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차례 ‘베트남 이야기’를 정리해 온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조선과 함께 독립의 기회를 맞은 베트남 사정을 조선과 비교함으로써 당시의 국제정세를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비슷한 목적으로 ‘중국 사정’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1945-46년의 중국 사정은 조선의 사정에 직접 끼치는 영향도 상당히 컸기 때문에 정리의 필요가 더욱 절실하다.


앞으로 ‘중국 사정’ 정리에 착수할 출발점으로 이 시점에서 눈에 띄는 대표적인 문제 하나를 검토해 본다. 중국 정부의 조선인 재산 탈취 문제다.


중국에 거류하는 조선동포들의 재산을 중국에서 접수하므로 이에 대한 물의가 분분한 이 때 민전에서는 1일 다음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여 조선인 재산을 접수하지 말 것을 중국 정부에 요망하였다.

“최근 중국으로부터 귀국하는 우리 동포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조선교민의 일체 재산을 중국 관리가 몰수하고 공수로 돌려보냄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우리 동포의 대다수는 일제의 학정으로 인하여 국내에서 생활근거를 잃고 생활의 방도를 찾아 중국으로 간 것이며 그리하여 각고면려로서 축재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재산을 몰수함은 인도상으로도 본 민전은 범죄자 친일파를 제외한 조선동포의 일체 재산을 접수치 말 것이며 이미 접수한 것은 엄밀히 조사하여 반환하기를 요망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6년 06월 02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해방 당시 재중 조선인에게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에게 함께 핍박받는 존재로서 중국인의 항일운동에 연대의 대상이었다. 또 하나는 일본인의 아류(亞流) 또는 주구(走狗)로서 중국인에게 항쟁의 대상이었다.


재중 조선인의 대다수는 만주 지역에 정착한 농민으로서, 크게 보면 일본에게 핍박받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중에도 일본의 지배와 침략에 순응하고 협력한 측면이 상당히 있었다. 한편 관내 지역에 진출한 조선인 중에는 농민의 비율이 적고, 일본의 침략에 편승하여 생계를 꾸리거나 이득을 취하는 측면이 컸다. 특히 일본이 지배한 화북지방에 이런 이주민이 많았다.


조선에 건너와 살고 있던 70여만 일본인 중에도 양쪽 측면이 엇갈렸다. 제국주의에 편승해 군림하러 온 자들이 있는 한편으로, 군국주의 통치에 몰려 살 길을 찾아 조선에 온 사람들이 있었다. 전자를 ‘폭민(暴民)’, 후자를 ‘생민(生民)’이라고 이름 붙여 본다.


폭민과 생민은 명확히 갈라지는 집단이 아니었다. 재조선 일본인의 경우를 더 생각해 보자. 군인, 경찰, 관리 등 식민지배의 역할로 조선에 온 일본인 중에도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폭민이면서 생민의 측면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제국주의의 ‘제’ 자도 모르는 농민 이주자라도 차별의 혜택을 별다른 가책 없이 누린 사람들이 있었다. 생민이면서 폭민의 측면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 1931년의 만보산 사건에 관계된 조선인 이주자들은 경작할 땅을 찾아온 생민이었지만, 현지 중국인의 눈에는 일본의 위세를 업고 자기네 생활 근거를 침식해 들어오는 폭민이었다. 이 사건의 기본 성격을 김철은 이렇게 요약했다.


(...) 둘째는, 이 사건에서 완바오 산의 조선 농민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할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수전 경작을 위한 조선 농민들의 수로 공사는 어느 모로 보나, 중국 농민들의 재산권과 생존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이며 폭력이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농민들이 일거한 행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일본 공권력의 보호 아래 있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 문제는 뒤에 상세히 논하겠지만, 만주에서의 조선 농민 부락과 그들의 경작은 단순히 농업생산 활동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조선인 이민을 포함하여 일본인 농업 이민의 활동은 만주에 진출한 일본제국주의 군사력의 첨병으로 기능하였다는 점, 요컨대 만주 이민의 복잡한 정치-경제-군사적 의미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몰락하는 신생 - ‘만주’의 꿈과 <농군>의 오독”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491-492쪽)


해방된 조선에서 모든 일본인의 소유 토지와 공장을 몰수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은 정치세력이 없었다. 총독부나 동척 같은 기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의 재산까지 몰수해야 한다고 했다. 개인이라도 자기 투자나 노력보다 식민지배에 기대어 일군 재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논리였다. 그런데 진보세력을 자처하는 민전도 중국의 조선인 재산은 “각고면려로 축재한” 것이니 보호해 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만보산 사건에 대한 김철의 고찰은 조선인 이주자들의 중국인에 대한 폭민, 즉 침략자로서의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감이 있다. 그러나 그런 측면의 엄연한 존재를 지적한 것은 우리 사회의 편향적 인식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일이다. 해방 후 중국인의 조선인 이주자들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는 데도 이런 측면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인이 재중 조선인을 대하는 태도 역시 생민으로서 옹호하는 측면과 폭민으로서 배척하는 측면이 엇갈렸다. 국민당은 배척하는 정책이었다. 지역의 토호들이 조선인 박해를 통해 이득을 취하게 해줌으로써 국민당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자세가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는 일반적이었다.


반면 만주 지역에서부터 지배 영역을 늘리기 시작한 공산당은 조선인 이주민을 최대한 생민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폈다. 일반 중국인과 똑같은 생존권을 보장해주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에는 국민당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적 목적도 있었지만, 피압박계층을 옹호하는 진보적 정치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물론 조선인 이주민 중 두드러지게 일본 권력에 편승한 계층은 공산당에게도 포용받지 못하고 재산을 빼앗긴 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다수의 이주민들, 예컨대 일본 권력이 중국 농민을 몰아내고 만든 농장에 정착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간접적으로 중국인에게 피해를 입힌 농민들은 포용받고 ‘조선족 사회’를 유지했다. 그리고 해방전쟁에 적극 참여하는 등 ‘신중국’ 건설에 동참함으로써 과거의 어두운 측면을 불식하고 중국의 당당한 공민(公民)이 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배려와 같은 배려를 왜 조선의 좌익은 일본인 이주민들에게 베풀지 못했을까?


만주 지역의 조선인에 비해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생민의 측면이 약했다는 데 제일 큰 이유가 있었다. 만주 지역의 2백만 조선인 중 대다수는 그곳에서도 빈농 내지 소농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음에 반해 조선의 70만 일본인 중에는 농민의 비율도 작고 농민이라도 지주 신분이 많았다. 일본인에 대한 권력의 지원이 훨씬 더 크고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치적 성숙성의 차이도 생각할 여지가 있다. 중국공산당은 십여 년간의 현실투쟁을 통해 ‘인민전선’의 의미를 깊이 체득하고 있었다. 대장정 때 소수민족과의 협력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우치기도 했다. 중국공산당의 이념은 민족주의 담론에 크게 얽매이지 않을 만큼 나아가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조선의 좌익은 민족주의 담론에 맞설 만한 역량을 키우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1월 박헌영의 기자회견 내용을 군정청과 밀착된 미국인 기자가 왜곡해 박헌영이 소련 편입을 원하는 것처럼 선전해서 타격을 가하려 한 것도(1946. 1. 19일자 일기)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