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미소공위가 6일부터 무기휴회에 들어간 사실이 오늘 하지 사령관의 성명과 담화로 밝혀졌습니다. 미소공위는 3월 20일 개막 직후 발표한 제1호부터 5월 1일의 제 7호까지 공동성명을 통해 모든 합의 내용을 밝혀 왔습니다. 진행방법에 관한 형식적 내용까지 모든 합의 내용이 일곱 차례 공동성명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휴회에 관해서는 공동성명이 없었습니다. 양측 합의에 따른 계획적 휴회가 아니라 회담 진행에 대한 합의가 더 이상 이뤄지지 못하게 된 결과가 아닌지 걱정됩니다. 하지는 담화문에서 “낭설과 억측이 만연하며 民心을 흥분시킬 염려가 있을 듯하나 그런 풍설과 억측의 대다수는 전연 근거가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낭설과 억측이 없게 하려면 휴회 사실과 그 이유를 공동성명으로 밝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안: 한 마디로 ‘파행(跛行)’이지요. 미소공위 협의대상 신청이 반탁 포기가 아니라고 한 4월 27일 하지 사령관의 특별 담화가 나간 후 소련 대표가 여기에 불만을 표하면서 회담 분위기가 차가워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휴회 자체에 대한 합의조차 없이 휴회에 들어갔다면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은 사실상 ‘휴회’가 아니라 ‘중단’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4월 27일 담화문에서 문제가 된 것은 제5호 공동성명에 대한 해석입니다. 하지는 협의상대 신청을 위한 선언서 서명이 반탁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기 해석이 미국 측 수석대표 아놀드와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련 대표단은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거죠.


김: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하지의 4월 27일 담화문이 지나쳤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설령 그 내용에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대표단을 회담에 내보낸 사령관 입장에서 공동성명의 내용 해석에 나선다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 일이죠. 더구나 그 해석 방향이 극우파를 두둔하는 쪽이었으니 회담 상대방인 소련 측에서 도발로 느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선생님의 이 시비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안: 나는 누구 못지않게 반탁 의지를 분명히 표명해 온 사람이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소련 측 입장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4월 18일 나온 5호 성명의 취지는 분명히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의 지지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반탁운동 중에는 3상회담 결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선언서 서명 요구는 이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3상회담 결정에 입각한 미소공위에 참석하려면 3상회담 자체까지 부정했던 점은 반성하는 것이 옳습니다.

미소공위에 협의상대로 나가서 임시과도정부 수립에 관한 어떤 토론에 참여하더라도 내 반탁 의사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토론 과정에 반탁 의사를 전제로 임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탁통치 문제를 토론할 때 반탁 의사를 표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의 담화문 자체보다 그런 담화를 필요하게 만든 우익 인사들의 고집이 문제입니다. 미소공위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성공을 바란다면 왜 하지의 보장을 요구합니까? 협의상대 신청을 밝히는 성명에서 반탁 의지를 접지 않았다는 사실을 왜 꼭 밝혀야 합니까? 쓸 데 없는 객기이거나, 아니라면 미소공위의 성공보다 좌익에 대한 승리를 더 중히 여기는 당파심일 뿐입니다.


김: 선생님은 담화문을 낸 하지보다 우익 인사들의 고집을 문제삼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하지에게도 별개의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위치를 생각해야죠. 개인적으로 어떤 해석을 한다 하더라도 사석에서 의견을 말하는 것과 ‘특별담화문’ 형식으로 만천하에 밝히는 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대표단을 내보낸 점령군 사령관 입장에서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 해석을 일방적으로 공표한다는 것은 대표단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안: 물론 그런 문제가 있지요. 하지만 하지는 4월 22일 담화문에서 같은 취지의 의견을 훨씬 완곡한 표현으로 밝힌 바 있습니다. 5호 성명의 내용을 소상히 설명하는 중에 그 의견이 곁들여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소련 측에서도 문제를 제기할 정도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익 인사들이 만족하지 않으니까 반탁 문제만을 짚어서 27일 특별담화를 내고,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이죠.


김: 이승만의 단짝인 하지의 정치고문 굿펠로가 지방 순회 중인 이승만을 4월 21일에 유성으로 찾아갔고 이승만은 이튿날 김천 강연에서, 그리고 그 이튿날 대구 기자회견에서 미소공위 참여 의사를 밝혔죠. 27일 특별담화를 보고서야 태도를 바꾼 민주의원 의원은 김구, 조소앙, 조완구, 정인보였죠. 정인보와 끝까지 태도를 바꾸지 않은 김창숙 외에는 임정과 한독당 주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미소공위가 실패하면 임정의 법통이 부각되리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안: 임정 지도자들에게는 그런 경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미소공위니 뭐니 복잡한 길 거칠 것 없이 임정의 깃발만 내놓으면 인민이 열렬히 호응해서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을 그분들은 합니다. 지난 연말의 반탁 운동이 맹렬한 반응을 일으킨 데 고무되었지요. 인민의 지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비타협적 자세로 선명성을 지켜야 한다고까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향을 김구 선생께서 좀 억눌러주셔야 할 텐데, 참 답답합니다. 그분은 유연성을 좀 보이시더라도 인민의 지지가 줄어들기는커녕 더 자라날 텐데. 미국과 소련 두 나라만이 회담을 진행하는 데 불만을 가지셨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다른 연합국, 특히 중국이 조선 문제에 더 나서 주기를 바라신다는 것이죠.


김: 상황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제가 보는 것은 나중에 벌어진 일을 아는 후세사람이기 때문일까요? 좌익은 좌익대로, 우익은 우익대로, 상대방에게 이기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환상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에게 좀 양보해야 큰 일이 제대로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협력보다 경쟁만 생각하는 분위기입니다.


안: 그런 이치를 꼭 겪어봐야만 아는 것이겠습니까? 내가 보기에도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서 걱정입니다. 건국준비위원회 때부터 그랬습니다. ‘협동’이니 ‘합작’이니 말들은 하지만 남이 자기 도와주는 것만 생각하지, 자기가 남 도와주는 것은 생각지 않아요. 그러니 건준에 참여해서 뭐든 내놓을 생각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한 자리 없나 눈치만 보는 사이에 건준을 이용할 마음을 먹은 좌익이 들어와서 차지해 버린 거죠.

나 자신은 이기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사람들이 모두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때에 따라서는 이기심을 접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기심만 앞세웠다가 너 나 없이 모두가 피해를 입을 일은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김: 경영학자들은 그런 문제를 ‘죄수의 딜레마’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되는 문제인데, 이런 방식으로 설명한 것이 제일 이해가 쉽더군요.

열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는데, 각자 자기가 먹은 음식 값을 내기로 하면 평균 1만 원 어치씩 먹습니다. 그런데 음식 값을 모두 합쳐서 똑같이 그 10분의 1씩 내기로 하고 먹으면 평균 1만5천 원 어치씩 먹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5천 원 어치 더 먹는 데 따른 내 부담은 5백 원이니까요. 덜 먹으면 손해고, 더 먹으면 이익이죠. 그런데 결과는 필요보다 더 먹고 그만큼 돈을 더 쓰게 된다는 겁니다.


안: 그런 걸 우리는 “소경 제 닭 잡아먹는다”고도 하고 “떡 해 먹을 집안”이라고도 하는데, 그렇게 설명하니까 더 분명히 이해가 되네요. 후세 사람들은 그런 이치를 다 아니까 그런 미련한 짓을 않고 살 수 있겠습니다.


김: 미련한 짓 더 많이 합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나 봐요.

끝으로 미소공위 중단 이유에 대한 선생님 생각을 묻고 싶습니다. 중단 이유가 양측이 합의한 공동성명으로 나오지 않고 있는데, 오늘 하지가 성명서에서 휴회 경위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소련 대표는 상 제 정당이 공동성명서 제5호에 있는 선언서에 서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정당들이 이러한 견해를 포기하지 않는 한(포기할 때까지는) 그들과 협의할 용의가 없다는 것을 명시했다.

이렇게 소련 대표로 말미암아 생긴 신 사태는 이 문제(정당·단체 대표 문제)로 이미 없이 한 과거 6주간은 막론하고 이 앞으로도 임시정부를 조직하자면 상당한 지연이 있을 것은 불가피한 사실이매 미국 대표는 이 현안을 해결시키는 동안 조선 재통일의 일대 장애물인 38도선 철폐에 착수하자고 제의했고 소련 대표는 이 안을 거절했다. 이 거절을 당한 미국 대표에게는 이 단계에 있어서 더 다른 과제가 없으매 부득이 휴회를 구하는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정당대표와의 협의 건의 해결이 현안으로 있던 동안은 무기휴회하기로 1946년 5월 6일에 결정되었다.


휴회의 책임을 소련 측에 넘기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미국 측이 휴회를 제안했다는 사실만은 감출 수가 없군요. 그리고 38선 철폐 문제는 휴회 제안 명분으로 삼기 위해 엉뚱하게 내놓은 것 같고요. 문제는 협의대상 자격에 있는데, 소련 측이 “반탁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마!” 한 것은 아니겠지요. 이 회담에 나오려면 “반탁 얘기는 좀 접어두세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건 무리죠. 그렇게 나왔다면 소련 측이 판을 깬 거죠. 하지만 하지의 성명서만 봐도 소련 측이 그렇게 나오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는 소련의 주장이 “민주주의의 근본인 의사발표권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의사발표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와 있지 않은 의제에 관한 왈가왈부를 좀 접어두자는 얘기를 갖고 “민주주의의 근본”이니 어쩌니 하는 게 너무 억지 아닙니까?


안: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임시과도정부가 수립된 후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할 때 찬성이든 반대든 ‘의사발표권’이 주어질 것은 3상회의 결정문에서부터 명명백백하게 나타나 있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핑계로 회담 진행을 거부한 것은 좋게 봐서 졸렬한 짓입니다. 나쁘게 봐서 무엇인지는 말 않겠습니다.

소련 측에서는 휴회의 책임이 미국 측에 있다고 주장하겠죠. 그 주장은 못 봤지만, 하지의 성명서만 보더라도 소련 측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 모로 보아 미소공위를 성공시키려는 소련 측의 의지는 확고한 것 같습니다. 미국 측 의지가 어떤지는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