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미소공위가 정회된 지 보름이 지났습니다. 선생님께서 제창해 온 ‘건국구민(建國救民)’을 향한 가장 순탄한 길을 기대한 곳이 미소공위였는데, 성과 없이 정회에 이른 책임을 미-소 간에 서로 미루기만 바쁠 뿐, 재개의 기약이 보이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어느 쪽 책임이 크다고 보십니까?
안: 두 사람이 하나의 일을 함께 하다가 서로 어긋나게 된다면 양쪽에 모두 책임이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을 때, 문제 하나하나는 회담을 좌초시킬 만큼 큰 문제가 아니라도 서로 얽히다 보면 꼼짝 못하게 될 수 있지요. 양쪽에 모두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을 슬기롭게 풀어나갈 길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김: 요즘 사람들은 한 문제의 책임을 양쪽으로 나누는 것을 ‘양비론(兩非論)’이라 해서 무책임하고 비생산적인 태도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비를 분명히 해서 해결의 길을 서둘러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두 나라 중 어느 쪽 책임인지를 분명히 해야 회담 재개를 위한 여론의 압력이 효과적으로 형성되지 않겠습니까?
안: ‘양비론’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본다니,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네요. 현실 속에 양쪽의 책임이 엇갈려 있는데 억지로 한쪽으로 몰아붙인다면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쪽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과 저쪽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서로 합리적인 토론을 거부하고 선명성만을 내세운다면 ‘힘의 대결’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도 무척 험한 세상이라고 생각하는데, 65년 후의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 험한 세상이 될 모양입니다.
김: 네, 알겠습니다. 누구 책임이냐를 따지기에 앞서 어떤 문제가 존재하는지 파악하는 데부터 힘을 쏟아야겠지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중요한 문제들을 짚어주세요.
안: 카이로회담에서 조선 독립 방침이 정해지던 때와 지금 사이의 상황 변화에 여러 문제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30개월 전 연합국들이 조선의 실상을 깊이 이해해서 ‘조선 독립’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닙니다. 일본이랑 싸우는 게 당장 큰일인데 조선을 독립시킨다고 하면 조선인의 일본 협력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 생각으로 꺼낸 얘기였죠.
그런데 막상 일본이 항복하고 나니 ‘조선 독립’의 실제적 의미들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연합국 중 영국은 이제 동아시아 지역에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게 되었고, 중국은 제 코가 석 자라서 조선을 돌아볼 겨를이 없지요. 조선이 어떻게 어떤 나라로 독립하느냐를 놓고 미국과 소련이 주판알을 튕기게 되었습니다.
공동의 적 앞에서는 두 나라의 엇갈리는 이해관계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시스트와의 전쟁이 끝나니, 이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쟁이 눈앞에 닥쳐왔습니다. 조선뿐 아니라 세계도처에서 두 나라가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고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몸싸움까지 벌일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는 연합국들이 모두 같은 편일 때 선의로 맺었던 약속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실행을 미소공위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두 나라 다 예전의 약속 외에 생각할 것들이 생겼습니다. 이런저런 국익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죠. 모든 문제가 거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나는 봅니다.
김: 조선의 운명에 칼자루를 쥔 두 나라가 각자 사심(私心)을 품는다면 민족의 진로에 어두운 그림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당면 과제에 많은 난관이 예상됩니다. 이미 일각에서 ‘분단 건국’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분단 건국이라니! 식민지 상태보다도 더 끔찍한 것 아닙니까? 합쳐져 있어야 할 것을 억지로 떼어놓았을 때 얼마나 많은 갈등과 고통이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은 신탁통치 이야기가 나온 이래 시종일관 ‘반탁’을 주장해 왔습니다만, 반탁의 대가가 분단이 되더라도 반탁을 고집하실 수 있습니까? 순조로운 조건 속에서 건국을 하더라도 안정된 국가체제를 이루는 데 어차피 1-2년의 시간은 걸릴 겁니다. 차라리 2-3년 신탁통치를 받더라도 분단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면 감수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안: 나도 요즘은 ‘반탁’을 주장하되 그 앞에 ‘절대’를 붙이지 않습니다. 건준 때부터 나는 많은 사람들이 건국 사업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일본 항복시키는 거야 연합국들이 다 함께 원하던 거니까 ‘해방’은 저절로 됐죠. 하지만 ‘독립’에는 연합국 사이에도 어느 정도 이견이 당연히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해방이 저절로 됐으니 독립도 저절로 될 것처럼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건국이 되기 바라는 사심들을 일으켰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 자신 건국의 어려움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반탁에 좀 더 유연한 태도를 취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공산당의 “3상회담 ‘절대’ 지지” 같은 정략적 태도에야 따라갈 수 없지만, 몽양(여운형)처럼 신탁 문제를 접어놓는 대범한 자세에 고개가 수그려집니다. 몽양이 어찌 보면 허술한 사람 같아도, 큰 문제를 바라보는 식견에는 역시 탁월한 면이 있습니다.
김: 이번 미소공위 좌초의 직접 원인인 선언서 서명과 관련해 소련보다 미국 쪽 태도에 무리한 점이 있다는 생각을 보름 전 뵐 때(5월 9일) 말씀하셨죠. 그 날 나온 하지 성명서에서 정회 책임을 소련 측에 미룬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는 말씀도 하셨고요. 그렇다면 ‘모든 책임’은 아니라도 ‘주된 책임’이 미국 측에 있다고 보시는 것 아닌가요?
60여 년 세월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되돌아볼 때, ‘조선 독립’의 약속을 지킬 의지가 소련 쪽에 비해 미국 쪽이 약했을 것 같습니다. 소련은 전쟁 피해로 생산력이 약화되어 있었는데, 미국은 경제력의 절대 우위뿐 아니라 원자폭탄이라는 군사력의 절대 우위까지 쥐고 있었습니다. 소련은 연합국 시절의 협력관계를 최대한 그대로 지키고 싶어 하는 반면 미국은 힘의 우위를 활용해서 국제 질서를 자기에게 더 유리한 쪽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입장이었죠. 한반도에서도 그런 욕심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 보름 전 대담을 <프레시안>에 올리면서 제목을 “미소공위 중단 책임이 미국에게 있는 거 맞죠?”라고 달았데요? 나도 신문쟁이지만, 좀 너무하는 것 같아요. 꼭 소련에겐 아무 책임도 없다는 얘기 같잖아요? 제목을 그런 식으로 뽑으면 김 선생과 얘기 나누는 것도 부담스러워져요.
김: 앗, 미안합니다, 선생님! 편집자가 기발한 제목을 뽑아서 저를 난처하게 할 때도 더러 있지만, 그 제목은 사실 제가 뽑은 겁니다. 선생님께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너무 선정적인 제목은 저도 꺼리지만, 요즘 세상에서 그 정도도 안 하면 글이 보이지가 않는답니다. “책임이 미국에게 전혀 없는 건 아니죠?”처럼 너무 정직, 정확하게 제목을 뽑으면 독자들 흥미를 일으킬 수 없거든요.
안: 그래요? 언론인 노릇도 많이 힘들어지는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결론을 너무 서두르는 풍조는 좋지 않은데... 그런 풍조를 억제하도록 언론인들이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하던 얘기로 돌아와서, 미국의 ‘패권 추구’를 좌익에서 많이 지적합니다. 타당한 지적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보이고요. 그러나 그런 문제를 너무 서둘러 예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미국에게 패권 추구 경향이 있다 하더라도 상황의 진행이 어떻게 될지 확실한 것은 아닌데, 좌익에서 하는 것처럼 나쁜 쪽으로 단정해 버리고 반미감정을 부추기면 그것 자체가 상황 진행에 더 나쁜 쪽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좋든 싫든 미국은 일본을 항복시켜 우리를 해방시켜 준 나라이고, 우리의 독립 사업에도 큰 영향력을 끼칠 나라입니다. 독립국가가 수립된 뒤라 하더라도 세상을 우리 마음대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 국익을 챙기는 나라들과 절충해 가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물며 아직 건국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 입맛만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행보에 더러 미심쩍은 점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상대해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의 자세가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민족 독립의 과제를 외면하는 일부 반동분자의 존재도 문제이지만, 내가 보기에 더 큰 문제는 선량한 대다수 사람들이 건국 과업의 어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경솔한 행동에 휩쓸린다는 것입니다. 불가에서 탐내는 마음(貪心), 화내는 마음(嗔心), 어리석은 마음(癡心)을 삼독(三毒)으로 경계하지 않습니까? 악의를 가진 반동분자보다도 보통사람들의 이 삼독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 끝으로 최근 터진 위조지폐 사건에 대한 선생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5월 4일 소위 ‘뚝섬 위폐단’ 검거 직후부터 공산당 쪽으로 창끝이 겨눠졌다는 소문이 떠돌더니 15일에 군정청 발표가 있었습니다. 경찰국 아닌 군정청에서 이런 사건을 발표했다는 사실부터 이례적인 것이죠. 공산당 중앙집행위원 두 사람에게 주모자 혐의를 건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근래 강화되어 온 ‘좌익 탄압’의 연장선 위에 있는 일이 아닌가 의혹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데, 군정청의 뒤이은 조치는 의혹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수사 결과는 더 나오지 않는 채로 18일에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가 정간당했고, 사건 장소인 근택빌딩에서 공산당 본부를 곧 쫓아낼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 동안 좌익 탄압에 경찰을 앞세워 왔는데, 이제 군정청이 직접 나서서 보다 차원 높은 탄압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좌익에서는 대단한 위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안: 의문투성이 사건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일에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사태 진전을 봐서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를 찾아보죠.
김: 어떤 점에서 ‘의문투성이’로 보시는지라도 좀 말씀해 주시죠.
안: 뚝섬 위폐단 검거 직후에 독촉국민회 간부 하나와 공산당원 하나가 연루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김창선이라는 그 공산당원이 정판사 직원이었더군요. 그 직후 공산당 쪽 수사가 시작되었다는 소문을 들으며, 그 한 사람의 존재에 매달려 있지도 않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15일 군정청 발표에서 ‘증거물’이라고 내놓은 중에 똑똑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뭐가 단단히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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