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1946년 4월 7일자에 이런 기사가 실렸었다.
[상항 6日 AP발 합동] 당지 정보에 의하면 현재 조선 서울에서 개최중인 미소공동위원에서 남북통일의 조선자치정부 수립이 졸연히 해결되지 아니하며 미 점령군 당국은 남조선 안에 한하여 조선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미 국무당국은 이 정보에 대하여 의외의 감을 표시하고 우안은 미소공동위원회 미 대표위원이 제의한 바가 아니고 미군정 당국이 제의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미 대표위원의 독단적 행동을 원치 아니한다 하며 조선의 미군정 당국은 남조선정부 수립 계획에 있어서 미국인은 자문 격으로 참여하여 전면적으로 지도하고 조선 문제는 조선인에게 일임되리라 한다. 또 일부 정보에 의하면 민주의원 의장을 사임한 李承晩은 재차 출마하여 남조선정부의 주석이 되리라 하며 남조선정부 수립안을 미 측이 제의한 중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소련 측이 정치적 이유로 미소공동위원을 천연시키려고 하는 것
2) 미군의 복원계획에 의하여 조선 미군정 당국의 미군 장교급이 축차 귀국하여 기수가 희소하여지는 것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러치 군정장관이 즉각 부정하고 나섰지만 의혹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우익의 극단적 반탁운동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자체를 거부해 왔는데, 그 대안이 무엇이란 말인가? 분단 건국은 이 질문에 가장 그럴싸한 대답이었다.
2월에 민전과 민주의원이 맞서 세워짐으로써 좌우익의 대결이 뚜렷해졌다. 좌우익의 직접 대결을 가로막고 있던 중도파는 대부분 민전에 참여했는데, 민주의원의 우익은 민전 자체를 좌익으로 규정함으로써 중도파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중도 우익’으로 부를 만한 일부 중도파는 비상국민회의-민주의원에 참여한 후 입장이 약화되었다.
김구-이승만-한민당의 극우파는 2월 이후 좌익(민전을 포함하는)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한편 미군정은 경찰의 좌익 탄압을 방관하는 입장을 넘어 차츰 스스로 탄압에 나서기 시작했다. 미소공위에서도 이북 주민의 입장은 공산주의자들이 대표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남 주민의 입장을 대표하는 데서는 좌익을 배제하거나 축소하려 했다.
이북 주민의 입장에서 미국이 바라는 우익의 존재를 기대할 수 없다면 미소공위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세 가지가 가능했다.
(1) 이남 주민의 민의가 있는 그대로 반영되게 함으로써 전체적 결과로 예상되는 좌익의 우세를 감수한다.
(2) 좌익의 우세를 도저히 감수할 수 없다면 이남 주민의 민의 반영이 우익에 편중되도록 군정청의 권력을 발동한다.
(3) 군정청의 권력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없다면 미소공위가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하도록 좌초시킨다.
당시 미국 측은 이북 주민의 민심이 소련 측의 폭압적 수단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에게 장악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네도 폭압적 수단을 통해 이남 주민의 민심을 장악해도 되고, 장악해야 한다고 믿었다. 근년 밝혀진 자료들은 이 믿음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북 지역의 상황 변화에 대한 소련군의 작용은 이남 지역의 미군에 비해 훨씬 작은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왔다.
미소공위에서 미국 측은 (2)의 태도로 나가다가 여의치 않자 (3)으로 바꿨다. 정용욱도 미소공위 정회의 1차적 책임이 미국 측에 있다고 보았다.
전반적으로 미소공위 1차 회담은 한국인의 독립 요구와 무관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미-소 양측의 설전장이 되었다. 미국은 결렬의 원인을 소련의 완고한 입장과 양측 정치 철학의 차이, 남한의 반탁운동에 돌렸다. 그러나 미국은 회담 이전부터 모스크바 결정의 적극적 이행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미소공위 결렬의 기본적 이유는 반탁운동 때문이 아니라 반탁운동을 이용하고자 한 미국측 태도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리고 반탁단체를 배제하여 미국측 입지를 약화시키고, 임시정부 수립에서 유리한 위치를 고수하려는 소련의 경직된 태도와 계산이 이를 도왔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113-114쪽)
미소공위가 일단 정회에 들어간 후 미군정이 가장 두드러진 노력을 기울인 것은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파를 앞세운 ‘좌우합작’이었다. 미군정이 전 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담에 맞춰 독촉중협의 결성을 재촉한 것도, 지난 연초 민주의원의 구성을 지원한 것도 모두 이남 주민의 민의 수렴을 유리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두 기구가 모두 좌익을 전혀 포용하지 못함으로써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좌익을 최소한이라도 포용하기 위해 세 번째로 시도한 것이 이 좌우합작이었다.
미군정에게 좌우합작은 온건한 노선이었다. 좌우합작을 통해 미국이 용인할 만한 성격의 단일국가를 만들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란 강경한 대안이 또 한쪽에 있었다. 4월 초순 미군정의 단독정부 추진설이 보도된 것은 이 대안의 존재가 새어나갔거나 그 대안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간을 보기 위해 흘린 것으로 보인다.
5월 12일의 극우파 집회 독립전취 국민대회 때 김규식의 발언이 단독정부를 겨냥한 것이라고 민전이 비난했으나(<중앙신문> 5월 15일자) 김규식은 그런 뜻이 절대 아니라고 부인했다.(<동아일보> 5월 17일자) 극우파의 단독정부 추진설에 세인의 촉각이 곤두서 있던 상황을 보여주는 일이다.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이승만과 밀착된 인물이던 굿펠로가 5월 24일 미국으로 돌아갈 때 단독정부 추진론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묘한 것은 5월 25일자 <서울신문> 기사 “굿펠로우, 귀국에 앞서 조선통일문제에 대해 사견 토로”에서는 “만약 소련 측이 교섭의 재개를 제의치 않는다면 유일한 타개책은 삼상회의의 재개”라 하여 단독정부를 내세우지 않았는데, 같은 날자 미군 신문 <Stars and Stripes>에는 소련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남한 단독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그의 말이 인용되었다는 사실이다. (B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50쪽) 한국 사회의 역풍이 아직 조심스러운 상황에서 미군정을 상대로 바람을 잡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6월 3일 이승만이 드디어 한국 사회를 상대로 단독정부 방안을 내놓은 것은 열흘 전 굿펠로의 발언에 대한 미군정 요인들의 반응을 살펴본 결과일 것이다.
정읍 환영강연회에 임석한 李承晩은 공위 재개의 가망이 없는 경우의 남조선 임시정부 수립과 민족주의 통일기관 설치에 관하여 주목되는 연설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서울신문> 1946년 06월 04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지금까지 사태의 흐름을 살펴온 느낌으로, 하지를 비롯한 미군정 당국자들도 단독정부 방안을 생각하고는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좌우합작을 통한 단일국가 수립 방침에 우선순위가 있었고, 그쪽이 여의치 않을 경우의 대안이 단독정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좌우합작 추진 과정을 앞으로 더듬어보면서 이 인상을 확인하려 한다.
그런데 좌우합작 방안이 성공할 경우 극좌파와 극우파 모두 영향력을 잃는 상황이 예상되었다. 그래서 좌우합작 성공의 여건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할 동기를 가진 것이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주장은 이런 동기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해석 역시 앞으로의 진행을 살펴보는 가운데 확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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