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이 UP통신 호이트 기자가 서면으로 보내온 질문에 27일 답변을 보냈다. 미소공위 개최 시점에서 공산당, 특히 박헌영 일파의 입장과 자세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문답이다.


1. 미군정 하의 공산당원 수 여하? 또 북조선에는?

- 약 3만 명이며 북조선의 것은 북조선공산당에 문의할 것.


2. 조선공산당은 일본공산당과 직접 연락이 있는가? 또 소련공산당과 무슨 연락이 있는가?

- 조선당이나 일본당이나 모두 해방 후 합법당으로써 나오게 되었으니, 상호 연락관계를 맺을 만한 처지와 시간을 갖지 못하였다. 소련공산당은 반세기 간이나 자라난 위대한 당이다. 그런데 우리 당은 아직 발전이 적고 경험도 적어 연락할 정도에 달하지 못한 형편이다.


3. 중국공산당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 관계를 가질 만한 정도로 자라지 못하였다.


4. 공산당은 민주의원에 가입하려는 관심을 갖고 있는가?

- 민주의원은 비민주주의자로 구성된 반민주적 조직인데, 의장 이승만 씨의 사직 소동으로 그 내부가 붕괴의 운명을 면치 못할 형편으로, 이 의장 시대에는 미군정의 자문기관이라고 하더니, 김규식 씨가 주관하면서부터는 자문기관이 아니라고 성명하니, 도대체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우리 당에서는 이러한 반민주적 조직에는 가입치 않는다.


5. 이승만 박사의 민주의원 사임에 관한 감상은?

- 친일파를 옹호하는 무원칙한 통일을 주장하고, 노동자 농민을 근거 없이 중상하고, 반공 반소 반민주적 연설을 방송하고, 3상희의 결정을 반대하는 외 기타 여러 가지로 반인민적 친파쇼적 반동 정치가. 이같은 시대에 뒤진 완고 반동 정치가를 조선 인민들이 원치 않을 것이며, 박사도 결국 이 명백성에 눈을 감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6. 김구 씨의 임시정부는 어찌 되었느냐? 조선서 이것이 아직도 힘 있는 세력인가? 김구 씨는 유력한가?

- 김구 씨 정부는 반일투쟁에 참가하였다거나, 조선인민과 연락이 있었던 것도 아니므로 조선인민 속에 토대를 가지지 못하였다. 김구 씨의 임시정부가 이렇게 된 것은 보수적 반민주주의자들로써 지도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7. 김규식 씨는 민주주의적 지도자이냐, 반동적 지도자이냐?

- 그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8. 조선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조직되는 때에 그 대통령으로 김일성을 지지하겠는가?

- 씨는 전시에 항일 빨치산 지도자로 민족적 영웅이다. 우리 당에서는 인민과 함께 지지한다.


9. 조선공산당은 어떤 종류의 공산주의 철학을 따르느냐? 맑스주의냐? 트로츠키주의냐? 스탈린주의냐?

- 질문 내용이 알 수 없고 혼동을 일으켰다. 우리 철학은 당 강령에 명시되어 있으니 이것을 연구하면 알 수 있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305-306쪽에서 재인용. 9번 문답은 <자유신문> 1946년 3월 28일자에서)


질문 1의 답변에서 공산당 북조선총국을 ‘북조선공산당’이라 부른 것이 눈길을 끈다. 번역 과정에서 나온 실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당원 수를 그쪽에 직접 물어보라고 한 것을 보면 박헌영조차 이 시점에 와서는 북조선총국을 별개의 정당으로 인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쓴웃음을 금할 수 없다.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북조선총국을 거느리고 있는 조선공산당 총비서 입장에서 당원 수를 대신 말해줄 수 없다니. 당시 북조선에서는 임시인민위원회 수립과 토지개혁 실시를 계기로 공산당원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대신 대답을 회피한 데서 그의 국량 크기가 느껴진다.


질문 2, 3에 대해 인접국 공산당과의 관계가 없음을 밝혔는데, 소련공산당과의 관계는 있더라도 비밀로 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런데 일본-중국 공산당과 이 단계까지 연락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이고, 이 사실에 박헌영의 전위당 노선이 비쳐 보이는 것 같다.


당시 일본 공산당은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다가 1월에 귀국한 노사카 산조(野坂參三)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사랑받는 공산당’을 제창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대중당 노선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이북의 공산당도 중국공산당과 접점을 가진 독립동맹과 협력하면서 대중당 노선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홀로 대중당 추세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질문 5~7에 대해 공산당 외의 지도자들을 깎아내린 것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일인데, 김규식에 대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한 것은 너무 무성의한 답변이다. 구두 인터뷰도 아니고 서면 문답인데. 민주주의자도 아니고 반동분자도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그냥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을 모욕적으로 표시한 것일 뿐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김규식이 좌우합작에서 맡을 역할에 대한 기대감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대답이었다. 한민당과 박헌영이 좌우 양쪽에서 좌우합작을 기피하는 태도를 공유했다는 것은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는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박헌영은 조선 좌익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의 지도력은 조직력에 근거한 전술-전략적 우위일 뿐이며 이념-철학 방면은 취약하다는 인상을 UP통신과의 문답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불확실성이 큰 상황은 확실한 지도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과연 당시의 조선 좌익에는 보다 생산적인 지도력을 제공할 대안이 없었던 것일까?


좌익의 거물로 박헌영 외에 여운형이 있었다. 한 개인으로서는 여운형이 더 큰 신망과 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박헌영과 같은 조직력이 없었고, 해방 직후부터 전면에 나선 까닭으로 여러 방면에서 집중 견제를 받아 수세에 몰려 있었다. 좌익 안에서 박헌영이 여운형을 압박해 우세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북에서 1945년 말까지 조직력을 가진 국내파가 김일성 일파에 맞서고 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좌익의 이런 상황에 등장한 제3세력이 독립동맹이었다. 이북에서는 독립동맹의 등장이 국내파를 누르고 김일성 일파의 주도권 확립에 도움을 주었다. 독립동맹을 기반으로 한 신민당의 경성특별위원회가 이남에서 비슷한 역할을 맡기 위해 나섰다.


신민당 경성특별위원회 위원장 백남운(1894-1979)이 3월 29일 기자회견에서 토지개혁과 식량대책에 관한 견해를 발표했다. 토지개혁은 당시 조선의 가장 큰 과제였고, 식량대책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조선의 가장 뛰어난 공산주의 이론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던 인물이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식량대책에 관한 백남운의 견해에는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한민당이 주장하는 가격 자유화가 일시적으로는 문제를 완화하는 것처럼 보여도 궁극적으로는 양곡 매점 현상을 더 격화시키는 길임을 지적했다. 한민당의 절대적 자유시장론에 대한 경제학자로서의 본격적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군정청 관리와 경찰에만 미곡 수집 업무를 맡기지 말고 정당, 농민조합, 협동조합 등 사회단체로 구성된 전인민의 총의를 대표하는 식량긴급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수집령 발동의 권한을 부여할 것을 제의했다. 권력자의 정책 집행권 독점이 가지는 실효성의 한계를 지적하며 민간의 자발적 역량을 강조한 것이다.


토지개혁에 관해서는 11개항의 논점을 제시했는데, 그중 제3, 5항에서 일본인 지주만이 아니라 조선인 지주의 농지도 무상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조선 토지문제는 일본인 소유 토지만 해결한다면 토지문제의 대부분이 해결되는 것으로 속단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문제의 중점은 차라리 조선인 지주 소유 토지의 처분방법 여하에 농민의 운명이 달렸고 그것이 실로 민주경제의 지반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일본인 소유 토지 40만 정보는 총 경지면적 450만 정보의 약 1할에 불과하고 조선인 지주 소유 토지 260여만 정보는 그 총경지의 5할 8푼 이상을 점령하고 있는 사실로 보아 분명하다.

5) 15만 6천여 명 되는 대, 중, 소지주가 2백 2만 정보를 소유하고 있는데 만일에 10 정보 이상의 지주만 가려 본다면 4만 7천여 명에 불과한 대, 중지주의 소유 토지 108만 정보에 대한 처리방법이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을 유상국유로 한다면 건국초의 신국가가 적어도 80억 원 이상의 국채를 부담할 것이며 재정대책에 치명상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무상몰수 이외의 국유제는 지주를 반민주적 산업자본가로 전화시킬 뿐이고 민주경제 확립에 대한 새로운 지장이 될 것을 언명한다.

(<동아일보> 1946년 03월 29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일본인 소유 농지가 1할에 불과하다면 그것만으로는 효과 있는 개혁을 바라기 어렵다. 그런데 황한식, “미군정하 농업과 토지개혁정책”(<해방전후사의 인식 2> 소수)의 300쪽 표10 ‘민족별 토지소유면적별 농가호수’에는 1945년 조선 남반부 농지 중 외국인 소유가 18.1%에 이르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일본인 소유 토지의 비율이 높았다면 민족 모순에 치중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계급 모순에 치중해야 할 상황이었다. 앞으로 더 면밀히 검토하겠다.


지주 토지의 유상매입이 “반민주적 산업자본가”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백남운의 주장이 보수주의자인 내게는 납득되지 않는다. 메이지유신 때 국채로 보상받은 지주층이 산업자본가로 전화한 것이 우파 토지개혁론자들의 모델이었다. 백남운이 모든 산업자본가를 반민주적 존재로 본 것인지, 당시 조선 지주들의 성향에 대해 특별한 우려가 있었던 것인지 기회 있는 대로 살펴봐야겠다.


맨 끝의 제11항에서 당시 진행 중이던 북조선 토지개혁에 부분적 비판을 가한 점이 주목된다. 부분적 비판이라 하지만, 현실적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폭넓은 비판이었다. 특히 시행 시기에 대해 백남운이 민족국가 수립 후를 주장한 것은 공산주의보다 민족주의에 치우친 인상을 준다.


11) 북조선 토지개혁안은 원칙적으로 찬동이나 기술적 조치 방법에 있어서 고려를 요할 점이 있다. 즉 경제정책 일반이 상호연관성을 가진 것인즉 기 시행시기와 경작능력 있는 토지소유자의 생활보장 문제 등이며 남조선에서는 용인할 최소한도 면적도 북조선과는 좀 달리 고려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