, 아버지와 문리대 동료 교수였던 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나 가까워지는 데도 어떤 식으로든 매개 역할을 하셨으리라 짐작된다. 그 댁의 5남2녀 중 4남인 윤창 형이 큰형과 동갑이고 막내 순창 형과 예경이가 나보다 한 해 위, 한 해 아래였다. 그들이 우리 남매들과 뛰어 노는 데도 좋은 상대가 되었고,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노는 데는 골목의 다른 아이들이 해줄 수 없는 상대역을 맡아줬다.

박 선생님 댁 아이들과 함께 우리 남매들의 특별한 친구 역할을 한 것은 어머니 친구 고 선생님네 아이들이었다. <역사 앞에서>에 아버지 친구 이철 씨와 어머니 친구 고 선생님의 결혼을 권한 얘기가 나온다. 이철 씨가 전쟁 중 월북한 뒤 고 선생님은 숙대 교편을 잡으며 남매를 키웠는데, 은경 누나는 내 한 해 위였고 경이는 한 해 아래였다. 경이네는 우리 집과 5백 미터 가량 거리였다. 이 특별한 친구들과의 놀이는 어머니가 권장하며 거의 아무 제약을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 하던 놀이를 새로 하게 되는 것은 대개 이들과 함께였다.

 

혜화동 살 때부터 생겨난 풍속 한 가지가 설 때 아버지 동료였던 세 분 선생님께 세배 가는 일이었다. 박 선생님 댁에는 어머니도 영아도 다 같이 가는 일이 많았는데, 동숭동의 서울대 관사에 살고 계시던 이희승 선생님과 김상기 선생님께는 대개 3형제가 다녔다. 이 선생님은 이화여전 이래 어머니의 직계 스승이셨는데, 어머니는 다른 제자분들과 함께 세배하느라고 우리를 따로 보낸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앞집의 김상기 선생님을 피하려는 뜻이 있으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됐다. 김 선생님 역시 어머니의 이화여전 스승이시고 문리대에서 아버지와 제일 가까운 동료로 계셨는데, 아버지 돌아가신 후 인세 문제 등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훨씬 뒤에야 알게 됐다.

박 선생님 댁은 우리 또래 아이들이 있어서인지 내외분의 성품 덕분인지 늘 화기가 넘치는 집이었고, 이 선생님 댁은 대체로 편안한 분위기지만 너무 점잖아서 주눅이 드는 편이었다. 김 선생님 댁은 썰렁~한 분위기여서 벌 서는 기분이었다. 표현력이 뛰어난 작은형은 머지 않아 이 선생님을 "땅꼬마 할아버지", 김 선생님을 "네모돌이 할아버지"로 지칭하게 된다. 그 무렵 세배 풍속이 만들어진 것은 큰형이 경기중학생이 되니까 아버지의 옛 동료들께 인사 드릴 자격이 되었다고 어머니가 판단하신 때문일 것이다.

세 분 선생님께 세배 오는 분들은 대개 아버지를 아는 분들이었을 것이다. 우리와 마주치는 분이 있으면 그 댁 선생님께 누구 자제들이란 말씀을 듣고 우리를 유심히 쳐다보곤 하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가 대단히 훌륭한 분이셨다고 하는 집안 어른들의 말씀에 그런가보다 하고 듣던 것과 다른 차원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경험이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을 크게 느끼기 시작한 데는 이런 자극도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지.

 

학교 얘기가 이제야 나온다. 깨어 있는 시간을 제일 많이 보낸 곳이 학교였다. 그런데 학교생활의 기억에서 짚어낼 것이 많지 않은 것은 학교가 재미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초등학교에서도 분단장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6학년 끝나갈 때 특수한 상황에서 명목상 분단장 잠깐 해본 걸 제외하면) 참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쓰거든 떫지나 말라고, 공부를 못하면 놀기라도 잘해야 할 것을,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아이가 성격까지 뚱했으니.

훗날의 나를 보고는 초딩 때 공부가 시원찮았다는 사실을 누구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이다. 100명 반에서 20등 30등 사이가 늘 내 자리였다가 5학년 이후에야 10등 안으로 들어와 그래도 괜찮은 중학교 바라볼 주제가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치마바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어머니는 입학식 때도 안 오셨고, 나 때문에 우리 학교 오신 게 졸업식 때뿐이었던 것 같다. 졸업을 앞두고야 내 석차가 올라간 것은 중고등 때도 반복된 일인데, 입학시험을 앞두고는 성적 구성에 있어서 치마바람의 비중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치마바람 없는 아이가 선생님께 무시받는 경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감수하고 지냈는데, 더러 예외가 있었던 것 같다. 제일 뚜렷한 기억은 3학년 때의 여선생님. 가정방문이라 하면 같은 방향에 사는 아이들을 모아 한 집씩 우루루 몰고 가면 방문받은 집 문앞에서 놀며 기다리기도 하고 더러 잘 사는 집에는 다들 들어가 다과를 대접받기도 한다. 가까운 순서대로 하면 우리 집 들를 때가 되었는데 선생님은 내게 "너희 집은 나중에." 해서 저쪽 끝집까지 다 쫓아다녀야 했다. 내가 미워서 괄시하시는 건가, 속으로 억울한 생각도 드는데, 결국 애들 다 떨궈놓고 나서야 단둘이 우리 집으로 갔다.

어머니와 선생님이 마주 앉은 것을 보고, 나가 있으라 해서 멀리도 못 가고 마당에서 놀며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 있다가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는가! 현관 모서리에서 살그머니 들여다보니 두 분이 손을 붙잡고 방성대곡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상하고 두려운 생각에 몰려 어찌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가 한참 지난 뒤에야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 선생님도 전쟁 때 혼자 된 분이었고, 우리 집 사정을 보니 신세 비슷한 분 마주치게 될 것인지라, 다른 애들 데려오지 않기 위해 맨 뒤로 돌린 것이었다.

그 선생님은 나름대로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가 어머니 만난 길에 고무적으로 들릴 만한 얘기를 애써 해주셨던 모양이다. 후에 두고두고 나를 쪽팔리게 했던 인사성 밝다는 얘기도 그 때 나온 것인 듯. 운동장에서 선생님 세 분이 함께 지나가는 데 마주쳐서는 선 자리에서 머릿수대로 세 번 꾸벅댔다는 얘기.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인사 하나만은 확실히 하는 아이라는 얘기가 왜 그리도 쪽팔렸는지...

 

일요일에 외갓집 가는 행사는 꾸준히 계속되었다. 친가 친척들은 차례, 제사 때 열심히들 찾아 줬다. 동성학교 교사로 있던 기돈 형님과 농협 근무하던 대규 형님은 그밖에도 자주 들렀는데, 교육 문제와 돈 문제 의논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남매들 사이에 오래갈 위계질서가 세워졌다. 큰형의 가부장적 권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중학생이 된 큰형의 역할이 분명하기를 어머니가 원하신 결과인데, 그 때 나는 큰형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것이 큰형에게 얼마나 큰 짐이었는지 깨닫고 미안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작은형은 이 권위에 반항적이었고 나는 순종적이었지만, 둘에게는 큰 폐해가 없었던 편이라고 생각한다. 유일한 여자아이인 영아가 전면적으로 불편한 압박을 받았고, 공주할머니가 그 수호천사 역할을 맡으셨지만, 오빠들보다 큰 상처를 남겼을 개연성이 있다.

'우리 집'에 살게 되면서 어머니 친구분들도 많이 찾아오시게 되었다. 제일 익숙한 그룹은 전쟁 때 혼자 되신 지식여성들의 자칭 '과부클럽' 신신회였다. 앞서 말한 경이 어머니 고 선생님을 비롯해 열 분 가량 되었던 것 같은데, 모두 우리 남매에겐 이모님들처럼 친숙하게 되었다.

특별히 칼러풀한 분이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어머니의 고종사촌 병희 아주머니였는데, 어머니보다 한 참 연하에 직업도 성우이신지라 그 화려함이 당연한 것일 수 있는데, 이화여전 동창인 초열 아주머니는 참 놀라운 분이셨다. 검소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어머니와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의 그 아주머니가 어찌 그렇게 단짝으로 지내셨는지는 근년 어머니에 대한 내 이해가 넓고 깊어지면서 비로소 풀리기 시작한 문제다. 해군 장교와 재혼한 초열 아주머니는 어머니께도 재혼을 권하셨던 모양이고, 그분 말씀만은 어머니도 귀담아 듣기는 하셨던 모양이니 우리 남매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잠재력을 가진 분이셨던 셈이다.




Posted by 문천
 

도둑촌'이란 말은 1970년 경에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온 동네에 부잣집만 모여 사는 것이 그 무렵 새로 생긴 현상이어서 별나 보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대형 기획에 따라 동네가 만들어지기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한 골목에 들어가도 부잣집 있는 구역이 있다가 조금 가면 판자집이 다닥다닥 있기도 하고 그랬다. 부자와 가난뱅이들이 아침저녁으로 마주쳐 가면서 살던 시절이다. 70년대 이후의 변화로 부자들은 서비스 종사자 외에는 가난뱅이 얼굴 안 보고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자체가 사회의 소통이 크게 줄어든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혜화동 로타리나 명륜동 성대 입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들이 보성학교 앞에서 만난다. 말굽형의 그 길 주변에는 대지가 50~100평의 중산층 주택(대부분 한옥)이 자리 잡고 있고, 더러 수백 평 되는 부잣집들이 끼어 있었다. 그 길의 위쪽에서 갈라져 산비탈로 올라가면 달동네가 펼쳐져 있었다.

55년 초 서울 와서부터 58년 봄 혜화동에 집을 사 옮기기까지 3년 남짓 셋방살이를 한 한옥 문간방은 말굽 모양 길의 꼭대기에서 보성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왼쪽으로 올라가는 길 어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고만고만한 한옥들이 깔려 있는 동네였지만 당시로는 제법 살 만한 사람들이 몰려 사는 '괜찮은 ' 동네였다. 규모 있는 한옥에서는 예전부터 아랫칸에 행랑살이를 시키던 전통이 있어서 식구가 아주 많지 않으면 세를 주는 일이 많았다.

이 집에서, 아니, 이 방에서 나는 온 가족과 함께 2년 남짓 살았다. 전반부에는 작은형이 빠진 3남매와 어머니, 그리고 '공주할머니', 다섯 식구였고, 후반부에는 작은형까지 합류해 여섯 식구였다.

공주할머니는 어머니의 외숙모 되는 분이셨는데, 전쟁 후 의지할 데 없는 신세가 되어 우리 집 살이를 맡아주신 분이다. 내가 중학교 때까지 우리 곁을 지켜 주셨는데 우리에겐 할머니가 외할머니와 공주할머니 두 분이 계셨던 셈이다. 두 분 사이는 시누-올케간인데, 외할머니의 위풍당당과 대조되는 섬약한 기질에다가 남의 집에 얹혀 산다는 입장까지 겹쳐져 꾀죄죄한 인상을 풍기는 분이었다.

큰형은 나이도 든 편인데다 '가장'의 책임감까지 일찍부터 자각한 터이고, 작은형은 합류가 2년이나 늦은 데 비해 나와 동생은 공주할머니의 손을 많이 탔고, 동생이 특히 더했다. 손을 탄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옛날얘기를 통해서였다. 우리 또래로 나와 동생은 옛날얘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고, 내 경우 인문적 소양의 바탕을 여기서 얻은 바가 크다.

어머니는 여기 계시는 동안 숙대에서 이대로 옮기셨는데, 나야 옮기시는 게 무슨 일인지도 몰랐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때 돌아오시는 분이니까. 돌아오실 때는 빵 봉다리를 들고 와서 우리를 그 시간대에는 다른 일 제쳐놓고 문간에서, 또는 길 어귀에서 서성이고 있게 만들었다. 그보다는 모든 음식을 만들어주고, 우리를 심심하지 않게 해주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보살펴주는 공주할머니의 존재감이 훨씬 컸다. 그런데 나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 할머니에게 미안한 일이 하나 있다. 우리를 데리고 정릉리에 가서 외할머니와 함께 앉았을 때 누가 짖궂게 나와 동생에게 물었다. 어느 할머니가 더 좋으냐고. 피붙이도 아닌 공주할머니를 우리가 따르는 게 재미있어서 물었던 모양이다. 동생은 망설임 없이 공주할머니 손을 잡았는데, 나는 외할머니에게 붙었던 것이다. "외할머니 얼굴이 더 훤하시잖아." 지금 생각해도 내 정은 공주할머니께 있었다. 그 질문이 존재보다 당위를 묻는 것으로 그때는 느껴졌던 모양이다.

일요일마다 정릉리에 갔다. 돈암동까지 전차로 갈 때도 있었고 내내 걸어서 갈 때도 있었다. 내내 걸으면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꽤 먼 길인데도 멀다고 불평할 생각이 들지 않는 '풍요의 땅'이 정릉리 외갓집이었다. 당시엔 그 집과 과수원, 밭이 다 우리 집 소유란 사실도 의식하지 못한 채, 단칸방에 살던 아이들이 대궐 같은 외갓집에 가서 모처럼 활개를 칠 수 있고, 좋은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점심때 외할아버지가 뒷마당에서 닭 한 마리 잡아 우리 밥상에 올려주는 것이 이 행사의 하일라이트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할아버지가 일 벌이고 있는 뒷마당에 내가 무심코 들어갔다가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그 뒤로 나는 닭고기를 먹지 못했다. 군대 가서 쥐라도 잡아먹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야 입에 대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닭고기는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핵심 메뉴를 기피하게 되었지만, 그것 아니라도 일요일의 정릉리는 '약속의 땅'이었다. 머리가 꽤 굵을 때까지도 정릉리 행을 무슨 이유로라도 제친 기억이 없다.

일요일 아닌 날의 명륜동 생활은 대체로 따분했다. 동네 애들은 두 패로 나눠 전쟁놀이를 하고 많이 놀았다. 한 패 대장이 우리 안집의 함병일(우와! 이름이 다 생각나네!) 군이라서 나까지 붙여주기는 하지만 동작이 느려서 구박받기 바빴다. 옆 골목의 딱길이패와 병일이패가 라이벌 관계였는데, 딱길이란 서울대 경제통상학부의 표학길 교수였다. 어쩌다 한 번 윗동네와 패싸움을 할 때는 두 패가 연합을 하고 모두 대단히 긴장했다. 윗동네는 빈촌이라 그런지 애들 노는 게 험하다는 정평이 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이 게르만족에게, 한나라 사람들이 흉노족에게 그런 식으로 깔보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었었을지.

이 때까지는 책과의 관계가 깊지 못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하기보다 글읽기에 더 능했다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지만, 워낙 집에 책이 없었다. 방 한 칸에 다섯 식구, 여섯 식구가 사는 형편에 책을 둘 형편이 되지 못했다. 3학년이 되어 혜화동으로 옮겨 기막힌 독서 환경을 가지게 된 것이 내 인생에 어떤 계기가 되었던 것인지,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엄청난 일이었다.

학교에 관해서는 큰 기억이 없다. 2부제 수업을 하던(1학년 때는 3부제?) 시절인데 오전반인지 오훗반인지 헷갈려서 엄청난 낭패감을 한두 번 느낀 일 정도? 설사가 나는 걸 억지로 참다가 너무 늦게 결심하고 변소 갈 허락을 받았지만 교실 문을 나서기 전에 지려 버리는 바람에 똥싸개로 놀림받은 일 정도가 큰 사건이었고. 학교에만 가면(동네에서 놀 때도 그렇지만) 내가 못난 놈이란 생각에 짓눌려 살았다. 말도 잘 못하고, 몸도 잘 못 움직이고, 음악과 미술에도 보통 이하의 젬병, 나중에 생각하면 '표현'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통지표에도 수는 가물에 콩 나듯 하고 우와 미 사이에서 놀았다. 음악, 미술, 체육에서는 양도 심심치 않게 받았다.

표현력 없는 아이가 모처럼 뛰어난 표현력을 보였다고 얘깃거리가 된 일이 하나 있다. 외삼촌과 수수께끼 놀이를 하다가 내가 물었다. "네모 안의 네모가 뭐게?" 몇 차례 시도 끝에 외삼촌이 항복하자 내가 정답을 가르쳐줬다고 한다. "내 바지!" 물자가 귀하던 시절, 넉넉지도 않은 살림에 내 옷은 모두 형들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무르팍이 까진 바지에 네모난 헝겊을 대 기워 입는 것은 보통이었는데, 나는 두 손을 거친 옷을 입다 보니 기워 댄 헝겊이 또 헤져서 그 위를 또 기워 "네모 안의 네모"가 된 것이다. 이것을 뛰어난 표현력이라 칭찬한 것은 고물만 물려받는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라고 짐작한 모양인데, 나는 별로 억울한 생각도 없었고, 그저 수수께끼 소재를 찾은 것일 뿐이다. 그래도 모처럼 칭찬 듣는 게 좋아서 뭘 표현하려 한 게 아니라는 항의는 하지 않았다.


Posted by 문천
 

성장기를 통해 외조부모님 다음으로 우리를 가까이서 살펴봐 주신 분들이 고종 형님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위로 누님이 네 분 계셨고, 나이 터울도 큰 편이어서 큰 고모님이 시집 가실 때 아버지가 태어나셨다니까 맨 위의 형님들은 아버지에게 불과 몇 살 아래였고 어머니보다 연장인 분도 두 분 계셨죠.

정씨 댁에 시집 가신 큰 고모님과 박씨 댁에 시집 가신 둘째 고모님 슬하의 형님들이 특히 가까웠습니다. 큰 고모님은 장수하셔서(1900년 직전 출생이실 텐데 85년경 세상 떠나셨음) 어린 우리 형제들을 너무나 끔찍이 위해주셔서, 어린 마음에도 "왜 고모님은 친손자들보다도 우리를 더 아쎠주시나?" 의아한 생각이 이따금 들기까지 했죠.

아버지가 금융조합 간부, 서울대 교수 되신 것이 개천에서 용 난 격이었던 모양이라, 주변사람들이 모두 그분을 쳐다보고 의지하는 분위기였던가 봅니다. 또 그분께서도 사람 아끼는 마음이 많으셨던 듯, 가르쳐줄 만한 것이 있으면 가르쳐주고 기회를 열어줄 만한 것이 있으면 열어주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잘 모으셨던가 봅니다. <역사 앞에서>에 붙은 회고문 중 큰 고모님네 셋째 형님 정기돈 교수가 쓴 글에 잘 나타나 있죠. 아버지 생전에 장성해 있던 위쪽 두 분 고모님네 형님들이 그런 기회들을 많이 가졌습니다.

몇 분을 금융조합 서기로 넣어주셨죠. 정씨 댁 큰형님과 박씨 댁 큰형님(이 분은 결국 농협 중앙회 이사까지 지내셨죠.), 그리고 6촌동생 한 분이(제게 7촌인 '경희 아저씨'는 씨가 귀한 친가에서 제일 가까운 촌수였는데, 고종 형님들과 내내 가까이 지내셨기 때문에 그분들 중 한 분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금융조합-농협에 들어갔습니다.

둘째 고모님네 박씨 댁은 형제들 중 여럿이 6-25 때 고모님을 모시고 북쪽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접할 수 있는 것이 대규 형님과 영규 형님, 두 분뿐이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제일 든든히 둘러싸고 있던 건 큰 고모님네 형님들이었죠. 4남1녀 중 위쪽 세 분 형님은 우리에게 숙부님 같은 역할을 해주셨고, 고모님은 할머니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맨 위의 영돈 형님은 대구에서 사셨기 때문에 비교적 접촉이 적었고 그 밑의 세돈 형님과 기돈 형님 역할이 컸습니다. 어렸을 때는 기돈 형님이 가까이 있으면서 제일 앞장서서 우리 집을 돌봐 주셨죠. 우리가 명륜동과 혜화동에 사는 동안 삼선동에 사시면서 동성학교 교사, 숙대 교수를 지내다가 우리가 다 큰 뒤에 충남대학으로 옮기셨죠. 형님들 중 학술-교육 분야에 진출한 분이 이 분뿐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도 가장 요긴한 의논 상대였습니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역사 공부를 하게 된 분이니 그분에겐 아버지가 외삼촌일 뿐 아니라 스승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둘째인 세돈 형님도 대구에 살았기 때문에 어릴 때는 많이 못 보고 지냈지만, 제가 대학 다닐 때 서울에 몇 해 와 사셔서 많이 접할 기회를 가지고 보니, 아버지께서 가장 사람됨을 아끼고 가장 가까이 거느렸던 분이라서 아버지에 대한 향념이 다른 형님들과도 다른 것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30대에 계명대 교수로 있을 때가지도 가까이 모시면서 많은 것을 배웠죠. 세돈 형님은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위의 영돈 형님은 맏이라서 어떻게든 중등학교에 보냈고, 밑의 기돈 형님은 아버지가 도와줄 수 있었는데) 일제 말기에 징용 나갔다가 해방 후 돌아온 것을 아버지께서 곁에 데리고 있다가 돌아가셨던 겁니다. 이분 말씀을 어머니도 제일 무겁게 여기셨죠.

경희 아저씨, 대규 형님, 기돈 형님 세 분이 제가 혜화동-명륜동에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시절을 지내는 동안 삼선동, 성북동에 살면서 우리 집의 친척 역할에 앞장서신 분들입니다. 친척 얘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외가로 돌아가보면 외조부모님 밑에 외삼촌과 이모가 계셨죠. 어머니보다 열 살 아래(왜 터울이 그리 큰지는 외조부모님 얘기에서 알아볼 수 있죠?) 외삼촌은 제가 정릉리에서 살 때 결혼했는데, 성질이 급하면서도 쾌활한 분이라 우리 주변에서 가장 칼러풀한 분이었고, 그보다 세 살 아래의 이모님은 늦게 결혼하시고 자식 없이 혼자 되셔서, 저희 형제라도 좀 살펴드리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여의치가 않군요. 어머니를 이천에 모신 후 한 번 여주 깊은 산속의 실버타운에 가서 이모님을 모셔다가 어머니 면회를 시켜드렸더니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어머니 뵈러 가는 김에 시간을 맞출 수 있으면 또 한 번 모셔다드리고 싶은데 아직 그런 기회를 다시 만들지 못했군요.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