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배(colonialism)는 문명 초기부터 있던 현상이다. 식민지배에는 정착형(settler colonialism)과 착취형(exploitation colonialism)이 있는데, 두 가지 다 부족사회부터 있었던 것이다. 한 부족이 이웃 부족을 공격해 복속시키면 그 노동력을 착취하는 착취형 식민지배가 되었고, 쫓아내면 빼앗은 공간으로 활동영역을 넓히는 정착형 식민지배가 되었다.


이런 의미의 식민지배는 신라 통일 전의 한반도에서도 부단히 전개되었다. 여진 지역을 향한 고려시대의 ‘북진정책’도 식민지배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국경이 고정되면서 한민족의 식민지배가 사라졌다. 제주도와의 관계가 식민지배의 성격을 일부나마 가장 늦게까지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베트남에서는 ‘남 티엔(南進)’이란 이름의 식민지배가 11세기에서 18세기까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베트남 일대를 식민지로 만들기 전에 그 남쪽 끝 코친차이나 지역은 사실 베트남의 식민지라고도 볼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때 조선인의 반응에는 지역에 따른 큰 차이가 없었던 것과 달리 프랑스의 지배에 대한 베트남 주민의 반응은 지역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었다.


제주에 살고 있던 십여 년 전 어느 해 4-3 기념행사 준비를 의논하던 중 한 분이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4-3 기념행사가 미국 규탄에 너무 치중해 왔는데, 일본 규탄에도 비중을 좀 두는 것이 공평하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다.


나는 바로 반대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이 제일 그럴싸하게 적용될 수 있는 곳이 제주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제주도가 본토와 다른 특징을 좋은 쪽으로 살려주는 정책이 무엇이 있었는가? 제주도 산업을 발전시키고 주민들을 잘 살게 해주려는 노력이 무엇이 있었는가? 심지어 조선 후기에는 ‘출륙금지령’으로 제주도를 감옥처럼 만들기까지 했다.


그런데 일본 지배 아래 제주도의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조선조 5백 년간 제주 사람이 한 명도 성균관에 들어가지 못한 반면 일제시대에는 제주도의 인재들이 서울과 도쿄를 비롯한 각지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활동공간을 찾아 제주도를 떠날 수 있게 된 것만도 조선시대에 비하면 혜택이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반일’을 하니까 제주에서도 덩달아 하자고 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고 나는 말했다.


19세기 후반 코친차이나 지역의 상황을 나는 소상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남 티엔’의 정복 대상이었던 이 지역의 반응이 정복의 주체였던 통킹 지역과는 달랐으리라고 짐작한다. 천여 년간 인도-불교 문명권에 속해 있다가 불과 백여 년 전 유교문명을 기조로 하는 국가에게 정복당한 이곳 주민들의 눈에는 북방에서 온 정복자와 바다에서 온 정복자가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근대적 식민지배라는 점에서 ‘남 티엔’의 식민지배와 다른 것이었다. ‘근대적’ 식민지배는 재래식 식민지배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몇 가지 특이한 경제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 있는데, 그에 앞서 우선 ‘원격’ 식민지배라는 특징부터 지적해 둔다.


대항해시대 이전의 군사활동은 육지를 통해 펼쳐졌기 때문에 식민지배도 인접 지역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해상 수송력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바다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라도 군사활동과 식민지배를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16세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그리고 17세기에 영국,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해상을 통해 식민지 제국을 만들었다.


원격 식민지배는 정착형보다 착취형의 성격을 가지기 쉽다. 인구가 희박하고 문명의 성격이 전혀 다르던 ‘신대륙’에서는 정착형 식민지배가 펼쳐질 여지가 있었지만, 농업사회가 자리 잡고 있던 ‘구대륙’에서는 지배국 국민의 이주를 최소한으로 하는 착취형 식민지배가 대세였다. 현지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착취형 식민지배는 가급적 간접통치 방식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지배국 국민의 인력이 넉넉지 않기 때문에 협력계층을 적극적으로 양성, 동원하게 된다. 식민지배의 억압성과 폭력성의 실행을 가능한 한 협력계층에게 맡기는 것이 간접통치의 요점이다.


코친차이나 지역에서는 프랑스의 지배를 통해 고무 플랜테이션 등 수익성 높은 새로운 산업이 발전했고, 그 이익을 프랑스인과 협력계층이 분점했다. 주민 중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프랑스 지배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협력계층을 이뤘고, 민족주의에서 자유로운 중국인 이주자들도 이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전통적 쌀농사의 비중이 유지된 통킹 지역에 비해 코친차이나 지역에서는 근대적 계층분화가 급속히 일어났고, 억압체제의 모순도 민족 모순보다 경제적 모순이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일본의 조선 지배는 근대적 원격 식민지배보다 재래식 식민지배에 가까운 것이었다. 일본이 조선에서 시행한 ‘근대화’는 피상적인 것이어서 조선의 산업구조와 사회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물론 변화 속도를 정량적으로만 측정한다면 큰 변화로 볼 수도 있겠지만, 20세기 초반의 상황에서 조선처럼 문화적 기반이 탄탄한 사회가 겪은 변화라면, 일본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를 힘껏 억제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주도 빼고.


일본 지배가 조선에 일으킨 변화는 근본적으로 질적 변화가 아닌 양적 변화라고 나는 본다. 농지 소유의 과도한 집중은 일본 지배 이전부터 심각한 문제였다. 일본은 조선에 새로운 산업구조를 건설하지 않고 농업 생산의 효율화에 경제정책을 집중했다. 그 결과 농지 소유의 집중이 더 심화되면서 대량의 유휴노동력이 발생했다. 일본은 그 유휴노동력을 만주와 일본 등지로 유출하는 고식적 조치만 취하면서 조선 사회의 발전 방향을 열어주지 않았다.


조선의 산업구조에 변화가 적은 만큼 흔히 ‘친일파’라 부르는 협력계층도 구조가 단순했다. 식민지배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누린 사람들의 압도적 다수가 지주집단에 속했다. 식민지시대의 지주집단이 조선 말기의 지주층에 비해 악랄한 행태를 보인 것은 지주층을 견제하던 국가의 기능이 사라진 결과일 뿐이지, 그들의 행동 양식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토호 입장 강화에는 코친차이나의 협력계층처럼 총독부의 정책이 다각적인 작용을 한 것이 아니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 지배를 받기 시작한 코친차이나에서는 저항이 크지 않았다. 베트남의 민족주의 세력은 북부 통킹과 중부 안남 지방에 분포해 있었고, 코친차이나는 베트남의 식민지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로 바뀐 셈이었다. 1880년대에 베트남 전체가 프랑스 지배를 받게 되자 ‘칸 부옹(勤王)’으로 대표되는 저항운동은 통킹과 안남에서 일어났다. 민족주의에만 의지한 이 저항운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졌고, 1930년대에 들어와서야 새로운 저항운동이 자라나는 데는 민족주의보다 경제적 모순이 더 큰 작용을 했다. 그래서 베트남 독립운동에서는 공산주의와 공산당의 역할이 크게 되었다.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1946. 4. 15일자 일기)에서 사회혁명의 필요가 해방 조선에게 시급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내놓았었다.


“35년 동안 조선에서도 계급 모순이 상당히 자라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순의 대부분은 이민족 지배에 기인한 것입니다. 농지 문제만 하더라도 조선인 사이의 모순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농지의 20%를 일본인과 일본 회사들이 탈취한 것이 문제의 몸통입니다. 그들의 농지만 몰수해서 영세농에게 분배해도 문제는 충분히 해결됩니다.”


베트남과 비교하면 조선의 독립에는 장애물이 적었다. 식민지배에 종사한 조선인의 수도 베트남보다 훨씬 적었고, 식민지배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취한 범위도 좁았으며, 이득을 취한 방법도 단순했다. 식민지배로 인한 산업구조의 변화도 베트남보다 훨씬 작았다. 지역 간의 이질성이나 갈등도 별로 없었다.


사회혁명의 필요가 조선에도 있기는 했지만 베트남처럼 시급하고 절박하지는 않았다. 항일운동의 기초가 사회경제적 문제보다 민족주의에 있었다는 점을 해외보다 국내의 운동이 미약했다는 사실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사회경제적 문제가 심각했던 베트남에서는 국내의 저항운동이 훨씬 더 치열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