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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조모님은 저 나기 여러 해 전에 돌아가셨고 친조부님은 우리 집이 부산으로 피난간 직후, 역시 제가 돐 되기 전에 돌아가셔서 아무 기억이 없죠. 더구나 그분들 사시던, 아버지가 자라나신 동네에 제가 처음 가본 것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였으니... 우리 형제들에겐 외조부모님이 곧 할아버지, 할머니였죠. 다섯 살 때 서울 올라온 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늘 가까이 계시다가 70년과 73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부턴 할머니, 할아버지로 쓰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마 1897년생? 그리고 할머니는 그보다 한두 살 많으셨으니 천수를 누리신 셈입니다. 그리고 1954년 이후 우리가 보는 동안 안온한 생활을 보내셨기 때문에 그분들, 특히 할아버지가 어떤 풍운을 뚫고 살아오신 분인지, 돌아가신 후에 외삼촌께 듣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저희가 가까이 모시고 지내기 전 그분들의 이력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할아버지 고향은 아산 신창. 6대조가 판서를 지낸(정조 때의 益자 運자 어른) 연안 이씨 집안이 큰소리 치는 동네여서 외증조할아버지께서 어머니 태어나실 무렵에 면장을 하고 계셨다더군요. 할머니 고향은 거기서 공주 유구로 막 넘어가 오른쪽에 있는 탑골마을(탑곡리)인데, 농지도 별로 없는 빈촌에서 한산 이씨 집안이 쿤소리 치고 지냈답니다. 차남인 할아버지는 소시쩍부터 배짱이 좋고 활동적인 성격이었던가 봅니다. 물려받을 농지도 없어 보이니까 보통학교 마치고 무작정 상경, 공업학교에도 다녀보고 뭣도 해보고, 하다가 제일 신나던 일이 전차 차장 하신 거라고. 당시엔 전차 차장도 칼 차고 근무했다며 화려한 경력으로 회고하곤 하신 일을 외삼촌께 얼마 전에도 다시 들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게 되셨는지는 지금 기억이 안 나는데, 서울 생활 4~5년 후에 돌아가 결혼도 하시고, 농촌 개량사업에 얼마동안 몰두하셨다네요. 그 지역에선 처음으로 양계장도 해 보시고. 그러다가 만세사건에 걸렸는데, 죄질이 꽤 나빴나 봅니다. 게다가 면장 아들이 만세질 했다 해서 특별히 주목을 받는 바람에 유구 마곡사에 가서 1년 가량 숨어 지냈다고요. 어머니가 1920년 음력 9월 생이시니, 마곡사 피신 시절에 잉태되신 모양입니다. 1년이 지나도 바람이 지나가지 않으니까 마곡사 주지 스님이 장기 도피를 하려면 집에서 가까운 여기는 위험하고, 금강산의 믿을 만한 스님께 편지를 써줄 테니 거기 가 있으라고 권하셨답니다. 그래서 모험심 많은 25세 명문가 출신 청년의 북행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금강산 가는 길에 황해도 재령인가에서 주저앉아 버리셨답니다. 서양인이 경영하는 금광에 노가다로 잠깐 들어갔다가 금세 십장으로 발탁되는 바람에 거기서 1년 가량 지내셨다고. 마곡사에서 지내보고 절 생활에 아마 신물이 나셨겠죠. 게다가 서양인의 사업체니까 일제의 취체도 면할 수 있고. 금광에서는 허우대 좋고 머리 잘 돌아가는 청년이 나타나니까 요긴한 일꾼으로 찍었겠죠. 그러다가 일제 통치가 갈수록 빡빡해지면서 외국인 사업체에도 취체가 들어오니까 할 수 없이 그곳을 떠나 다시 금강산으로. 그래서 금강산 어느 절에서 불목한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답니다. 아무래도 성불할 체질이 아니셨던 모양입니다. 절에서 지내면서 가까운 곳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산판에 용돈 벌러 노가다를 뛰었는데, 거기서 또 산판 주인의 눈에 든 거예요. 그래서 절에서 나오고 산판 십장 노릇에서 시작해 몇 해 후엔 주인과 파트너가 되었다는군요. 맨몸으로 시작해 산판의 공동소유자가 되기까지 무슨 재주를 피우신 건지 상상이 잘 되지 않습니다만, 도덕군자로 사시지만은 않았으리란 게 분명한 일이겠죠? 결국 자기 산판들을 함흥 동쪽의 산악지대에 가지게 되었답니다. 외삼촌 말씀으로, 기차역 하나가 할아버지 산판의 전용 역이나 마찬가지였다고. 그 지역에서 유력한 재력가로 자리 잡으신 거죠. 그러다가 또 한 차례 도약의 계기를 맞으신 것이 만보산 사건. 함흥 부근 천내리란 곳에 시멘트공장을 비롯해 중화학 공업단지가 만들어지면서 당시엔 드물던 공업도시가 생겨났는데, 그곳의 큰 점포들이 대개 화교 소유였답니다. 만보산 사건으로 불안해진 화교들이 그곳을 떠나고 싶은데 점포를 넘겨받을 인물로 할아버지를 지목해서, 일약 천내리 최대의 거상으로 등장하게 된 겁니다. 재력도 있고 신의도 있는 인물로 보였기 때문에 지목받게 되신 거겠지만, 거래 상대의 약점을 빌미로 큰 횡재를 하신 거라고 누가 손가락질 하더라도 별로 변명할 말씀은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자~알 나가셨겠죠. 신수 훤한 30대 청년이 지역 재계의 거물로 떠올랐으니. 거기다 노는 것도 보통 넘게 좋아하는 분이고. 고향에서 처자 불러올 생각이 드셨겠습니까? 그래서 할머니가 열 살 된 어머니를 데리고 통보도 없이 처들어오셨답니다. 뜻밖에 나타난 할머니를 보고 할아버지가 황당해(그리고 당황해?) 하시던 장면을 어렸을 때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아무튼 할머니는 도착하자마자 모든 열쇠를 장악하고 경제권을 틀어쥐셨답니다. 할아버지가 창업 체질이라면 할머니는 수성 체질이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점포는 할머니 손아귀에 들어갔지만 산판까지는 손이 미치지 않으니 할아버지가 숨쉴 공간은 남아 있었던 듯. 목재나 숯을 화차로 보냈다가 대금을 떼인 일이 더러 있었다는데, 그게 할아버지 비자금 통로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저는 아직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 번은 할아버지가 원산에 출장 가시는데 할머니가 어머니를 딸려 보냈답니다. 도시 구경도 좀 시켜주란 핑계였지만, 감시원 역할을 맡긴 거겠죠.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데리고 서슴없이 기생집에 놀러 가셨다는데, 어머니는 그 일이 참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황홀할 정도로 고운 여자가 어머니한테 기막히도록 다정하게 대해 주시더라고요. 아마 할아버지를 단순한 손님 이상으로 여기던 여인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할아버지의 여성관계에 대한 할머니의 경계심을 보여준 나중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제가 초딩 때니까 두 분이 환갑 지나셨을 때일텐데, 우리 집에 와서 저녁 식사를 하시고 상에는 모처럼 불고기가 푸짐하게 올라와 있었죠. 할아버지가 맛있게 잡수시는 것을 할머니가 애들한테 좀 양보하시라고 눈치를 드리는데도 계속 잘 잡수시니까 핀잔을 주셨죠. "저냥반은 남의 살이라면 사죽을 못 쓰셔~" 그 말씀에 할아버지가 긴장해서 "그 무슨! 애들 앞에서 못하는 말씀이 없구려! 흠흠~" 하시던 까닭을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죠. 그러다 철든 뒤에 왠지 그 말이 생각났을 때는 "아항~ 그런 뜻이었구나!" 하며 제풀에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적다가 보니까 제 기억 속의 모순 하나가 떠오르네요. 할머니가 함경도로 처들어간 것이 만보산 사건 이후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외삼촌은 1930년생이거든요? 만보산 이전에 함경도 가셨던 건지 나중에 외삼촌께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랬던 것 같네요. 어머니가 원산 기생집 구경하신 게 열 살도 안 됐을 때였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해방 후에 두 분은 서울로 오셨고,(거기 계셨으면 악질 반동분자로 담박 걸리셨겠죠?) 딸 내외에게 얹혀 지내시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탈탈 털고 오셨나봅니다. 그 때 연세가 50 전후셨을 텐데, 그때부터는 경제활동을 않고 아버지가 정릉리에 장만한 과수원을 돌보며 지내셨죠. 1965년경 덕송리 배밭으로 옮기실 때까지 정릉리 계시며 우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노릇을 해주셨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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