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16. 13:36

어제 나온 책을 한 짐 들고 갔다. 요양원 계신 분들 증정이 열 권. 이사장님, 원장님, 행정실장님, 간호사 A님, 간호사 B님, 치료사 김 선생님, 간병인 세 분(엄, 신, 송). 그리고 입원자로 '안경 할머니'. 고마운 분들은 더 많이 계시지만, 어머니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역할이 분명한 분들을 빠트리지 않으려고 고심했다.

작은형 줄 두 권도 맡겨 놓았다. 직접 전해주기보다 그 편이 쉽겠다. (직접 전해주다가 일부 내용 때문에 한 대 얻어맞을 위험도 피할 수 있다.)

2시 좀 넘어 도착할 때 광경이 또 하나 장관이었다. 2층 복도로 들어서는 문을 열며 노래방 시설을 켜놓은 줄 알았다. 완존 노래자랑 판으로 목청껏 노래가 나오고 있는데, 한참 바라보고서야 어머니와 신 여사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를 등지고 앉아 계셨고, 마주 보는 분들이 우리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살짝살짝 아는 체 해주셨지만, 노래에 너무 빠져서 분위기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어머니 왼쪽으로 좀 떨어진 구석의 원장님께 가서 수인사를 하고 자리 잡아 앉는 동안 어머니는 노래에서 빠져나올 기색이 없었다. 옆에 앉았던 착하고 순진하신 할머니가 어머니를 툭툭 치고 우리 쪽을 가리켰지만, 흘낏 쳐다보는둥 마는둥 노래에 계속 열중하셨다. 다른 분 부르는 노래도 당신 노래 못지 않게 열심히 따라 부르셨다.

10분쯤 지난 뒤 옆자리 할머니의 간절한 손짓을 못 이겨 곁으로 가서 얼굴을 보여드리니 인사는 받아주신다. 그러나 5초도 안 쓰고 노래로 돌아가신다. 옆자리 할머니가 더 성화를 부리시니까 내게 다시 고개를 돌리고 손을 잡으시고는 부르던 노래에 가사를 새로 붙이신다. "아들놈이 오니까 기분이 좋네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들이예요~"

인사를 받아주시고도 30분가량 노래를 계속하시는데,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다. 그렇게 성량이 풍부하신 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성량을 계속해서 한껏 발산하시는데, 힘든 기색이 전혀 없으시다. 신 여사와 또 한 분 새로 온 여사님의 노래 내공이 보통 아니라서 어울려 드리니까 한껏 신이 나셨다. 다른 할머니들도 정말 노인들답지 않게 고양된 분위기에 흠뻑 빠진 분들이 많았다.

노래자랑이 파할 때가 되니까 원장님이 내게 노래를 시킨다. 고양된 분위기에서 김을 빼는 데는 절묘한 방법이다. '멍청송아지' 재탕으로 성공적인 김빼기를 하고 어머니 휠체어를 복도 가의 전용석 쪽으로 밀고 가는데, 간호사 서 선생이 한 마디 찌른다. "다음 번에는 준비를 더 잘 해오셔야겠습니다." 서 선생이 개성적인 유머 감각의 소유자라는 말을 언젠가 적은 일이 있는데, 그 유머 감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전용석에 앉아서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가 책을 보여드리려고 하는데 엉뚱한 노랫가락이 나오신다. "응뎅이가 아파요~ 똥이 나오려나 봐요~" 네 시간 넘게 앉아 계셨으니 뭐가 나오건 말건 저녁식사 전까지 좀 누워계시는 게 좋겠다. 바로 방으로 모셨다.

기저귀를 바꾸신 뒤에 들어가 책을 보여드리며 어떤 책이라고 설명드리니 흥미를 보이신다. 아무 데나 펼쳐 읽어드렸는데, 2009년 2월 16일자였다. 근 2년 전의 일이고 아직 회복 수준이 낮으실 때의 일인데, 적어 놓은 것 들으면서 예상 외로 많이 생각이 나시는 기색이었다. 이번에는 요양원으로 옮겨오시던 2009년 6월 26일자를 찾아서 읽어드리니 이것은 역시 더 많이 생각나시는 것 같다. 남의 얘기 듣는 것처럼 재미있어 하시기도 하지만, 그 주체가 당신이라는 느낌이 확실히 드실 때가 많은 것 같다.

이 책에 생각지 못했던 용도가 있을 것 같다. 수시로 읽어드리면 어렴풋한 기억을 뚜렷하게 떠올려드리는 자극이 정신 작용에 좋은 효과가 있을 것 같다. 나중에 원장님께 그 생각을 말씀드리니 바로 공감하며 자기도 틈날 때 읽어드리고 엄 여사에게도 권하겠다고 한다.

엄 여사가 그런 일엔 다른 여사님들보다 적격일 것 같다. 이곳 일한 지는 반년쯤 되었을까? 참 특이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고 있었는데 지난 달부터 어머니 방을 맡고 있다. 간병인 일은 대개 나이든 분들이 많이 하는데 아주 젊은 분이라는 사실부터 특이하다. 그리고 나이 젊은 분인데도 일하는 태도가 오히려 아주 침착해 보인다.

그런데 방에 들어갔을 때 보던 책 펼쳐서 책상 위에 뒤집어 놓은 것이 보르헤스 작품집이었다. 보르헤스 작품을 재미로 읽는 분이라면 어머니께 '책 읽어주는 여자'로서 자격이 확실하다. 젊고 매력적인 여성에게 이렇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아내에게 혼날 일이지만, 관심이 가는 걸 어쩌는가? 보르헤스 읽기 취미를 가진 젊은 처녀가(그렇게까지 젊은 분인 줄은 오늘 원장님께 듣고 알았다.) 간병인을 직업으로 택한 자세가 어떤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아내도 오늘 어머니의 기운찬 모습을 보며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아마 노래자랑 끝자락에 내 대신 불러달라고 했으면 오늘은 신이 나서 한 곡 뽑았을 거다. 그랬으면 노래자랑이 한참 더 길어졌겠지. 그 사람에게 넘기지 않고 김빼기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한 나 자신이 참 대견하다.

집에 돌아와서 얘기했다. 봄에 아예 이천으로 이사가서 어머니 자주 뵈며 지내면 어떻겠냐고. 이번 책으로 돈이 좀 들어오면 다른 불리한 점들을 상쇄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했더니 흔연히 동의한다. 이 사람도 의무감으로 시어머니 모시기를 시작했지만, 이제 재미를 단단히 붙인 것 같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 2. 12  (5) 2011.02.13
어느 독자의 메일  (2) 2011.01.28
<아흔 개의 봄> 표지  (11) 2011.01.13
"그 여자 참 똑똑한 여자네?"  (2) 2011.01.08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 남지심 (도반, 소설가)  (4) 2011.01.06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