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선생님께서는 반년 전 국민당을 만들 때부터 “나는 당수가 아니니, 해외의 혁명영수들이 들어오시면 어느 분이든지 정말 당수로 추대하고, 일대 정치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겸양의 자세를 보이다가 이제 한독당과 합당을 맞이했습니다. ‘합당’이라 하지만 당명도 한독당을 따르고 강령 조정도 한독당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국민당이 한독당에 흡수되는 형국입니다.
국민당 당원들이 불만을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국민당은 조선에서 가장 성공적인 대중정당으로 자라 왔습니다. 대부분 정당들이 명망가 몇 사람을 중심으로 중앙부를 구성할 뿐, 대중조직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데, 국민당에는 수만 당원이 모여 이남뿐 아니라 이북에까지 여러 곳 지당을 꾸려 왔습니다. 우파 정당 중 한민당이 꽤 세력을 이루고 있어도 한민당은 이해관계로 모였고 국민당은 이념으로 뭉쳤다는 평판입니다.
한독당은 머리만 있고 몸통이 없는 정당입니다. 흡수하면 국민당이 한독당을 흡수해야 할 판인데, 당명부터 강령까지 한독당 위주로 하고 당직도 한독당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차지할 기세이니, 국민당 간부들 입장이 난처할 것 같습니다.
안재홍: 국민당은 몸통만 있고 머리가 없는 정당이니 한독당과 합쳐서 한독당을 머리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독당 위원장 김구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부위원장 조소앙 씨를 비롯해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등 혁명선배들이 한 분 한 분 나보다 뛰어난 지도자입니다. 그분들 귀국 전에 당을 만들려니 아쉬운 대로 내가 관리 역할을 맡은 것이고, 그분들이 계신 이제 그분들의 지도를 받는 것이 우리 당원들의 바라는 바입니다.
간부들의 거취에는 일반 당원들과 다른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일 제쳐놓고 당 일에 몰두해 온 간부들이 합당 후에도 의욕과 역량에 합당한 역할을 맡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당 조직을 애써 일궈온 분들이 대거 물러나야 한다는 것은 그분들에게 미안한 일일 뿐 아니라 합쳐진 당의 장래를 위해서도 아쉬운 일입니다. 구체적 절충에서 한독당 간부들이 너무 일방적으로 우리 쪽 양보만 요구하는 것은 좀 서운한 일입니다.
그러나 뭐든 일이 되려면 양보하는 사람이 있어야죠. 우리 합당 선언 후 한민당과 신한민족당에서도 합당 논의가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역시 간부들의 거취가 어려운 문제가 되어 있지요. 그래도 국민당은 김 선생 말대로 이념으로 뭉친 당이기 때문에 문제가 가벼운 편입니다. 한민당은 훨씬 더 힘들지요. 아쉬운 대로 우리가 결행해야 다른 당의 결심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조직 문제는 합당 이후에 차츰 개선해 나가야지요.
김기협: 우파 정당 통합 문제는 반년 전 정당들이 결성될 때부터 계속 제기되어 온 것인데 몇 주일 전부터 강하게 부각되었고, 국민당의 3월 20일 합당 선언을 계기로 현실화되었습니다. 무엇이 이런 분위기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까?
안재홍: 10월 중순 이승만 박사가 돌아왔을 때도, 11월 하순 김구 선생이 돌아왔을 때도 그분들의 영도 아래 정계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우파 통합이 아니라 민족통일전선을 바라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분들이 정당과는 다른 차원에서 임정이나 독촉을 통해 영도력을 발휘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었지요.
그런데 비상국민회의 결성 과정에서 전면적 좌우 통합에 실패하고 한독당 외의 임정 요인 몇 분이 이탈하면서 지금까지 가장 큰 구심점이던 임정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임정의 주류인 한독당으로 초점을 옮겨 새 구심점으로 키울 필요가 생겼습니다. 김구 선생도 이 필요를 인정하고 한독당 영도에 노력을 더 쏟게 되었으므로 국민당도 그 노력에 힘을 보태 드리고자 합당을 결정한 것입니다.
김기협: 비상국민회의와 민전이 따로 세워져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좌우 통합을 바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우파 통합이라도 이루고 보자는 뜻에서 합당 운동이 일어난 것이군요. 이 논의가 한독당과 국민당 외에 신한민족당과 한민당까지 포함한 4개당 통합을 바라보는 쪽으로 일어났다가 지지부진하는 동안 국민당의 합당 선언이 나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다른 두 당에서도 합당 논의가 활발해졌고요. 그 전망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안재홍: 국민당이 몸통만 있고 머리가 없는 정당이라고 했는데, 머리가 없다는 점에서 신한민족당과 한민당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가을 정당 통일운동의 결과로 22개당이 모여 신한민족당을 만들 때 국민당이 불참한 것은 확실한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총재를 맡은 권동진 옹이 물론 훌륭한 혁명선배이기는 하지만 고령으로 활동력이 없는 분이라서. 한민당에는 유능한 간부들이 많지만 전술전략을 이끄는 능력뿐, 이념의 깃발을 짊어질 지도자가 없습니다. 두 당 모두 한독당과의 통합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실제 합당에는 현실적 문제들이 있지요. 아까도 말한 것처럼 간부들의 거취가 제일 어려운 문제입니다. 통합된 정당이 한독당 영도자들의 영도를 받으려면 정당 운영에도 한독당 요원들이 앞장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3개당의 지도자와 간부들이 모두 한두 등급 낮은 역할을 감수하거나 아예 간부진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본인들에게는 모두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운영 참여가 줄어들면 각자의 노선도 지켜나가기 힘들게 되지요.
국민당은 이념이 분명하기 때문에 현실적 문제에 구애받는 정도가 덜합니다. 이익과 출세를 위해 모인 것이 아니니까 통합된 힘으로 우리의 이념 실현이 촉진된다면 작은 손해를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두 당은 우리보다 결단이 힘들지요.
신한민족당은 국민당의 뒤를 따를 것이 분명합니다. 합당 아니고는 존립 기반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많으니까요. 한민당의 결단이 더 힘들 겁니다. 버려야 할 것이 더 많으니까요. 그러나 다른 3개당의 통합 움직임이 한민당의 결단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김기협: 미소공위의 개막도 우파 정당 통합의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협의상대’ 결정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미군정 고위층에서는 민주의원이 협의상대로 채택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남조선국민대표’라는 간판을 붙여 놓았지만,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대표성이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 아닙니까? 민주의원만으로는 미소공위 참여에 한계가 있으므로 정당 통합을 통해 우익의 참여 자세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미소공위에 대한 한독당 수뇌부와 국민당의 입장에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국민당은 1월에 불발된 4당 코뮈니케에서 “신탁통치는 반대하지만 3상회의 결정 전반에 대해서는 지지한다”는 입장을 인정했습니다. 미소공위의 임시과도정부 기획에 참여하면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는 다음 단계의 일로 미뤄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김구 선생 이하 한독당 지도부는 3상회의 결정 자체를 반대하고 미소공위를 보이콧하려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은 당장 통합된 당의 노선 결정에 대단히 중대한 문제 아닙니까?
안재홍: 작년 말 3상회의 결정에 처음 접했을 때 나도 분노 속에서 그 결정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연합국의 힘으로 해방된 우리로서 연합국의 결정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고, 또 3상회의 결정이 신탁통치를 확정한 것도 아닌 만큼 이 현실 속에서 신탁통치가 실현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미소공위에 적극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한편 신탁통치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는 미소공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도 그른 것은 아닙니다. 나는 통합된 한독당이 미소공위에 참여하는 쪽으로 의견을 내겠지만 참여를 거부하는 쪽으로 당이 결정할 경우 그 결정에 따를 것입니다.
김기협: 선생님은 민족주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 이 나라의 독립을 향한 가장 순조로운 길이라 생각하고 누구보다도 김구 선생과 이승만 박사 두 분에게 민족주의 영도력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귀국 후 몇 달 동안 두 분의 영도력이 적지 않은 손상을 입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3상회의 결정이 전해지자 반탁 여론을 등에 업고 군정청에 대항하는 ‘국자’ 조치를 취했다가 하루 만에 거둬들여 체통을 잃었습니다. 현실을 무시한 조치였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죠. 지금 김구 선생이 3상회의 결정 전면 반대를 내세우고 있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게 여기는 것도 그 경험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반대로 이승만 박사는 현실을 너무 중시하는 것이 병폐일까요? 현실적 힘을 가진 사람들을 너무 가까이해서 친일파를 비호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더니, 광산권 문제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고 민주의원 의장에서 물러났습니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 박사의 능력은 믿을지언정 그의 도덕성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게끔 되었습니다.
이렇게 영도력이 손상된 분들에게 선생님은 아직도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안재홍: 안타까운 일이 많았습니다. 두 분은 서로 다른 측면에서 약점을 드러냈습니다. 그래도 두 분의 영도력을 대신할 만한 지도자는 따로 없습니다. 나는 두 분이 서로의 약점을 덮어주면서 장점이 잘 살아나도록 함께 협력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연말 이래 두 분의 협력관계가 잘 이뤄지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반가운 일입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김구 선생이 형 노릇을 하고 이승만 박사가 아우 노릇을 하면 좋을 텐데... 김구 선생의 우직함이 체(體)가 되고 이승만 박사의 꾀가 용(用)이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배합 아니겠습니까? 두 분의 생일을 서로 바꿀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해방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46. 4. 5 / 미국 국가주의의 전초병 이승만과 굿펠로우 (0) | 2011.04.04 |
---|---|
1946. 4. 4 / 이승만보다도 팔자가 좋았던 비서실장 (2) | 2011.04.03 |
1946. 3. 31 / 궤도에 올라선 미소공동위원회 (2) | 2011.03.30 |
1946. 3. 29 / 좌익의 제3세력으로 등장한 신민당 (10) | 2011.03.28 |
1946. 3. 28 / 새 국가 건설에서 예술의 역할 (4) | 2011.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