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8. 10:10

그저께와 그그저께는 어머니께 가 뵙지 못했다. 잠깐 가 뵙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바쁜 건 아니었지만, 꽤 바쁜 사정을 아내가 보고는 혼자 가 뵐 테니 일이나 하라고 나서 주었다. 덕분에 급한 글들을 제법 차분하게 정리해 낼 수 있었다.

요즘 어머니가 며느리를 고와하시니까 아내가 찾아뵙는 일을 훨씬 더 즐겁게 여기는 것 같다.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하루 걸러 찾아오는 며느리를 보실 때마다 초면 손님 대하듯 하시고, 누군지 아시냐고 물으면 얼렁뚱땅 "내 제자야~" 하시는데 모시는 입장에서도 흥이 날 리가 없다. 내가 혼자 갔을 때도 장조림이나 과일즙을 드릴 때마다 아내 공치사를 열심히 한 덕분인가, 그럴 때 "우리 며느리는 참 신통해." "우리 며느리는 센스가 있어." 같은 말씀을 한 마디씩 하시게 됐다.

그그저께는 혼자 갔다 와서도 아내의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저께는 어머니의 심술 모드와 마주쳤던지, 내게 짐짓 "이제 어머니께 전 안 가뵙겠어요. 며느리를 못 알아보시는 정도가 아니라 네가 무슨 며느리 자격이 있냐고 삿대질을 하시는데요, 뭐." 심술 모드에 드실 때는 기억이나 정신도 다른 때보다 더 혼미하신 것 같다.

어제 사흘만에 병실에 들어서면서 반응이 어떠실까 궁금했다. 이틀 동안 안 온 것을 기억하고 계실지? 기억하신다면 그에 따르는 감정을 뭐든 보여주실지? 막상 나를 보시고는 반응에 특별한 점이 없으시다. 아직 시간에 대한 의식이 그리 뚜렷하지 못하신 것 같다. 마침 노곤하신 때여서 반응이 강하지 않으신 이유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시간 감각이 꾸준히 유지되시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은 연수가 외할머니를 뵈러 왔다. 영이의 세 딸 중 연수만이 외가를 찾는다. 그리고 연수가 엄마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연수를 보실 때의 반응이 나는 늘 조심스럽다. 지난 초겨울, 어머니 상태가 아직 안 좋으실 때 연수와 그 부모, 세 식구가 뵈러 왔을 때, 어머니가 지 서방은 근근히 알아보시는 눈치였지만, 연수를 보시고는 눈이 둥그래져서 벌떡 일어나실 기세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어머니 마음을 괴롭힌 딸이라고 인식하신 것이 분명했다.

연수에게 점심 때 오라고 얘기해 뒀는데, 내가 좀 일찍 갔는데도 벌써 와 있었다. 연수 얼굴과 마주치시는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내가 들어가 보니 어머니 기색이 평온했다. 연수를 손녀로 인식은 하시는 것 같은데, 그냥 덤덤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다. 아내가 와서 며느리라고 하면 그냥 덤덤하게 받아들이시는 것과 똑같이. 외손녀가, 며느리가,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 평상인처럼 분명한 인식을 하실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실 때도 있는 것 같다.

사진첩을 보실 때 영이 사진이 나와도 "내 딸이야." 알아보시면서도 무덤덤하실 때가 많다. 나는 아무래도 영이 얘기를 길게 꺼내지 않게 되는데, 아내 얘기를 들으면 영이 사진을 보며 단편적인 얘기를 하시기도 한단다. 어쩌다 한 번씩 영이 사진을 보면서 말씀을 잃고 생각에 잠기실 때가 있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 오랜 고통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실 만큼 집착을 벗어나신 것인지, 아니면 의식의 파편화로 인간관계의 의미를 잃어버리신 것인지.

연수를 볼 때마다 지 서방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울컥울컥 솟는다. 이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일 뿐 아니라 내 마음을 그득하게 채워준 친구. 영이가 보통사람처럼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상태에서 그에게 영이와 결혼해 달라고 부탁한 나 자신이 밉다.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절대 그런 부탁을 안할 것이다. 그 친구가 그 부탁을 거두어 달라고 거꾸로 내게 부탁했을 때, 거절당할 지언정 내 스스로 거두는 것은 오빠된 도리로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버틴 독선. 그 죄를 어찌 갚을꼬. 시련 앞에서 사람값이 드러난다. 내가 못할 일을 친구에게 권한 나, 그리고 남이 못할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그. 서로 아껴온 친구 사이였지만 나는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 되었다.

영이가 끝내 아이들 곁을 떠날 때 연수는 학교 들어갈 나이였는데도 말조차 제대로 못하는 아이였다. 장애가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주변에서 했지만, 사회성 없는 에미에 가려있던 문제라는 사실이 에미가 떠난 후 밝혀졌다. 세 아이 다 잘 자라났다. 지 서방과 그 부인에게 한없이 고맙다. 두 분이 아이들을 잘 키워준 덕분에 어머니의 죄, 그리고 내 죄가 그래도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식사 후 독경집을 꺼내자 어머니는 반야심경만 외우신 후 금강경은 내게 읽어달라고 하신다. 내가 현토식으로 읽는 것을 연수도 흥미롭게 듣는다. 한문 공부를 한 아이기 때문에 처음 보는 금강경이지만 쉽게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네가 한 번 읽어보라고 밀어주니 제법 읽어낸다. 맡겨놓고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대 피워무는 내 눈앞에 어머니 곁에 앉아 있는 연수 모습이 자꾸자꾸 떠오른다. 어머니를 잃은 지 20년이 넘는 아이가 어머니의 어머니 곁에서 금강경 읽어드리는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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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17. 09:46
 

모시고 앉았을 때 틈이 나면 금강경을 꺼낸다. 익숙하신 경문이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시고, 그 받아들이시는 태도를 통해 정신상태를 살피기 좋은 것 같아서다. 식사 시작하신 후론 가급적 식사 때를 맞춰 가서 한 끼라도 떠먹여 드리는데, 식사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좀 있으면 식전부터 펼치기도 한다. 읽고 있다가 식사가 나오면 내가 "어머니, 금강경도..." 하고 어머니가 "식후경이지." 받으신다.

회복을 시작하실 때는 글자 하나하나를 떠듬떠듬 읽으시는 것만도 대견했는데, 얼마 지나자 독송하시던 가락을 되찾아 꽤 외우시게 되었다. 그런데 근래 와서는 그 뜻을 따지기 시작하셨다. 율동에 따라 중얼중얼 읽어 내려가시다가 한 장이 끝나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네." 커멘트를 붙이시는 일이 잦아진다. 그러다가 "네가 한 번 읽어봐라." 넘겨주시고, 읽은 뒤엔 "그게 무슨 듯인지 해석을 한 번 해봐라." 주문하신다.

그래서 일 주일에 두어 번은 모자 간에 머리를 맞대고 금강경 강독을 한다. 나는 미리 선을 긋는다. "어머니, 제가 글자는 알아보지만, 뜻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글자를 풀 수 있는 데까지만 풀겠습니다." 이런 추상적인 의미를 잘 알아들으실까 자신이 없는데, 뜻밖으로 쉽게, 그리고 분명히 이해하는 표정이시다. 어떤 대목에선 망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말인데, 뜻은 아무래도 모르겠구나." 하시기도 한다. 그럴 때는 현역 시절의 사고력에서 조금도 뒤져 보이지 않으신다.

열흘쯤 전 17장에서 시작해 32장 끝까지, 모처럼 많은 분량을 읽으신 일이 있는데, 한 장 끝낼 때마다 커멘트를 붙이셨다. 대부분이 "여기도 알 듯 말 듯하구나."였는데, 꼭 한 번 "이건 좀 알 것 같다." 하셨고, "이건 영 모르겠다."가 두어 번 있었다. 책을 덮고 내게 고개를 돌리며 "야, 이거 아무리 읽어도 말짱 황 아니냐?" 하시기에 "어머니, 그래도 어머니나 저는 글자는 알아보잖아요? 뜻은 몰라도. 그러니까 글자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몰라도 모르는 게 뭘 모르는 건지는 알 수 있으니, 그게 어디예요?" 했더니 한참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처럼 대답하신다. "그건 그래."

그 이튿날은 심술 모드셨다. 한 마디 입을 떼셔도 꼭 화가 나신 것처럼 떼떼거리거나 호통을 치신다. 식사 하시는 동안에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억지로 드셔 주시는 것처럼 받아 드시고, 식사 후 과자 한 조각을 권해 드리는 데도 평소처럼 "과자 하나 드시겠어요?" 하고 여쭙는데 "그런 걸 왜 먹어야 돼!" "어머니, 어머니께서 하나 드시면 제 마음이 무척 기쁠 거예요. 부탁드립니다. 하나 드세요." 엉구럭을 떨어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정말 억지로 먹어 주신다. 그래도 과자 다음의 과일즙에서 분위기가 많이 회복됐다. 몇 숟갈 드시나, 미리 목표를 정해 두는데, 숟갈 수에 정신을 집중하시는 것도 기분에 괜찮으신 것 같고, 목표 달성 후 몇 숟갈 보너스를 드리면 기분이 썩 좋아지신다. 그런데도 과일즙 뒤에 금강경을 꺼내니까 일순간에 심술 모드로 돌아가신다. "그건 읽어서 뭘 해!"

그 날의 심술 모드가 금강경에 대한 좌절감에 원인이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장 여사에게 물어보니 그 전 날부터 말씀이 적으셨다고 한다. 매우 익숙한 텍스트인데도 상식적 수준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스스로 못마땅하신 것 같다. 사실 절에 다니며 불경 읽는 사람 대부분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않고, 하나의 신비로운 대상으로 여긴다. 어머니도 수없이 독송하며 그런 한계를 인식하고 계셨을 텐데, 지금은 그런 인식을 잊어버리고 상식적 이해를 바라시는 것 아닐까?

그 뒤로 금강경 읽을 때 어머니 표정에 바짝 주의를 기울인다. 조금이라도 어려워하시거나 답답해 하시는 기색이 있으면 뭐라 하시기 전에 앞질러 "어머니, 여긴 좀 특별히 어렵네요. 제가 글자라도 한 번 풀어 볼까요?" 하면 무의식중에 반가운 기색을 살짝 띠고 "그래라." 하신다. 어머니도 왕년에 한문깨나 하셨지만 아무래도 읽으신 분량이 나랑은 차이가 있고, 또 나는 번역을 직업처럼 하면서 글자를 푸는 기술을 바짝 연마해 놓았기 때문에 어머니 독해에도 도움이 돼 드릴 수 있는 것 같다.  글을 풀어드리면 표정이 편안해지시고, 내가 "거기까지 글자로는 풀겠는데, 그 이상 뜻은 모르겠네요." 하면 끄덕끄덕하시고, 더러 "그래도 훨씬 낫다." 하시기도 한다.

그렇게 글풀이를 많이 해 드리니 요새는 책을 펼쳐도 나더러 읽으라고 하실 때가 많다. 나는 원래 현토식으로 읽는데, 한 때는 토를 빼고 독경식으로 읽으라고 요구하기도 하셨다. 눈으로 따라 읽으시기 편리하도록 하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전엔 한 번 독경식으로 읽기 시작하니까 "아니, 너 하던 식대로 읽어라." 하신다. 현토식으로 읽으면 한문을 좀 하는 사람에겐 따로 글을 풀어주지 않아도 해석이 대충 전해진다. 금강경 경문을 읽으며 동시번역을 마음속에서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 수준의 해석 능력과 상당 수준의 집중력이 모두 필요한 일인데, 이것을 하실 수 있으니 정신과 육체 양쪽으로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건강을 확보하신 것이다.

오늘은 다섯 장만 읽어드렸다. 내내 집중력에 흔들림이 없으시고, 내 독법에 만족하시는 눈치다. 다섯 장 읽은 뒤에 잠깐 숨을 돌리며 더 읽을까 여쭤보니 "오늘은 그만하면 됐다." 집중해서 들으며 읽으시기 때문에 전보다 적은 분량을 읽고도 만족하시는 것이다.

적당한 기회인 것 같아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너무 좌절감을 느끼지 않으시도록 내 관점을 설명드렸다. "어머니, '불립문자'란 말씀도 있지 않아요? 이게 원래 문자에 담을 수 없는 뜻인데, 따로 담을 데도 없으니까 그냥 담는 시늉만 한 걸 거예요. 그러니 이 글을 보고 뭔가가 어느 방향에 있나보다 하고 어렴풋이 느끼면 됐지, 그게 뭔지 글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닐 거예요." 말씀은 드리면서도 이 정도 추상적인 얘기가 과연 접수될지 확신은 없다. 그런데 대답 없이 생각에 잠기시는 걸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시는 것 같다.

불광 잡지를 비롯해 관심을 두실 만한 자료를 몇 가지 시도해 봤지만 금강경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비길 만한 것이 없다. 금강경에서 관심의 패턴을 웬만큼 확인한 셈인데, 어떤 자료로 이어 나갈지? 주변에 아동심리학 전문가가 없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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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17. 09:41

세 분 간병인들(장 여사, 강여사, 그리고 새로 온 채 여사)이 모두 어머니를 각별히 모시는 태도를 보여준다. 몇 가지 조건이 합쳐져 작용하는 것이다.

첫째, 어머니 당신이 꽤 재미있는 분이시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신 후로는 (연초에 식사를 시작하시면서) 환자 분들 중 제일 반응이 활발하실 뿐더러, 좀 갈팡질팡하시기는 해도 말씀과 태도에 별난 가락이 많이 얹혀져 있어서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흥미로운 자극을 꽤 많이 주신다. 그리고 회복이 많이 되신 후로는 당신께서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 적절한 응대가 쉽게 나오신다.

둘째, 우리 내외가 열심히 다니면서 말 하나라도 따뜻하게 하고, 아내가 뇌물도 적절히 쓴다. 돈 싫어하는 사람 없으니 돈을 주면 물론 좋아하지만, 한국인들이 돈이면 제일인 줄 안다는 경멸감 내지 혐오감 비슷한 것이 조선족 사회에는 널리 있어서, 받고 좋아하면서도 마음은 잘 움직이지 않는 경향도 있다. 그리고 급여 외에 별도의 사례를 받는다는 것이 직업윤리에도 문제가 있다. 아내가 적당한 간식거리 챙겨주고 전화카드 가끔 갖다주면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셋째, 아내가 같은 조선족이란 유대감이 있다. 어머니 곁에 놓아두는 책들을 주 여사가 틈 나는 대로 들여다보곤 했는데, (서점에서 근무한 아내를 포함해서 일반 조선족은 일반 한국인들에 비해 책 읽는 일이 익숙치 않아서 주 여사의 독서 취미는 특이한 것이었고, 떠나기 며칠 전에는 <밖에서...> 한 권을 사인해서 드렸다.) 주 여사 떠난 뒤에 장 여사가 아내에게 한 번 말하기를, 내 책 후기에서 아내를 아끼고 존중하는 대목을 주 여사가 보여줬다고. 조선족인 아내가 한국 고급 지식인에게 존중받고 지내는 것이 자기네 마음에도 기쁘니 더욱더 행복하게 잘 사시라는 얘기... 자유로 병원에서도 이 유대감이 큰 몫을 했는데, 이쪽에 와서는 더욱 증폭된 셈이다.

어제는 저녁 드신 뒤에야 가서 모시고 앉았는데, 채 여사가 들러서 말해 준다. 어제는 다른 날보다 유난히 많이 자기네를 찾으시더라고. 채 여사는 있은 날자가 적지만, 눈치가 빠르달까, 잘 챙기는 면이 있다. 장 여사는 워낙 말수가 적은 분이고, 강 여사는 좀 천진한 성격이랄까, 내가 궁금한 점이 있어 물으면 대답해 주는데, 채 여사는 특이사항을 제절로 알아서 얘기해 주는 일이 많다.

환자가 간병인 많이 찾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방 반대쪽의 아주머니 한 분은 내가 앉아 있을 때도 "아줌마, 아줌마..." 하며 여사님들을 부를 때가 많은데, "지금 바빠요. 좀 있다 갈께요." 대꾸하는 게 보통이고, 내게 "참 골치아픈 분이예요. 다른 분 곁에 있으면 왜 그리 샘을 내시는지..." 하며 절레절레한 일도 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많이 찾으신 일은 무슨 영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니, 참 고르지 않다.

어머니는 심심하실 때, 또는 뭔가 생각난 것을 얘기하고 싶은 상대가 필요할 때 여사님들을 부르시는데, 소리쳐 부르시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살랑살랑 손짓에 표정을 곁들이신다. 간병인들을 '제자'라고 하시는 것이 처음에는 단순한 착란이신 줄 알았다. 그런데 요새 와서는 그것이 꽤 고급한 전술전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 전날 내가 앉아 있는데도 여사님 한 분을 손짓으로 불러 몇 마디 말씀하고 돌려보내신 뒤에 "내가 부르면 잘 오지." 흐뭇한 표정으로 자랑하신다. 불러도 안 오면 어떻게 하시냐고 여쭈니 태연하게 대답하신다. "그러면 즈이들이 점수 못 받아가는 거지, 뭐." 그리고는 생각났다는 듯이 저쪽에 서 있는 여사님들에게 소리치신다. "너희들, 점수 필요 없으면 안 와도 돼." 점수 갖고 학생들 농락하시던 버릇이 제2의 천성이 되셨나보다. 그러니까 여사님들은 불려와도 귀찮다는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겠지.

생각이 이제 내 상상 밖으로 넓고 깊게 자라나시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어제 와 뵙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저께는 저녁 후에 다시 가 뵈었는데, 정신이 아주 초롱초롱하셨다. 그래서 대구의 세돈 형님께 전화를 걸어 바꿔 드렸다. 내게 고종사촌이지만 어머니보다 불과 몇 살 아래인 세돈 형님은 아버님 계실 때 '가방모찌'처럼 곁에서 모셨고, 우리가 크는 동안 마치 숙부님처럼 우리를 살펴주신 분이다. 작년 여름 자유로병원으로 와 뵙고는 이제 다시 뵙기 어렵겠구나, 체념하고 돌아서셨던 형님, 뜻밖에 '아지매' 목소리를 듣고 매우 기뻐하신다.

통화하시는 동안 그쪽 집 걱정까지 해주시며 이쪽 걱정은 마시라고 의연하게 말씀하시는 것만도 대견했다. 그런데 내가 정작 놀란 것은 통화가 끝난 뒤 나를 돌아보며 하시는 말씀. "제사..." 밑도 끝도 없이 한 마디를 내놓으시고 잠시 끊었다가 말씀을 이으신다. "우리가 아무리 그래도 남들이 너무 걱정하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깜짝 놀라 어리둥절한 채로 말씀드렸다. "어머니, 이만큼 편안하게 지내며 재미있게 지내시는데, 남들 걱정시킬 일이 뭐 있겠어요?" 그러자 처연하게 보이는 웃음을 띠고 말씀하신다. "우리야 그렇다 해도 남들 눈에는 형편없게 보일 수 있지 않니?"

그 말씀을 듣자 앞에 "제사..." 한 마디에 무슨 뜻이 있었는지 알겠다. 우리 집 제사가 끊긴 지 8년째다. 큰형이 한국에 없으니 작은형이 나서서 지내다가 작은형이 학교 그만두고 미국에 많이 나가 지내게 되면서 내놓은 것을 내가 시늉만으로라도 잇고 있다가 아버님 50주기를 큰형 가족까지 불러들여 모처럼 본때있게 지낸 뒤 나마저 중국으로 나가고는 아예 접어놓은 것이다.

아내와 함께 귀국해 지내면서 제사를 되살릴까 하는 생각도 얼핏얼핏 들었지만,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한국 사회가 중국 조선족에게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는데, 제사 안 지내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제사를 좋은 풍속으로 이어가는 분들을 부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가족, 친척을 모아 추모의 계기로 의미를 살리지 못하면서 두 내외가 제사 시늉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허례허식일 뿐이다. 8년 전까지는 그래도 후일을 기약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 당장은 이렇게 초라하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지내드릴 때가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제는 제사를 제사답게 모실 장래의 전망도 없다.

어머니는 제사 문제로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셨다. 내가 시늉만의 제사를 지내려 애쓸 때도, 절에서 천도 불사를 모아서 할 테니 따로 제사 지낼 것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 성격이 망자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지 않는 편이시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제사 등 전통에 대한 태도가 각별히 단정한 세돈 형님과 오랫만에 마주치자 마음에 걸려 있던 문제를 드러내신 것이다. 절 사정에 밝으신 분들께 여쭈어 절에 맡겨서라도 망자에 대한 예의를 최소한 갖추는 길을 찾아야겠다.

제사 생각이 떠올랐지만, 건드려서 재미없을 듯하기에 밀쳐놓고 시치미를 뗐다. "어머니, 존경까지는 못 받는다 해도, 형편없다고 우습게 보이기까지야 하겠어요?" 그러니까 끄덕끄덕하시며 "그렇지, 나야 아들 셋이 다 잘들 하니까..." 그리고는 스스로 미심쩍으신 듯이 덧붙이신다. "기봉이야 어디 한 구석 걱정할 데가 없고... 기목이는 아주 미덥지는 않지만..." 하시는 대목에서 내가 가로챘다. 나쁜 쪽으로 내가 우겨야 어머니가 방어적인 자세로 작은형을 감싸시게 되리란 계산도 있지만, 나도 스트레스 좀 풀어야겠다. "아주 미덥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미더운 구석이 전연 없죠. 미덥지 않은 사람 억지로 믿으려고 괜히 부담 주지 마세요." 했더니 뜻밖의 고명한 대꾸가 나오신다. "내가 보기에 그렇더라도 너희 사이에 그러면 안 되지. 형제 간에는 서로 믿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

이 정도면 재작년 여름 쓰러지시기 전까지의 여러 해 동안보다 더 폭넓고 유연한 사고력이시다. 하드웨어 상태가 더 좋아지셨을 리는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사고력에 제한을 가하던 여러 가지 '집착'이 기억의 범위가 줄어들면서 풀어지신 덕분일까? 아내를 대하시는 태도에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갔을 때 아내에게 어머니를 맡겨놓고 나는 나와서 책을 보고 있으려 했는데, 나가려는 나를 아내가 가리키며 "어머니, 저 사람 어머니랑 놀아드리지 않고 도망치려고 해요. 붙잡으세요." 하기에 내가 "어머니는 아들보다 며느리를 더 좋아하시니까 제가 비켜 드릴께요."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고 여사님 한 분이 "할머니, 아드님이 더 좋아요, 며느님이 더 좋아요? 어느 분이랑 노시겠어요?" 하니까 이쪽 저쪽을 쳐다보신 뒤에 음흉한(?) 웃음을 띠고 "나는 며느리가 더 좋아." 하신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으시려는 속셈이 들여다보인다. 며느리에 대한 인식은 이번 회복 이후에 새로 입력되신 것 같은데, 그 인식을 행동의 준거로 삼으실 만큼 안정된 자신감이 확보되신 것으로 생각된다.

음식에 대해서도 절제의 틀이 자리 잡히신 것 같다. 그저께 점심 때 맛있게 죽 한 사발을 비우신 다음 식판을 치우려 하자 식판을 붙잡으며 "나 아직도 배고파." 하신다. "이렇게 맛있게 드시고도 배고프세요? 미안하지만 공양이 끝나셨는데요?" 했더니 "끝나긴? 이제 시작인데." 강정을 하나 입에 넣어드리니 식판을 선선히 내보내신다. 얼마 전에는 정말로 더 잡숫고 싶은 욕구 때문에 식판에 매달리기도 하셨는데, 이젠 장난으로 그러시는 것이 분명하다. 당신의 욕구를 스스로 바라보실 수 있는 것이다. 과일즙이건 과자건 아무리 입에 맞으시는 것이라도 보름 전처러 끝장을 보자고 달려들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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