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타자기를 만들려는 노력의 역사를 통해 중국어-한자가 근대적 매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문제와 그로부터 촉발된 사회적-문화적 현상을 밝힌 책. 기계론적-환원론적 기술조건 아래서는 동음이의 글자가 많은 표의문자 한자의 취급에 어려움이 많아 인쇄, 전보 등 소통과 통신에 알파벳 등 표음문자보다 훨씬 더 큰 비용(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중국을 포함해서 한자를 사용하던 여러 사회에서 표의문자로서 한자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일어난 것도 이 어려움과 비용 때문이었고, 한자를 주축으로 한 중국문명이 근대세계의 학술과 사상에 충분한 공헌을 하지 못한 이유의 일부가 여기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기계론적 환원론적 기술 발달이 극한을 넘어선 뒤의 컴퓨터 기술 환경에서는 표의문자의 핸디캡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리한 입장에 서는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지금 중국어로 打字機를 입력하려면 “d, z, j, enter"4타로 이뤄진다. ”漢字文明圈”h, z, w, m, q, enter"6타다. 한글에서 타자기6, “한자문명권15, 영어에서 “typewriter"10, "Chinese linguistic sphere"25타에 비해 시간과 노력이 훨씬 절약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2부작의 전편으로 작성했고, 후편에서는 컴퓨터 시대의 언어 환경을 다루려 한다. 그래서 이 책의 결론부에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후편을 위해 많이 아껴둔 감이 있다. (8쪽에 불과함.) 그런데 한자 문제를 상당 부분 중국과 공유해 온 한국 사회의 관점에서는 서양 독자들에게보다 더 직접 더 깊이 와 닿는 주제들이 이 전편에 많이 담겨 있다. 따라서 후편을 의식할 필요 없이 이 전편을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독자에게 내놓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후편 출간은 2022년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판에서는 원서의 일부 내용을 줄이고 (예시된 사례 중 서양 독자에 비해 한국 독자의 이해가 어려운 부분 등) 결론부를 확충하는 의미의 한국 학자의 해설을 붙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제목은 漢字의 부활”, “漢字無罪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장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ACKNOWLEDGMENTS ix

 

INTRODUCTION: THERE IS NO ALPHABET HERE 1

 

2008 베이징 올림픽 입장식으로 시작한다. 전통적인 첫 입장국 그리스의 뒤를 이은 것이 기니, 기니-비소, 터키였다. 알파벳 순서에 따른다는 원칙을 (1988 서울에서는 그리스의 뒤를 이은 것이 가나, 가봉이었다.) 2008 조직위원회도 따르려 애를 썼지만, 중국어에 알파벳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각국의 중국식 이름의 획수에 따라 几内亚土耳其를 앞세운 것이었다. 이렇게 표의문자라는 중국어의 특성을 제기한 다음 표음문자의 원리를 보편적인 것으로 여기는 서양문명의 영향 앞에서 중국의 언어-문자 문제가 제기되는 배경을 밝힌다.

 

1 INCOMPATIBLE WITH MODERNITY 35

 

1900년대 초 타이프라이터 보급이 크게 확대되고 있던 미국에서 “Chinese typewriter"가 엄청난 괴물로 (후에 나타날 진공관 컴퓨터와 비슷한 모습) 언론에 그려지던 상황이 1979년의 텔레비전 드라마 <Chinese Typewriter>에까지 일종의 형용모순(oxymoron)처럼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어서 19세기 후반 타이프라이터의 발전이 표준적 형태로 귀착되어 가는 과정과 로마자 외의 언어에 타이프라이터 기술이 확장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그런 과정에 중국어가 적응하기 어려웠던 문제를 수시로 보여준다.

 

2 PUZZLING CHINESE 75

 

19세기 후반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중국어 타이프라이터 개발 노력과 당시 현실적 과제로 떠오른 전보와 관련된 문제들을 설명한다.

 

3 RADICAL MACHINES 125

 

19세기 말까지 타이프라이터가 “QWERTY"의 표준적 형태로 수렴되어 가는 한편에서 중국어 타자기는 이와 전혀 다른 형태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 아래 개발이 진행되었다. 이 방향의 노력으로 선교사 D Sheffield1890년대 작업과 1910년대 진행된 저우허우쿤과 치쉬엔의 작업이 소개되어 있다.

 

4 WHAT DO YOU CALL A TYPEWRITER WITH NO KEYS? 163

 

1920년대 이후 어느 정도 표준화된 (키보드 없는) 중국어 타자기가 보급되는 과정과 그로부터 형성된 타자기 문화의 양상이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세계적 타이프라이터 메이커들의 키보드 있는 중국어 타자기를 디자인하기 위한 노력, 주음부호로 한자를 대치하려는 운동 등이 소개되어 있다.

 

5 CONTROLLING THE KANJISPHERE 197

 

1930년대 일본이 대륙에 진출하면서 일본의 반노(萬能) 타자기가 중국 시장을 석권하는 현상과 이에 대한 중국 지도층의 대응 노력이 설명되어 있다.

 

6 QWERTY IS DEAD! LONG LIVE QWERTY! 239

 

1940년대 린위탕(林語堂)이 발명한 밍콰이(明快) 타자기에서 컴퓨터 시대를 예고하는 글자 찾기 원리가 나타난 점을 중시한다. 키보드를 사용하되 서양식 키보드의 1 1 대응 원리와 달리 키보드가 글자 찾기 과정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장 제목을 뽑은 것. 입력(input)의 개념 성립이 컴퓨터 환경에서 한자-중국어 취급에 유리한 조건을 만든 사실이 설명되어 있다.

 

7 THE TYPING REBELLION 285

 

19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의 발전상을 태평천국의 난(Taiping Rebellion)'에 빗댄 것은 엘리트계층 아닌 현장 공원들의 역할을 부각시킨 것이다. 타자기 발전에 앞장선 지식인들은 자판의 체계적배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지만, 타자공들은 작업을 쉽게 하기 위한 경험적배열 방법을 개발했는데, 많이 조합되는 글자들을 가까이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을 통해 컴퓨터 환경에서 활용될 글자 찾기의 원리가 형성되었다.

 

CONCLUSION: TOWARD A HISTORY OF CHINESE

COMPUTING AND THE AGE OF INPUT 317

 

짧은 결론부에는 중요한 사실만 요약하면서 속편의 연구 방향을 소개하고, 주제가 가진 함의를 적극적으로 펼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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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