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이승만 ‘정읍 발언’의 골자는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란 것이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크게 긴장할 필요가 없는 내용일 수도 있다. 이북에는 지난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 있었으니, 그와 대등한 수준의 조직을 이남에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바람직한 수순이 될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승만이 말한 이남의 임시정부는 북조선임시인위와 격을 맞출 수 없는 것이 실상이었다. 소련군은 군정청을 설치하는 대신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했다. 1945년 9월 말까지 도 단위 인민위원회가 완성되고, 10월 8-10일의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거쳐 5도행정국이 만들어지고, 다음 단계에서 북조선임시인위가 만들어졌다. 북조선임시인위의 기본 성격은 이남의 미 군정청과 같은 행정기구였다.
행정기구로서 미군정이 건재한 채로 남반부 임시정부를 따로 만든다는 것은 행정적 필요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는 한국의 정치조직 작업을 미소공위에서 진행하게 했다. 미소공위가 정회된 상태에서 따로 정치조직 작업을 하겠다는 것은 3상회담 결정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정 당국자들이 3상회의 결정의 거부 자세를 여러 모로 보여 왔기 때문에 미소공위를 고의적으로 좌초시키고 분단 건국을 지원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떠돌고 있었다. 정읍 발언 이튿날 나온 공산당의 담화는 이 의혹을 바닥에 깔고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를 계기로 남조선 단독정부 또는 소위 자율정부 수립을 획책하고 있는 정체는 드디어 폭로되었다. 그것은 정읍에서 한 李承晩 박사 자신의 말로서 언명된 것이다. 즉 그것은 삼상결정을 반대함으로써 미소공위를 결렬시키고 반소·반공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려 하는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06월 05일자)
[이하 신문자료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그 다음날의 민전 담화문도 같은 의혹을 품고 있다.
“남조선 단독정부 내지 위장통일독립을 무망케 하는 자기정권욕의 책동이다. 우리는 이러한 단독정부의 모략을 분쇄하고 미소공위의 재개로 통일적인 민주임정이 수립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선일보> 1946년 06월 06일자)
인민당의 6월 5일 담화문은 공산당과 민전처럼 의혹을 앞세우지는 않았지만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조선민족은 남북이 합치한 통일정부만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 남북조선이 분열되면 조선민족의 정치적·경제적 부활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인은 한 사람도 남조선 단독정부를 바라지 않을 것이오, 또 국제결정에서도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남조선 단독정부 운운함은 부당하다.” (<조선일보> 1946년 06월 06일자)
한독당도 즉각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6월 4일 엄항섭 선전부장이 발표한 담화문이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장기휴회로 정계의 파문이 큰 데 따라서 한국인 전체의 실망도 크리라고 믿고, 속히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어 자주독립적 임시정부수립에 적극적 원조가 있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이에 우리도 금후 종전과 같은 좌우의 분열로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미치는 영향이 없도록 노력하여, 단일민족으로서의 최선의 역량을 발휘하여 한국의 모든 문제는 자결하도록 할 것이며, 동시에 미소공동위원회는 우리와 긴밀한 협조위에 신속히 진행되어 우방연합국의 한국에 대한 의무를 완전히 수행하기를 바란다. 요즘 항간에는 단독정부 수립설이 유포되고 있으나, 우리 당으로서는 이에 찬성할 수 없다. 38선의 장벽이 연장되는 한 경제상 파멸과 민족이 격리되어 역사적인 큰 비극을 자아내고 있음은 민족통일에도 큰 방해라 아니할 수 없다. 장래에 있어서 이 상태가 그대로 계속되는 때에는, 한국민족에 있어서 이 상태가 그대로 계속되는 때에는 한국민족 자체의 생존을 위하여 그대로 방관할 수 없을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06월 05일자)
반탁운동 시작 이래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그리고 독촉국민회 등을 통해 김구는 이승만과 밀착된 보조를 취해 왔다. 그러나 김구 입장에서 단독정부 추진은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 정병준은 이 시기에 두 사람 사이의 은근한 경쟁 상황을 지적했다.
1946년 4월에 임정은 독자적인 지지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기초 작업을 진행했다. 임정은 반탁운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 기반을 강화했지만, 이를 자신의 조직 틀 내에 포섭하지도 못했고,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번번이 정세의 주도권과 명분을 상실했었다. 임정은 미소공위가 진행되는 기회를 이용해 조직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목했다. 이는 국민당-신한민족당과의 통합을 통한 한독당의 강화와 독촉국민회 장악 등으로 나타났다. 임정은 한민당까지 흡수 통합함으로써 당을 강화하려 했지만, 한민당과 이승만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당과 대중조직의 강화를 통한 임정의 세력 확대는 제1차 미소공위가 진행되는 짧은 기간 동안 유지되었다. 심지어 김구는 4월 9일 이승만을 방문해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이승만은 이에 맞서 김구에게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을 사임하라고 종용했고, 김구는 4월 10일에 전국도부군지부장회의에서 “나는 나의 소신이 있으면서도 이 박사와 혼연일체”라며 불편한 심경을 표했다. (<우남 이승만 연구> 546-547쪽)
이승만은 단독정부설을 띄워보는 것으로 족하지, 이 일로 김구와 결별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치고 빠지기’로 나갔다. 6월 5일 이리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계속 토의할 희망이 보이지 아니함에 일반민중이 초조해서 지금은 남조선만이라도 정부가 수립되기를 고대하며 혹은 선동하는 중이다. 나의 관찰로는 조만간 무엇이든지 될 것이니 아직 인내하고 기다려서 경거망동이 없기를 바란다.” (<서울신문> 1946년 06월 08일자)
단독정부 수립을 일반 민중이 바라고 있고, 또 누군가가 이것을 선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쏙 빠졌다. 위 기사가 실린 6월 8일자 <서울신문> 사설은 이렇게 꼬집었다.
“최근에 성히 선전되는 소위 남조선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의 계획이 과연 사실인지 혹은 단순한 추측인지 밝혀 알 수 없으나, 통일정부를 고대하다가 여의케 되지 않으므로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것을 일반민중이 고대하고 혹은 선동중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그 일반 민중이란 어떠한 방면의, 또 얼마만한 수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지도자층에서는 모름지기 민중을 추수하지 말고 도리어 냉철한 태도와 정당한 노선으로 그들을 인도하여야 할 것이다. (...) 속론을 곧 민의로 속단하여 노선을 그르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다만 송연할 따름이다. 이 강토에 생을 향수한 자 민족양단과 동포상잔 밖에 기대되지 않는 남북의 분열을 희망할 자 어디 있는가?”
“민의 운운하나 민의는 한 사람의 뜻도 민의다. 그러나 민의의 정의는 인민의 전수는 아니라도 적어도 그 8·9할이 되어야 민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과연 단독정부를 8·9할이 좋아하는가, 또 누가 이를 조사했을까가 의문이다.” 하는 조선어학회 주간 이극로의 논평과 막 귀국한 이용(이준 열사의 아들)의 “그것이 일부 민의라 할지라도 지도자로서는 통일을 목표하고 민중을 인도하여야 한다.” 하는 논평도 같은 신문에 인용되었다. 이승만의 ‘민의 조작’에 대한 반감의 표출이었다.
한편 한민당은 이승만의 ‘치고 빠지기’ 작전에 절묘하게 박자를 맞췄다. 함상훈 선전부장은 6월 7일 담화문에서 “이승만 박사의 민족통일기관 설치 운운의 연설을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 같이 선전하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조선일보> 6월 8일자) 6월 14일에는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
“세계 어느 민족이나 자유와 독립을 기구하는 것은 공통적 현상이다. 이 욕구에 응하여 민족자결권을 먼저 인정한 이가 전 미 대통령 윌슨과 소련의 레닌이다. 중국의 손문은 ‘與弱小民族 共同奮鬪’라 하였고 최근 영 수상 애틀리는 인도가 영제국의 일 연방으로서 남아 있으면 환영하고 분리한다면 다시 손을 잡아 우호의 관계를 맺겠다 하였다. 이와 같이 미 소 중 영 지도자는 모두 약소민족의 해방독립을 주장하였고, 대서양헌장 국제헌장에도 민족자결권을 고조하였으며 카이로선언 포츠담선언에도 조선의 독립을 분명히 규정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열강이 조선의 독립을 허여치 않음은 무슨 때문인가 막부삼상회의 결정이 조선독립에 대한 구체적 방책을 표시하였는데 이곳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조선임시정부 수립에 원조한다 하였지 자신이 수립하는 주체가 된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소·중·영의 징발 하에 자주적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조금도 열국과의 우의를 상하지 않을 뿐더러 일부에서 우려하는 바와 같이 반연합국적 행동도 아니다. 오직 문제는 진실로 조선인 전체의 의사를 대표하는 정부의 수립인데 이것은 즉시 독립을 요망하는 대다수 민중의 의사를 대표하는 정부면 그만일 것이 아닌가. 일부에서 단독정부니 우익정부니 떠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조선일보> 1946년 06월 15일자)
한편 이승만은 6월 12일 담화문에서 단독정부설을 완전히 남 얘기처럼 했다.
이승만 박사가 과반 남조선 지방 순회 중 강연한 남조선 정부 운운에 관하여 방금 정계에서는 물의가 분분한 터인데 동 박사는 12일 다시 이 문제에 관하여 여좌한 담화를 발표했다. “내가 말한 요지는 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 된 후 재개되기를 기다리고 언제 속히 열리는지 초조하며 또 혹은 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릴 희망이 없으니 남조선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야 되겠다고 조급하는 태도가 보이매 이때가 가장 신중을 기하여 망동과 망언을 삼가야 되겠다고 한 것이다.” (<자유신문> 6월 14일자)
이런 와중에 김구가 이승만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있었던 것은 어떻게 이해할 일일까? 6월 11일 독촉국민대회의 한 장면을 서중석은 이렇게 그렸다.
이날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 충성과 복종, 명령을 맹세하는 소리가 높았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최고사령부라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함을 맹세하시오”라고 연설하여 만세와 박수로 맹세를 받았고, 김구는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외쳤다.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도 소련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 땅에 발 못붙이게 하고, 미국과 끝까지 합작하여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4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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