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은 <한국현대사산책 1>에서 해방 직후 조선 사회에서 “둑이 무너진” 현상을 거듭거듭 묘사했다.(156-181쪽) “언론의 둑”, “출판의 둑”, “문화의 둑”... 문화계의 제방 붕괴 현상을 가리킨 것이다.


사실 둑이 무너진 것은 문화 현상만이 아니었다. 정치에도 과열 현상이 있었고, 경제에도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사회 질서도 상상 못했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일본의 군국주의 식민 지배가 억압체제이기는 했지만, 엄연한 하나의 체제(regime)였다. 이 체제의 대안을 미군정은 제공하지 않았다.


미군정 당국자들이 생각하는 ‘질서’란 혼란을 힘으로 억누르는 소극적 개념에 그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민의 요구가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이끄는 적극적 개념의 ‘질서’를 그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치가가 아닌 군인들이었으니까.


일본인의 억압체제에 눌려 있던 온갖 욕구가 해방을 계기로 터져 나왔다. 38선 이북에서는 소련군의 협조와 지원 아래 인민위원회 체제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이 욕구도 정비되어 갔다. 반면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힘에만 의존하는 식민지 억압체제의 틀을 지키면서 실질적 효율성은 시원치 않았기 때문에 인민의 욕구가 효과적으로 통제될 수 없었다. 경찰, MP, 관리 등 군정청 측은 사회 전체와 유리된 존재이므로 그들이 힘으로 막지 못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3월 28일 문화계 8개 단체가 군정청에 제출한 건의서에서 이 분위기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서울 시내 극장 관리권을 문화인들에게 맡겨달라는 건의서다.


서울 시내에 있는 전 일본인 소유 10군데 극장을 새로이 대여 입찰을 한다는 경기도 적산관리과의 발표는 각 방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어 앞으로 조선의 극장예술을 길러 나아갈 중요한 문화재를 순전히 상품적인 입장에서 처리를 하는 것은 조선예술의 돋아나는 순을 꺾어버리는 일이라고 특히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 무대예술 부문으로부터 당국에 건의를 하여 한시바삐 잘못된 시책을 수정하도록 진정을 하기로 되었었는데 마침내 28일 연극동맹, 조선무용가 일동, 영화동맹, 조선음악가협회, 가극동맹, 국악원, 문학동맹, 미술가동맹 등 8단체 대표가 군정청에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건의를 한 요점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극장예술의 발전을 위하여: 세계의 어느 연극사를 들쳐보더라도 극장과 극장예술의 이해를 달리하고는 발전하지 안했다는 사실을 심심히 양해하여 극장 전부를 극장예술가에게 일임할 것.

2) 극장관리에 대하여: 극장관리는 조선 현상에 비추어 보아 문화를 잘 이해하고 그 발전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헌신할 수 있으며 극장운영에 정진할 수 있는 양심적인 문화인이라야 할 것.

3) 종전 관리인의 결함: 극장관리인이 아무런 근거 없이 문화인으로 자처하더라도 앞날의 진정한 극장예술의 발전을 위하여 유해한 존재라 하겠으니 그 이유는 종전에 극장관리에 경험이 있다는 사람의 다대수는 문화면을 떠나서 진부하고 비속한 모리적 목적과 방법을 습득하였기 때문이다.

4) 인선에 대한 우리들의 희망: 이러한 이유로 공정한 극장관리인을 선택하는 데 있어 극장예술가로 하여금 추천케 하고 심사, 고선에 참여케 하여 주기를 바란다.

(<서울신문> 1946년 03월 3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해방 후 많은 문화 분야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이 단체들의 통합체가 38선 이남에서는 조선문화단체총연맹으로(1946. 2. 24), 이북에서는 북조선문화예술가동맹으로(1946. 3. 25) 나타났다. 이남에서 초기에 나타난 단체들을 좌익 성향으로 분류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들보다 늦게 작은 규모로 나타난 소위 우익 단체들과 평면적으로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기의 단체들은 정치색이 강하지 않았는데, 미군정이 이들에 대한 좌익의 영향력에 경계심을 품고 비협조적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좌익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고, 그 사이의 빈틈을 노리고 기회주의적인 소위 우익 단체들이 나타난 것이다.


위의 8개 단체 건의서는 문화단체들과 미군정 사이가 벌어지는 과정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미군정은 주인 없는 적산 극장을 수익성 위주로 관리하려 하고, 일제시대의 극장관리인들이 자금력을 앞세워 운영권을 확보하러 나서고 있었다. 돈만을 기준으로 하는 입찰에는 문화인들의 설 땅이 없었으니, 군국주의 시대에 일체의 비판의식이 배제된 퇴폐적 오락에만 익숙한 관리인들에게 극장을 내맡기겠다는 것이 미군정의 방침이었다.


단 하나의 극장만을 골라 ‘국립극장’을 입주시킬 계획이 있었다. 연극, 영화, 가극, 음악, 무용을 단 하나의 ‘종합극장’에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해방 후 좋은 오락과 예술을 통한 대중 계발을 위한 극장 예술의 내용충실과 아울러 민주주의 문화 추진이 요청되던 중 금반에 군정청 교학과의 알선으로 서울에 국립극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동 극장에는 연극, 영화, 음악, 가극, 무용의 5분과위원회를 두어 각 수 명의 권위 있는 위원으로 하여금 부문별의 향상 발전을 위한 제안과 부문별 단체 및 상연물의 질적 심의를 하도록 되었는데 여러 가지 준비관계로 이 국립극장의 신발족은 대체로 5월 초순경쯤 되리라는 바 동 극장은 서울에 있는 극장 중에서 가장 시설이 좋고 지리적 위치가 좋은 극장을 군정당국이 선택 알선하기로 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번에 군정당국으로부터 임명된 동 극장 운영위원 제씨가 유명한 문화인이며 이 방면의 권위자로 망라된 점인데 그 운영위원은 다음과 같다.

극장장 徐恒錫, 부극장장 李創用, 사무국장 蔡廷根, 연극 李曙鄕, 영화 金漢, 가극 朴魯洪, 음악 金載勳(임시) 무용 趙澤元

(<서울신문> 1946년 03월 24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예술인들이 극장 운영권을 요구하고 나선 데는 ‘밥그릇 싸움’의 측면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의 측면일 뿐이고, ‘사명감’이 더 크고 중요한 측면이었다. 해방과 독립의 과업 수행에 더 큰 역할을 맡으려는 사명감이다. 더 큰 밥그릇을 바라더라도, 민족 과업 수행에서의 더 큰 역할을 통해 밥그릇을 키우려 했을 것이다.


억압적 군국주의 지배를 벗어난 대중은 오락 방면에도 억눌렸던 욕구를 쏟아내고 있었다. 극장 사업도 수익성이 높은 분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일제시대 극장 사업의 관행에 편승한 수익성 위주 운영 행태를 이렇게 적은 글이 있다.


(흥행모리배들은) 자기네들의 이익이 되는 흥행을 위해서는 8월 15일(해방) 이전에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었던 악극단의 연출 형식과 곡조에다 가사만 슬쩍 갈아 붙여 놓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그대로 상연하고 심지어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지원병”이라 하는 영화를 “희망의 봄”이라고 갈아 내어놓을 만큼 타락했다. 이밖에도 연극이나 영화를 통해서 과연 세상에 내놓아야 옳으냐가 문제될 만한 작품까지 하등의 제재도 받지 않고 흥행할 정도였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 326쪽에서 재인용)


상업성이나 선정성에 대한 규제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3월 7일자, 8일자 일기에서 본 것처럼 소련 영화 상영 금지령과 ‘정치적 선전’에 대한 흥행 취체령이 내려지고 있었다. 인민의 정치적 교육이 필요한 상황에서 군정청을 등에 업은 장택상의 경찰은 ‘정치적 선전’을 봉쇄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들은 일제 말기의 사상 통제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북 사정은 면밀히 살펴보지 못했다. 그러나 1945년 10월 29일 소련과 맺은 첫 무역계약이 영화 수입계약이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이효인의 “해방 직후의 민족영화운동”(<해방전후사의 인식 4>) 469쪽에는 1947년 초 이북 영화계 상황을 서술한 글의 한 대목이 인용되어 있다. 소련군은 문화 매체를 통한 ‘정치적 선전’에 꾸준히 힘쓴 것으로 보인다.


밀화사탕과 라이터의 홍수를 만나는 광영은 못 입었어도 북조선은 할 수 있는 사회주의 문화예술의 무비한 자양을 미각할 기회가 군사적으로 허여되었던 것이다. 모스크바 국립예술극장이 오고 교향악단이 오고 영화인이 오고 (...) 한번에 화차로 둘씩 모스크바로부터 정치-경제-사회-문학-예술-과학-부인-아동 등에까지 이르는 각 방면의 서적-잡지가 도입되고 (...) 보는 사람에게 새로운 진리적 인간사회의 박력 있는 실태를 여실하게 또 경이적으로 계시하는 수많은 영화가 (...) 영화는 기재 등 소련의 적극원조에 의해서 본격적인 촬영소가 건설되어가고 있다는 것 (...)


이남의 미군정 역시 미국 영화 수입에 애를 썼다. 진주 직후에 중앙영화배급사를 설립하고 미국 영화 상영 우대 조치로 100편 넘는 미국 영화를 수입, 배급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 328쪽) 그러나 1955년경 정릉리 고아원 마당에서 내가 감상한 십여 편 서부활극을 돌이켜보면 미국 영화에는 소련 영화 같은 정치적 교육 효과가 없었을 것 같다.


<한국현대사산책 1> 321쪽에 인용되어 있는 1946년 3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재미있기에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찾아 더 길게 옮겨놓는다. 소오생(小梧生)이란 필명 하의 이 칼럼기사에서 당시의 “둑이 터진” 분위기를 짙게 느낄 수 있다.


신문이 쏟아지고 잡지가 밀린다. 삐라가 깔리고 포스터가 덮인다. 쓰는 대로 글이 되고 박히는 대로 책이 된다. 활판과 석판이 몸부림친다. 사진판, 등사판까지 허덕거린다. 8-15 이후의 장관은 실로 유흥계와 쌍벽으로 출판계였다. 종이의 소비량으로는 아마 조선 유사 이래에 처음일 것이다. ‘출판홍수’라 함이 단순한 형용이 아니오 과장이 아닐 듯싶다. 배수구의 준비와 방파제의 필요를 운운케 됨도 지당한 일이다.

홍수도 터짐 즉하리라.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였고, 붓이 있어도 글을 못씀은 40년 동안 통한이 뼈에 사무쳤거든, 자유를 얻은 바에야 무엇을 꺼릴 것인가? 눌렸던 것이 일시에 터진 것이니 세고당연(勢固當然)이라, 한동안 그대로 방치해 무방하리라. 옥석이 자재한 것이니 외력으로써 구태여 정리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렇게라도 하여서 실컷 설분함도 현 단계의 쾌사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