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떴다 봐라 안창남, 굽어보면 엄복동!”


민족의식이 고양된 1920년대 초 비행사 안창남과 사이클리스트 엄복동은 조선 대중의 영웅이었다. 엄복동(1892-1951)은 자전거포 점원으로 일하다가 1913년 일본인들의 잔치이던 전조선자전거경기대회에서 우승하고 3-1운동이 탄압받은 직후인 1922년 대회에서 다시 우승, 조선 민중의 패배의식 극복에 일조했다.


안창남(1900-1930)은 1921년 일본의 첫 민간인 비행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두 사람의 하나로서 일본에서 우편비행에 종사하다가 1922년 12월 일시 귀국하여 여의도 백사장에서 시범 비행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첨단 분야인 항공계에서 조선인의 당당한 성공이 온 민족의 자랑거리가 된 것이다.


안창남이 ‘조선 최초의 비행사’였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1920년에 미국의 독립운동가 몇 사람이 비행학교를 수료하고 캘리포니아에 비행사 양성소를 만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창남이 ‘프로페셔널 파일럿’으로서 조선 대중의 마음을 뒤흔든 것과는 비교할 일이 아니다. 안창남은 관동대지진(1923) 후 귀국했다가 이듬해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 관련 활동을 하다가 1930년 비행 사고로 죽었다. 그의 중국 망명은 여운형이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창남과 정반대의 길을 걸은 또 한 명의 비행사가 있었다. 1925년 비행기 면허를 취득한 신용욱(1901-1961)은 1927년 모국방문 비행대회 이후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항공사업에 매진했다. 그가 1936년에 세운 신(愼)항공사업사를 대한항공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1941년 조선항공사업사로 개칭한 신항공사업사를 모체로 1944년에 자본금 1천만 원의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새 회사 주식 20만 주 중 전시금융금고가 10만 주, 조선식산은행과 신용욱이 각 3만4천 주, 동양척식이 1만9천 주, 방응모와 김연수가 2천 주, 민규식과 고원훈이 1천 주를 불입했다고 한다. (<친일인명사전> “신용욱”)


가장 두드러진 친일파의 한 사람인 신용욱이 해방 후 조선항공을 장악하게 된다. 주식의 76.5%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 기관들이 비운 자리를 17% 주주이던 신용욱이 넘겨받은 것이다.


군정청 운수국장 코넬슨 중좌의 11일 발표를 보면 이번에 민간회사로 재단법인 국립조선항공회사가 조직되었다 한다. 사장은 尹致暎, 부사장 겸 상무취체역에 愼鏞頊으로 결정되었다는데 미국제 비행기로 여객과 화물을 수송한다. 준비만 되면 두 달 안에 업무를 시작할 것이며 미국항공회사에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군정청 운수국장 코넬슨 중좌와 쾨크 대위는 이 회사를 미국항공회사와 같은 수준에 올린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으며 처음 계획으로 서울-강릉 간, 서울-대전-군산-광주-제주도 간, 서울-대전-대구-부산으로 3선을 개척하여 결국은 이 회사가 동경, 마리나, 상해 등 국제항공로와도 연락하고자 한다.

(<조선일보> 1946년 02월 12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이승만의 비서 윤치영을 앞장세워 미군정을 구워삶은 것이다. 그런데 너무 심하게 구워삶았는지, 군정청이 오버를 하는 바람에 물의를 일으키게 되었다. 신용욱의 비리를 감시하는 입장에 있던 조선항공협회의 해산 명령을 군정청이 내리자 협회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진정서를 군정청에 제출한 것이다. 항공협회는 1945년 10월 초순 항공사업 관계자들이 공익을 위해 결성한 비영리단체였다. 성명서는 이런 내용이었다.


본협회를 해산시키는 이유를 명백히 할 것.

민주단체요 문화기술단체인 항공협회가 조선에서만 불필요한가, 그 가부를 검토하고 이에 대책을 세울 것.

愼鏞頊과 尹致暎은 그들이 범한 죄상을 사과 개전하고 장래 조선을 위하여 항공계에서 인퇴시킬 것.

愼 군과 尹 군만을 타도하려는 협소한 목적이 아니고 동류의 행위와 불순한 의욕을 가진 자는 단연 제외 청산할 결의를 표명한 것.

영리단체인 대한국제항공사와는 하등의 경쟁 또는 이해관계가 없다.

항공은 국가와 국민 전부의 복리를 위한 공공기관이 되어야 하며 만약 개인 또는 일부의 이용물이 되어서는 사회에 해독을 끼칠 것을 강조한 것.

(<동아일보> 1946년 04월 1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진정서에서는 협회 해산 책동의 주체로 신용욱과 윤치영을 지목하고 해방 전 신용욱의 민족반역자와 전쟁협력자로서 행각을 서술해 그가 조선 항공사업계의 암적 존재임을 밝혔다. 해방 후의 일을 적은 진정서 뒷부분만 옮겨놓는다.


<8·15 이후의 愼 군과 尹 군의 비행>

愼 군은 해방 직후 일시 도망하여 잠재하였다가 연합군이 서울에 진주하는 9월 상순경에 이면공작을 시작하고 영어가 능하고 정치배경을 가진 尹致暎 군을 매수하여 대한국제항공사에 대표 명의를 세우고 모 혁명가의 영식을 총무부장 지위에 이용하여 愼 군은 항공부장이라는 새 가면을 쓰고 과거 왜정 시에 쓰던 간계와 야욕책을 반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한국제항공사는 기시 실질에 있어 인재도 기재도 없었으며 다만 조선 항공건설에 진력하겠다는 의지는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과거 신(愼)회사에서 근무하던 2·30명의 종업원은 해방 후 전부 조선항공협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기후 愼 군은 종업원을 매수하려 부하를 시키어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10월 10일경에 항공과장대리와 협회 측 수 명과 愼 군과 여의도비행장 기재를 시찰하러 갔을 때 정비하면 사용가능한 기재인데도 불구하고 협회 측의 정비사용 주장에 대하여 愼 군은 ‘노굳·노굳’이라는 한마디의 영어로 파괴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는 흉계가 있었던 것이다. 곧 정비하려면 愼 군에게는 인재가 없는 관계상 착수치 못하여 허위가 폭로됨을 두려워한 것이며 한편 파철로 만들어 폭리를 남기려는 심저이었다.

이러는 이면에는 愼 군은 과거 전조선항공은 자기가 경영하였다고 과장하고 사망자를 열거한 허위의 인명부와 항공수송계획서를 항공과장에게 제출하고 일방 미인 항공과장에게 모든 간책과 비합리적 수단을 써서 본 협회를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이 의지를 전달하고 옹호하고 선전하여 동포를 중상시킨 책임자는 통역인 李承萬 박사의 비서인 尹致暎 군이다. 尹 군은 李 박사의 명예와 尹 군 자신이 민주의원의 비서장인 명예를 생각하여도 신중한 태도를 취함이 당연할 것인데 경거망동하고 다니는 것은 참으로 본 협회에서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참으로 유감하다고 말하고 있다. 본 협회에서 동 항공과장의 허가로 비행장에 출입하는 것도 이유 없이 정지당한 후 본협회에서 출입치 못하는 사이에 愼 군은 수 명의 사원을 데리고 여의도비행장을 정비한다고 하고 비행기를 파괴하고 알루미늄 뭉치와 파철을 불하맡아서 상인들에게 막대한 폭리로써 매각하는 등 건국도상에서 용서할 수 없는 이상과 같은 그 간의 동정을 본 협회에서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尹致暎 군의 비인도적 파렴치행위>

1946년 2월 6일 尹 군과 愼 군은 이유 없이 본 협회 분관을 尹 군 자신이 수색하였으며 익 2월 7일에는 본 협회의 중요간부이며 우리 항공계의 선배인 張德昌 씨가 8·15 이전부터 거주하시던 주택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尹 군 자신으로 가택수사를 하며 심지어 張 씨 부인의 핸드백까지 탐색하고 尹 군이 張 씨 가족을 우 주택으로부터 엄동설한에 축출케 하여 노상에 방황하게 한 비인도적 행위를 감행하였다.

1946년 2월 상순에는 항공과에서 본 협회 인가신청서를 제출하라 하여 본 협회장이 출두하여 서류를 제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년 2월 16일경 항공과에서는 아무 이유 없이 본 협회가 종래부터 사용하던 사무소와 기재를 압수하며 금년 2월 19일엔 항공과장으로부터 본 협회를 해산하라는 도저히 민주주의국가에서 이해가 곤란한 명령이 내렸다.


<본 협회와 尹·愼 양군과의 관계>

본 협회에서 이상과 같은 사실에 비추어 愼 군의 개전을 누차 권유하였으나 갈수록 그의 사악한 행위는 가중하여 갈 뿐 아니라 조선의 건실한 항공계의 장래 발전을 괴손하고 있으므로 그의 반성 개전이 있을 때까지 본 협회에서 제명을 하였으며 또 尹 군은 항공과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일 뿐더러 불순한 이욕을 가지고 무뢰한적 존재인 愼 군과 협력하고 있으므로 이도 또한 순정한 항공인과의 협력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제반 경위를 명철하시고 공평하신 각하께옵서는 냉철히 판단하시와 선위선처하여 주시옵기 바라며 자에 진정하는 바이다.

1946년 3월 7일 朝鮮航空協會

(<서울신문> 1946년 04월 03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이에 대해 신용욱과 윤치영은 이렇게 변명했다.


“대한국제항공사는 내가 20여년이나 개인으로 경영해 오던 조선항공사업사를 이번에 명칭을 고치고 윤치영 씨를 사장에 내세워 전력을 조선의 항공사업에 바치려고 한 것인데 협회의 태도는 나를 중상하며 또 사업을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파괴한 비행기의 알미늄과 파철로 폭리를 취했다 하나 이도 부당한 말이다. 광공국에서는 알미늄 1톤에 6천 원을 말했으나 나는 그것을 3천 원에 사서 팔았을 뿐이다.” (<조선일보> 1946년 04월 06일자)


“조선항공사업사는 군정청 지시와 아 항공기술자의 총의에 의하여 중임을 응락하고 대한국제항공사라 개칭하였다. 그런데 자가의 세력을 부식하고자 전연 무근한 사실을 날조하여 친일이니 모리니 하는 그들의 모략적 중상도 현명하신 애국동포에게는 마이동풍이며 도리어 빈축을 사게 되리니 구태여 반박할 필요조차 없다.” (<동아일보> 1946년 04월 11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신용욱은 그 후 1948년 10월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4월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자유당 소속으로 1950년에서 1958년까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4-19혁명 후 부정축재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5-16 직후 행방불명되었다가 8월 26일 여의도비행장 부근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고, 경영난을 비관한 자살로 추정되었다. KNA는 이듬해(1962) 정부 출자에 의해 대한항공공사로 전환되었다가 1969년 한진그룹에 불하되었다.


윤치호(1866-1945)의 사촌동생이며 윤보선(1897-1990)의 손아래 숙부인 윤치영(1898-1996)은 신용욱보다 훨씬 널리 행적이 알려져 있는 인물인데, 그 약력을 <친일인명사전>에서 간단히 뽑아놓는다.


1915-1922 일본 유학(와세다대학 법과 졸업).

1922-1935 미국 유학(아메리칸대학 국제법 석사, 동지회 활동).

1938년 5월에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 9월에 기소유예로 석방.

1940-1945 전쟁협력 활동.

1945년 10월부터 이승만 비서실장.

1948년 5월 이후 제헌의원, 초대 내무부장관, 국회부의장, 국회의원 등.

1961년 5월 이후 군사정권 참여, 공화당 의장, 서울특별시장, 국회의원 등.

1982년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건국포장 받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