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조선 민족운동의 초기 지도자 중 박용만(1881-1928)과 안창호(1878-1938)이 먼저 세상을 떠나 이승만(1875-1965) 혼자 해방을 맞았다. 그래서 미국의 다른 민족운동가들에 비해 이승만의 지명도가 높기는 했지만 그가 미국의 민족운동을 대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많은 반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 박용만이 암살당하고 1932년 안창호가 체포될 무렵 이승만 역시 지도자의 위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지지자들의 후원으로 운영하던 동지식산회사의 1929년 파산이 결정적 계기였다. 1930년대에는 제1세대 지도자들이 사라지거나 지도력을 잃은 공백 속에서 다음 세대 지도자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차세대 지도자들은 대개 ‘신도인(新渡人, 새로 건너온 사람)’이었다. 초기 이주자의 2세들은 대개 미국화되어 있어서 민족운동에 호응은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별로 없었다. 1910년대 이후의 이주자로 활동력과 경제력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민족운동의 중추부를 이뤘다. 그러나 그들에게 초기 지도자들 같은 카리스마는 없었다.


차세대 지도자의 한 사람인 김용중(1898-1954)은 ‘조선사정소개협회’를 만들어 조선 문제를 미국 언론에 부각시키는 작업에 진력했다. 미국 언론이 그의 홍보 사업에 상당한 호응을 보인 것은 그의 논설에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월 5일 그의 발언에서도 흥미로운 관점이 보인다. (귀암 김용중 기념사업회 홈페이지가 최근 개설되었다. (http://www.voiceofkorea.or.kr/index.html) 앞으로 자료가 갖춰지면 1930~40년대 재미동포 사회의 민족운동을 살펴보는 좋은 시각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워싱턴 5일 모리스·해리스AP특파원 발 합동] 당지 조선사정소개협회 회장 金龍中은 기자단에게 조선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소의 조선 공동점령은 선의의 원조 목적이 본의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원조가 아니요, 지배가 되고 말았다. 현재 서울서 개최중인 미소공동위원회가 만일 조선의 원하는 바를 실행치 못하고 미소 각 대표 측이 화부나 막사과에서 요구하는 바를 실행할 것 같으면 이 회의는 불성공에 돌아가고 말 것이다.

조선 문제는 본질적으로 조선인에 의하여 해결될 것인데 미소 양국이 자진하여 조선의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려고 함에 의하여 미소 양국뿐이 아니라 각 관련국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미소 양국은 자진하여 자국에 부과된 중책으로 인하여 곤란한 경지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가 양국의 중책인 만치 만약 양국이 이에 대한 책임을 이행치 못한다면 조선 문제에 대한 책임은 필경 UNO가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소는 당초에는 조선의 원조자이었으나 현재는 조선의 주인의 행위를 하고 있다. 또 조선은 2국의 분쟁의 요소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을 방지하는 데는 책임 양국의 정치적 수완 여하에 달린 것이다. 미소 양국의 화합은 조선의 화합을 의미하고 반면 미소의 알력은 조선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소는 친선적 태도로 조선을 원조하려 하였던 것이나 조선을 재건설하는 데 있어서 자기네들 각자의 이념으로 하고 있다. 상위한 이념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직 혼란만을 초래할 것이다. 사실상 조선 문제는 미소공동위원이 다만 조선의 권리를 존중한다면 용이하게 해결될 문제이다.

(...) 예약된 독립은 조선에 수여되어야 할 것이고 조선을 해방함은 미소가 미묘한 상호책임 관계에서 해방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조선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침은 조선의 군사점령을 중지하는 데 있으며 만약 이것이 실행된다면 미소 양국은 성스러운 목적을 달할 것이며 전 세계의 유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전례를 만들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04월 06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이 발언의 흥미로운 점은 조선 문제의 책임을 미-소 두 나라에 직접 묻고 있다는 것이다. 입장은 조선인의 입장이지만 관찰의 위치가 조선 밖이기 때문에 이런 관점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안에 있는 관찰자에게는 조선 안의 문제들이 먼저 보이게 되어 있다. 점령을 왜 하는 것인가 하는 더 근본적 문제는 밖에 있는 관찰자에게 더 잘 보였을 것이다.


점령은 조선인을 위한 것이었는가? 손해를 봐 가면서 해주는 점령을 한 나라가 몽땅 해주기가 너무 벅차서 두 나라가 부담을 나눠 가지기 위한 분할 점령이었는가? 점령군 사령관의 포고문들은 그렇게 생색을 내고 있었다. 조선인의 행복을 위해 자기네 손익을 돌아보지 않고 점령하러 와줬다는 것이었다.


사실에 있어서 두 나라 모두 점령을 ‘의무’가 아니라 ‘권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단독 점령을 못하는 것이 피차 아쉬웠고, 상대방에게 단독 점령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할 점령이 된 것이었다. 조선은 두 나라가 서로 챙기고 싶어 하는 ‘전리품’의 하나였다.


물론 벌거벗은 국가이기주의가 분할 점령 사태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세계평화’라는 이념의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 이념도 이타적인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경우 국제주의(다변주의) 노선이 추구한 이 이념은 국가주의(일방주의)의 적나라한 이기주의에 비해 보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익을 추구한다는 것이지, 국익을 도외시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해방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적 대립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이전에 국제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의 대립이었다. 추축국을 상대로 한 전쟁 중에는 연합국 사이에 국제주의 기조가 유지되었다. 전쟁이 끝나 국제 협력의 필요성이 완화되면서 국가주의가 고개를 든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홉스봄은 냉전의 주축인 두 나라가 각자의 진영을 장악하는 데 만족하고 실제로 3차 대전을 불사하는 자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고 냉전이 끝난 시점에서 되돌아본다. 다만 냉전 ‘체제’가 아직 완전히 안정되지 못한 단계에서는 상당히 큰 위험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너무 얇은 얼음 위에서 너무 오래 스케이팅을 할 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우발성 사고의 위험을 제외하고, 이 기나긴 긴장의 시기 동안 세계대전의 진정한 위험성이 존재했을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가장 폭발성이 강한 시기는 아마 1947년 3월 ‘트루먼 선언’의 공식 발표로부터 1951년 4월 한국전쟁의 미군 사령관으로서 군사적 야욕을 지나치게 앞세웠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을 트루먼이 해임하기까지의 기간이었을 것이다. 소련의 지배를 받지 않는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의 사회 붕괴 또는 혁명에 대한 미국인들의 두려움이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던 기간이었다. 결국 중국은 1949년에 공산주의자들 손에 떨어지지 않았던가.

한편 소련은 핵무기를 독점 보유한 미국으로부터 호전적이고 위협적인 반공 선언이 늘어나는 상황에 직면해 있는 가운데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이탈(1948)로 공산진영의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게다가 1949년 이후 중국을 장악한 공산정권은 한국전쟁에 전력으로 뛰어들 뿐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 정부와도 달리) 핵 공격을 포함한 전쟁까지도 실제로 겪어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The Age of Extremes> 228-229쪽)


홉스봄이 지적한 ‘폭발적 시기’는 1947년 3월 트루먼 선언으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트루먼 선언은 미국에서 국가주의의 승리를 확인하는 선언이었다. 독일과 일본의 항복 후 국제주의로부터 국가주의로 돌아서는 추세는 소련에도 있었다. 냉전은 미-소 두 나라의 국가주의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변화 단계에서 소련은 더 큰 힘을 가진 미국과의 정면 대결을 늦추기 위해 전략 차원에서 국제주의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국가주의 전환이 냉전 체제의 구축을 이끌어낸 것이었다.


해방 조선의 미소공위는 소련의 국제주의와 미국의 국가주의가 부딪친 현장이었다. 소련 측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미-소 간 협력체제가 미소공위에서 지켜지도록 애쓰는 반면 미국 측은 회담이 결렬되어도 괜찮다는 배짱으로 소련 측 양보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4월 6일 남한 단독정부 추진설이 처음으로 언론에 나타났다.


[상항 6일 AP발 합동] 당지 정보에 의하면 현재 조선 서울에서 개최중인 미소공동위원에서 남북통일의 조선자치정부 수립이 졸연히 해결되지 아니하며 미 점령군 당국은 남조선 안에 한하여 조선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미 국무당국은 이 정보에 대하여 의외의 감을 표시하고 우안은 미소공동위원회 미 대표위원이 제의한 바가 아니요, 미군정 당국이 제의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미 대표위원의 독단적 행동을 원치 아니한다 하며 조선의 미군정 당국은 남조선정부 수립 계획에 있어서 미국인은 자문격으로 참여하여 전면적으로 지도하고 조선 문제는 조선인에게 일임되리라 한다. 또 일부 정보에 의하면 민주의원 의장을 사임한 李承晩은 재차 출마하여 남조선정부의 주석이 되리라 하며 남조선정부 수립안을 미 측이 제의한 중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소련 측이 정치적 이유로 미소공동위원을 천연시키려고 하는 것

2) 미군의 복원계획에 의하여 조선 미군정 당국의 미군 장교급이 축차 귀국하여 기수가 희소하여지는 것

(<서울신문> 1946년 04월 07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러치 군정장관이 당일 중에, 그리고 미 국무성이 이튿날 이 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 연기를 피운 것이 누구였을까? 이승만과 결탁된 인물로 하지의 정치고문이던 굿펠로우가 5월 하순 한국을 떠나면서 “미소공위가 조속히 재개되지 않을 경우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 구성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며칠 후인 6월 3일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같은 것을 수립할 것”을 제기하는 ‘정읍 발언’을 터뜨렸다.


1차 미소공위는 5월 8일 끝나고 무기한 정회에 들어갔다. 굿펠로우와 이승만이 4월 초순 시점에서 미소공위가 성공하고 단독정부가 필요 없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을까? 아니면 단독정부 추진의 걸림돌인 미소공위의 실패를 바라고 있었을까? 정용욱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굿펠로와 이승만의 단정 발언은 당시 새로운 정책 변화를 모색하던 미국에 대해 그들 나름의 해석과 희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는 미국의 새로운 구상을 자신들의 행동계획과 일체화시키려는 이승만의 선제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승만과 굿펠로가 이전의 약속을 들먹여 가며 하지에게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축구하였다는 것은 미군정의 구상이 남한만의 정부수립도 배제하지 않았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들의 주장은 민주의원 설치 과정에서 드러난 미군정과 이승만의 내밀한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다지 무리도 아니었다. 이승만과 굿펠로의 발언은 자신들의 정략적 이해관계가 많이 반영되어 있지만 부분적으로 미군정의 과도정부 구상이 처음 제기되던 시점의 의도와 발상법을 반영했다. 또 미군정 일각의 구상은 과도정부 구상이 단순히 과도적 단계의 조치에 그치지 않았고, 단독정부안과도 완전히 절연되지 않은 상태였음을 암시한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117-118쪽)


미국이 국가주의로 기울고 그에 따라 세계가 냉전 체제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추세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946년 봄의 상황은 아직 미국의 국가주의가 지배적 위치에 올라서기 전이었다. 국제주의 원리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거쳐 미소공위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맥아더 이하 미국의 국가주의자들은 국제주의 원리를 폐기하고 싶어도 아직 명분이 부족했다. 이승만은 그 명분을 채워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짓을 다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