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말까지 '정치의 계절' 중에는 현실정치와 관련된 발언을 자제하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한국 현실정치가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는 증세가 선거철이면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현상적인 문제에 나까지 열받아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느니 본질적인 문제의 탐구에 노력을 집중해서, 선거철이 지나고 좀 분위기가 차분해졌을 때 논의할 꺼리를 만들어두는 데 애써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철은 분위기가 영판 달라질 것 같은 조짐이 꽤 보이기 시작한다. 제법 본질적인 문제들까지 선거과정에서 제기될 가능성이 떠오르고 있다. 그러니 나도 뭔가 입을 떼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박원순의 후보 확정을 보며 벌써 입이 근지럽다. <프레시안>에 글 보내는 것은 당분간 계속 삼가고 있겠지만, 블로그에서라도 그 방향의 생각을 조금씩 정리해 봐야겠다.

<해방일기> 작업 중 민주당의 뿌리 한국민주당(한민당)의 모습을 살펴보며 '원내 제2당 민주당'의 성격과 한계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민주당은 '수비형' 정당이다. 지역 근거에 기반의 큰 비중을 두기 때문에 적극적 노선을 제시하는 중앙 지도부의 강한 영도력이 성립하기 힘들다. 그래서 국회에서 개헌저지선과 과반수 사이의 세력을 지키는 것이 정상이고, 어느 쪽에 가까이 가는가는 집권세력의 하는 꼴에 따라 결정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당의 이 속성을 투철히 인식하고 현실로 인정하면서 그 조건 위에서 정권을 성립시켰기 때문에 국민회의는 원내 제2당의 자리를 지켰다.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원 역시 제2당의 자리를 지키는 방향이었을 것 같다. 다만 제2당의 규모를 좀 줄이더라도 반세기에 걸친 '제2당의 한계'를 깨뜨리고 싶었을 것이다. 지역 근거에 의지하는 수비형 정당이 아닌 공격형 정책정당으로 이끌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탄핵역풍 때문에 열린우리당이 제1당이 되어 버렸다. 그 뒤에 죽을 쑨 것은 수비형 정당의 체질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제1당 노릇을 하는 어색함에 기본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7-2008 선거를 앞두고 도로민주당으로 돌아간 것은 체질 개선을 포기하고 본색을 되찾은 것이고.

2012 선거에서 반 한나라당 공동전선 구축의 필요성이 널리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 민주당의 수비형 본색이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제1당의 정권 유지에 모양새를 갖춰주면서 소소한 실리를 챙기는 '토호세력'이 민주당 내에서 우세한 힘을 갖고 있은지 오래다. 공동전선 구축이 토호세력의 조그만 양보라도 요구한다면 그들은 민주당이 공동전선 구축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도록 모든 힘을 쏟을 것이다. 토호세력은 공동전선에 저항하는 요소다.

일이 안 되게 하기는 쉽고 되게 하기는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 공동전선의 명분에 찬성하는 척하면서 실제로 일을 어렵게 만드는 길은 얼마든지 많다. 공동전선에 저항하는 토호세력이 민주당 안에 큰 세력을 갖고 있고, 민주당은 공동전선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이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지난 몇 주일 동안 정당정치에 식상한 민심이 점점 더 뚜렷하게 확인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민주당에 애착을 가진 이들은 민주당의 체질 변화 가능성을 이 상황에서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민주당에 별 애착이 없는 나로서는 공동전선의 구심점이 민주당 아닌 위치에 형성될 가능성을 먼저 떠올린다.

구체적인 형성방법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내게 유치한 방법 하나가 떠오른다. 유치한 만큼 내게는 재미있는 방법이라서 적어 본다. <프레시안>에는 도저히 보낼 수 없는 얘기다.

'10인의 저격수'다. (물론 20인, 30인이면 더 좋고) 저격수는 생명을 걸고 임무를 수행한다. 자기 정치생명을 걸고 사이비 정치인들의(민주당 토호세력 포함) 정치생명을 노리는 저격수들이 조직적 활동을 펼치는 것이다.

정치 외의 분야에서 자기 일 잘해 온 이들에게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는 사회의 눈길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눈길의 대상자들에게는 정치 참여에 희생의 측면이 크다. 그들이 선거에 나설 경우 이기더라도 지더라도 본인에게는 개인적으로 손해다. 그러나 선거 참여 자체에서 그들이 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길도 있지 않을까?

'사이비 저격'을 구체적 임무로 설정한다면 동기 부여가 쉽게 될 것 같다. 민주당 토호세력을 우선 놓고 보자면 구태의연한 '누워서 떡 먹기'를 못하게 꽁무니를 걷어차 주는 것이다. 토호들은 대개 선수(選數)가 있다. 중앙정치에 그만큼 참여해 왔으면 지방색 없는 수도권에 와서 뛰어야 한다. 만일 정동영이가 또 전주에서 뛰겠다고 우길 경우, 안철수 저격수가 전주에 뛰어들어 혼내 주겠다고 겁을 주면 좀 떨지 않을까?

저격수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벌써 여럿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안철수, 문성근, 김어준, 조국... 그밖에도 떠오르는 이들이 있지만 굳이 이런 자리에 서둘러 불러내지 않겠다. 무시할 수 없는 득표력을 가지고 공동전선 구축을 위해 선거에 나서 줄 동기를 가진 이들. 당선이든 낙선이든 선거 결과를 감내해 줄 수 있는 이들. 선거에 나서는 것 자체가 야욕이 아니라 희생이요 봉사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만한 이들의 모습이 이제 꽤 보인다.

이런 이들이 '평생 동지'를 바라보며 정당을 결성할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한국 정치의 구조적 문제 몇 가지를 척결하는 단기적 과제에 동지로서 함께 임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민주당 토호세력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하나의 표적이고, 한국 정치를 '사이비 정치'로 만든 '사이비 정치인' 집단을 더 넓은 표적 범위로 잡을 수도 있다. 공동전선 구축을 순조롭게 하는 성과를 이루고 여력이 있어서 한나라당까지 손봐줄 수 있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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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