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촌'이란 말은 1970년 경에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온 동네에 부잣집만 모여 사는 것이 그 무렵 새로 생긴 현상이어서 별나 보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대형 기획에 따라 동네가 만들어지기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한 골목에 들어가도 부잣집 있는 구역이 있다가 조금 가면 판자집이 다닥다닥 있기도 하고 그랬다. 부자와 가난뱅이들이 아침저녁으로 마주쳐 가면서 살던 시절이다. 70년대 이후의 변화로 부자들은 서비스 종사자 외에는 가난뱅이 얼굴 안 보고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자체가 사회의 소통이 크게 줄어든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혜화동 로타리나 명륜동 성대 입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들이 보성학교 앞에서 만난다. 말굽형의 그 길 주변에는 대지가 50~100평의 중산층 주택(대부분 한옥)이 자리 잡고 있고, 더러 수백 평 되는 부잣집들이 끼어 있었다. 그 길의 위쪽에서 갈라져 산비탈로 올라가면 달동네가 펼쳐져 있었다.
55년 초 서울 와서부터 58년 봄 혜화동에 집을 사 옮기기까지 3년 남짓 셋방살이를 한 한옥 문간방은 말굽 모양 길의 꼭대기에서 보성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왼쪽으로 올라가는 길 어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고만고만한 한옥들이 깔려 있는 동네였지만 당시로는 제법 살 만한 사람들이 몰려 사는 '괜찮은 ' 동네였다. 규모 있는 한옥에서는 예전부터 아랫칸에 행랑살이를 시키던 전통이 있어서 식구가 아주 많지 않으면 세를 주는 일이 많았다.
이 집에서, 아니, 이 방에서 나는 온 가족과 함께 2년 남짓 살았다. 전반부에는 작은형이 빠진 3남매와 어머니, 그리고 '공주할머니', 다섯 식구였고, 후반부에는 작은형까지 합류해 여섯 식구였다.
공주할머니는 어머니의 외숙모 되는 분이셨는데, 전쟁 후 의지할 데 없는 신세가 되어 우리 집 살이를 맡아주신 분이다. 내가 중학교 때까지 우리 곁을 지켜 주셨는데 우리에겐 할머니가 외할머니와 공주할머니 두 분이 계셨던 셈이다. 두 분 사이는 시누-올케간인데, 외할머니의 위풍당당과 대조되는 섬약한 기질에다가 남의 집에 얹혀 산다는 입장까지 겹쳐져 꾀죄죄한 인상을 풍기는 분이었다.
큰형은 나이도 든 편인데다 '가장'의 책임감까지 일찍부터 자각한 터이고, 작은형은 합류가 2년이나 늦은 데 비해 나와 동생은 공주할머니의 손을 많이 탔고, 동생이 특히 더했다. 손을 탄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옛날얘기를 통해서였다. 우리 또래로 나와 동생은 옛날얘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고, 내 경우 인문적 소양의 바탕을 여기서 얻은 바가 크다.
어머니는 여기 계시는 동안 숙대에서 이대로 옮기셨는데, 나야 옮기시는 게 무슨 일인지도 몰랐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때 돌아오시는 분이니까. 돌아오실 때는 빵 봉다리를 들고 와서 우리를 그 시간대에는 다른 일 제쳐놓고 문간에서, 또는 길 어귀에서 서성이고 있게 만들었다. 그보다는 모든 음식을 만들어주고, 우리를 심심하지 않게 해주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보살펴주는 공주할머니의 존재감이 훨씬 컸다. 그런데 나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 할머니에게 미안한 일이 하나 있다. 우리를 데리고 정릉리에 가서 외할머니와 함께 앉았을 때 누가 짖궂게 나와 동생에게 물었다. 어느 할머니가 더 좋으냐고. 피붙이도 아닌 공주할머니를 우리가 따르는 게 재미있어서 물었던 모양이다. 동생은 망설임 없이 공주할머니 손을 잡았는데, 나는 외할머니에게 붙었던 것이다. "외할머니 얼굴이 더 훤하시잖아." 지금 생각해도 내 정은 공주할머니께 있었다. 그 질문이 존재보다 당위를 묻는 것으로 그때는 느껴졌던 모양이다.
일요일마다 정릉리에 갔다. 돈암동까지 전차로 갈 때도 있었고 내내 걸어서 갈 때도 있었다. 내내 걸으면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꽤 먼 길인데도 멀다고 불평할 생각이 들지 않는 '풍요의 땅'이 정릉리 외갓집이었다. 당시엔 그 집과 과수원, 밭이 다 우리 집 소유란 사실도 의식하지 못한 채, 단칸방에 살던 아이들이 대궐 같은 외갓집에 가서 모처럼 활개를 칠 수 있고, 좋은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점심때 외할아버지가 뒷마당에서 닭 한 마리 잡아 우리 밥상에 올려주는 것이 이 행사의 하일라이트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할아버지가 일 벌이고 있는 뒷마당에 내가 무심코 들어갔다가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그 뒤로 나는 닭고기를 먹지 못했다. 군대 가서 쥐라도 잡아먹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야 입에 대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닭고기는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핵심 메뉴를 기피하게 되었지만, 그것 아니라도 일요일의 정릉리는 '약속의 땅'이었다. 머리가 꽤 굵을 때까지도 정릉리 행을 무슨 이유로라도 제친 기억이 없다.
일요일 아닌 날의 명륜동 생활은 대체로 따분했다. 동네 애들은 두 패로 나눠 전쟁놀이를 하고 많이 놀았다. 한 패 대장이 우리 안집의 함병일(우와! 이름이 다 생각나네!) 군이라서 나까지 붙여주기는 하지만 동작이 느려서 구박받기 바빴다. 옆 골목의 딱길이패와 병일이패가 라이벌 관계였는데, 딱길이란 서울대 경제통상학부의 표학길 교수였다. 어쩌다 한 번 윗동네와 패싸움을 할 때는 두 패가 연합을 하고 모두 대단히 긴장했다. 윗동네는 빈촌이라 그런지 애들 노는 게 험하다는 정평이 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이 게르만족에게, 한나라 사람들이 흉노족에게 그런 식으로 깔보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었었을지.
이 때까지는 책과의 관계가 깊지 못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하기보다 글읽기에 더 능했다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지만, 워낙 집에 책이 없었다. 방 한 칸에 다섯 식구, 여섯 식구가 사는 형편에 책을 둘 형편이 되지 못했다. 3학년이 되어 혜화동으로 옮겨 기막힌 독서 환경을 가지게 된 것이 내 인생에 어떤 계기가 되었던 것인지,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엄청난 일이었다.
학교에 관해서는 큰 기억이 없다. 2부제 수업을 하던(1학년 때는 3부제?) 시절인데 오전반인지 오훗반인지 헷갈려서 엄청난 낭패감을 한두 번 느낀 일 정도? 설사가 나는 걸 억지로 참다가 너무 늦게 결심하고 변소 갈 허락을 받았지만 교실 문을 나서기 전에 지려 버리는 바람에 똥싸개로 놀림받은 일 정도가 큰 사건이었고. 학교에만 가면(동네에서 놀 때도 그렇지만) 내가 못난 놈이란 생각에 짓눌려 살았다. 말도 잘 못하고, 몸도 잘 못 움직이고, 음악과 미술에도 보통 이하의 젬병, 나중에 생각하면 '표현'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통지표에도 수는 가물에 콩 나듯 하고 우와 미 사이에서 놀았다. 음악, 미술, 체육에서는 양도 심심치 않게 받았다.
표현력 없는 아이가 모처럼 뛰어난 표현력을 보였다고 얘깃거리가 된 일이 하나 있다. 외삼촌과 수수께끼 놀이를 하다가 내가 물었다. "네모 안의 네모가 뭐게?" 몇 차례 시도 끝에 외삼촌이 항복하자 내가 정답을 가르쳐줬다고 한다. "내 바지!" 물자가 귀하던 시절, 넉넉지도 않은 살림에 내 옷은 모두 형들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무르팍이 까진 바지에 네모난 헝겊을 대 기워 입는 것은 보통이었는데, 나는 두 손을 거친 옷을 입다 보니 기워 댄 헝겊이 또 헤져서 그 위를 또 기워 "네모 안의 네모"가 된 것이다. 이것을 뛰어난 표현력이라 칭찬한 것은 고물만 물려받는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라고 짐작한 모양인데, 나는 별로 억울한 생각도 없었고, 그저 수수께끼 소재를 찾은 것일 뿐이다. 그래도 모처럼 칭찬 듣는 게 좋아서 뭘 표현하려 한 게 아니라는 항의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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