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방면에서 정릉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개울 건너에 숭덕국민학교가 있는 곳을 조금 지나 왼쪽으로 국민대 방향, 오른쪽으로 청수장 방향이 갈라집니다. 더 바짝 왼쪽으로는 아리랑고개와 스카이웨이 방향 길이 있어서 네거리 모양으로 되었지만 이것은 근년에 만들어진 네거리이고, 예전에는 아리랑고개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고 좀 올라가서 국민대-청수장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었죠. 국민대도 그때는 없었고, 배밭골 방향이라고 했습니다.
청수장 방향으로 몇백 미터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내려가면 다리가 있고, 다리 건너 오른쪽으로 굽어 가면 몇십 호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시내에 접한 마을을 뚫고 좀 지나가면 앞서의 다리보다 5백 미터 가량 위의 다음 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면 청수장 가는 길로 다시 합쳤죠. 합치는 언저리에 숭덕국민학교 분교가 있었는데, 그 자리가 나중에 청덕초등학교 부지가 된 것 같습니다.
<역사 앞에서>에 나오는 집이 그 마을 가운데 있었습니다. 마을 위쪽으로는 옛날 서울 고관의 별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고색창연하고 웅장한 저택도 하나 있었지만, 마을 안에선 제일 번듯한 기와집이었죠. 대지가 130평이었다고 후에 들었는데, 'ㄷ'자로 규모 있는 건물에 널찍한 뒷마당도 있었죠. 아버지가 <조선역사> 인세로 청수장-배밭골 갈림길 마을에 작은 집을 사서 정릉리 생활을 시작했다가 좋은 집이 매물로 나오니까 사서 옮기고, 살던 집에는 빈털터리로 월남한 장인 내외분을 모셨답니다. 47년 가을 생인 형은 앞서 집에서 태어났고, 50년 초 생인 저는 큰 집에서 태어났으니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이겠죠.
마을 쪽으로 빠져나오기 전 청수장길 양쪽으로 과수원과 밭을 구하셨는데, 아버지는 농사일을 좋아하셔도 직장에 다니느라 한계가 있으니 어머니를 농사꾼 만들 속셈이셨나 봅니다. 어머니가 큰 고생 하실 뻔한 것을 마침 친정아버님이 와서 구해주신 셈이겠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농사의 주체가 되셨고, 사위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주셨죠. 우리 살던 큰 집으로 옮겨와 사시면서.
1954년 서울로 올라온 것은 어머니가 숙대 교수로 자리를 얻으신 덕분이었는데, 그 때 큰형이 초등 4학년, 작은형이 1학년이었죠. 그 때 어머니가 혜화동-명륜동 쪽으로 자리 잡는 결정을 하시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첫째, 어머니의 이전 서울 생활에 경성제대-서울대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낯익은 동네였고, 아버지의 가까운 동료분들이 그 근처에 몰려 살고 계셨습니다.
둘째, 숙대까지 전차로 출퇴근하기가 괜찮은 위치였습니다.
셋째, 정릉리의 외할아버지 댁과 왕래가 편한 방향이었습니다.
넷째, '명문' 혜화초등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혜화학교 얘기를 좀 하죠. 1962년 제가 경기중학 들어갈 때, 420명의 신입생 중 30명 이상을 합격시킨 명문 초등학교가 대여섯 개 있었습니다. 덕수, 혜화를 필두로 수송, 재동, 남산 등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혜화학교 졸업이 1300명 가량이었는데, 남학생의 10% 가까이가 (재수생 포함해) 경기 들어갔다면, 소위 '5대 공립-5대 사립'에는 절반 너머 들어갔겠죠? 나중에 생각하니 대단한 명문이었던 셈입니다.
이 명문의 텃세 때문에 우리 집이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한 집의 두 형제를 한꺼번에 전학받아줄 수 없다는 바람에 큰형만 혜화에 다니게 되었죠. 그래서 어머니는 명륜동 보성학교 부근의 문간방 하나를 세내어 큰형과 동생만 데리고 사시고, 작은형은 숭덕국민학교로 전학해 저와 함께 외할아버지 댁에서 지내게 된 겁니다. 2년 후 제가 학교 들어가러 혜화동에 합류하고도 작은형은 아마 1년 더 정릉에서 지낸 뒤 전학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큰형이 중학교 들어가 자리를 비워준 덕분인지.
이제 정릉리 생활 얘기로 들어가죠. 당시의 정릉리는 시골이었습니다. 마을을 벗어나면 온통 농지 뿐이었고, 그 가운데로 (배밭골 골짜기와 청수장 골짜기를 가르는) 산자락이 삐죽이 흘러내려와 있었죠. 논으로 메뚜기와(구워 먹으려고) 개구리(마을에 매 키우는 아저씨가 있어서 개구리 잡아가면 돈을 줬다고 하는데 내 손으로 개구리 팔아먹은 기억은 없어요.) 잡으러 다니고 산자락으로 기어올라 버섯 찾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들판으로 산으로 싸돌아다니기보다는 과수원에 놀러 나가는 일이 훨씬 더 많았죠. 철 따라 먹을 것이 여러 가지 있었으니까요. 복숭아밭이었는데, 울타리삼아 심어놓은 앵두 소출도 많았고, 과수원집 둘레로는 참외, 가지 등 채마밭이 있었습니다. 행길 건너 개울가의 밭에는 옥수수를 심어서 한 철은 밥 생각 안 날 정도로 옥수수를 많이 쪄 먹곤 했습니다.
같이 놀던 아이들 기억은 또렷하게 남은 것이 없습니다. 과수원과 집 안에 놀 공간이 넉넉하기 때문에 다른 마을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적은 편이었고, 마을 어른들이 우리 집을 특별한 집으로 여겨서 아이들에게도 저랑 노는 데는 각별히 주의를 주지 않았나 나중에 생각났습니다. 어쩌다 메뚜리 잡으러 나갈 때, 외할머니가 두목급 아이들에게 단단히 단도리를 하시던 생각도 납니다. 한 번 조금 까져서 들어가니까 외할아버지까지 나서서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은 일도 생각나고요.
형제간에 떨어져 나와 있으면서도 작은형과 별로 가까이 지낸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늦게 깨는 편이라는 평판을 늘 가지고 살았거니와, 고등학교, 아니, 대학교 다닐 때까지도 또래들에 비해 어리버리했습니다. 대학 진학할 때도 문과 체질이 못 되니 이과 지망하라는 권유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죠. 그런데 작은형은 어렸을 때부터 참 까졌어요. 어쩌다 저랑 놀아줄 때 이야기를 지어내서 해주면 저는 입을 헤~ 벌리고 넋을 잃었죠.
그 때 작은형은 저처럼 어리버리한 동생을 두었다는 사실이 좀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이산가족이 되어 있는 처절한 현실이 형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하는 얘기를 주변에서 많이 하는데, 저는 그저 먹을 게 뭐 있나, 인생에 한 가지 관심사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시절의 저는 작은형에게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죠. 그게 인이 박여서 지금 별 꼴을 다 봐도 "신선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지.
정릉리 시절 제가 잘한다고 이름 날린 짓은 우는 것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도 우렁차고 씩씩하게 울부짖는 게 아니라 한 번 시작하면 지칠 줄 모르고 오래 끄는 재주. 외가 식구들, 그 시절 얘기를 수십 년 지나 할 일이 있어도 머리부터 절레절레 흔들곤 했죠. 뭔가 주어진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불편한 점을 꼭 집어 표현하지 못한 데서 마음속에 어두운 단층 같은 게 생겼던 것 같습니다. 이 어두움은 오래 갔죠. 나이 마흔이 되어 교수직을 그만둘 때도 그 단층이 어떤 작용을 한 것 같습니다. 이 단층은 오리 또래의 꽤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단층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유럽 체류 동안 만들어졌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가까이 지내던 그곳 친구들이 한 번 심각한 표정으로 "네 마음속에 뭔가 검은 분노(black anger)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아주 합리적인 성격인데도 어떤 종류의 자극에는 마음을 전혀 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답답할 때가 있다." 충고를 해주는 데서 저 자신을 전면적으로 돌아보게 된 겁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어요. 당시에는 달걀이 대단히 귀한 음식이었는데, 외가집 뒷마당에 닭장이 있어서 며칠에 하나씩은 차례가 돌아왔죠. 그런데 어느 날 오늘 달걀이 있는데 어떻게 해줄까 묻기에 삶아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밥상에 앉아 보니 후라이를 해놓은 것 아니겠어요? 그거 갖고 몇 마디 투정을 하다가 어른들의 무책임에 너무나 분노해서 한 판 울음판을 거하게 펼친 거죠. 고런 꼬투리 하나로 온 집안을 불편하게 만든 짓을 그 후에 두고두고 반성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거겠지만, 정말 그 시절 사람들 아동심리학에 너무 무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다 보니까 너무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일도 좀 하다가 나중에 덧붙일 것 없나 한
번 다시 훑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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