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들어 최병모 선생을 많이 보게 됐다. 최 선생과 알게 된 것은 1990년대 제주에 함께 살면서였다. 최 선생이 굳이 제주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었던 까닭은 아직도 잘 모르는데, 내가 학교 그만두고 제주에 은거하려 하니 서중석 선생이 거기 좋은 친구 있다고 소개해 줬다. 5년간 정중한 관계로 지내다가 피차 제주를 떠난 후로는 뜸해졌다. 그 후 변호사 도움이 필요할 때면 그를 찾았지만 그럴 일이 많지 않았다. 작년까지는 5년에 한 번 보기도 하고 10년에 한 번 보기도 하면서 서로 잊지만 않고 지냈다.

 

그러다 지난 4월, 마당에 꽃이 좋으니 한 잔 하러 오라 청하기에 부부 함께 흐뭇한 대접을 받고 온 뒤로 보는 일이 잦아져 지난 두 달 동안 본 것이 그 전의 20년간보다 많다. 그가 내 글을 읽으며 내 생각에 관심이 많아지고 이런저런 일을 함께 토론하고 싶은 마음이 든 데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있기 마련, 근년 그가 꽂혀 있는 선거제도 문제에 나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최 선생이 준 팸플릿 하나가 있다. "몰랐어? 문제는 선거제도야." 목차는 이렇다.

 

Q&A 1. 행복해지려면 뭣이 중헌디?

Q1. 선거제도가 왜 중요할까?

Q2. 정말 선거제도가 행복에 영향을 끼칠까?

Q3. 그렇다면 현행 선거제도는 무엇이 문제일까?

Q4.  선거제도의 비례성이 높지 않은 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일까?

Q5. 다수결 원칙이 민주주의 핵심이라면 1등만 당선되는 건 당연한 것 아닐까?

Q&A 2. 선거제도가 바뀌면 정치판이 달라지고 정치판이 바뀌면 '나의 삶'이 달라진다.

Q1. 그렇다면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Q2.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좋은 점이 뭘까?

Q3. 유권자가 투표하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질까?

Q4. 좋긴 한데 과연 대한민국에서 가능할까?

Q&A 3. 아직도 의혹이 남아 있는 질문들 "이놈의 정치판 믿을 수가 있어야지."

Q1. 비례대표 의원 '밀실 공천', '돈 공천' 어떻게 막지?

Q2. 지금도 꼴 보기싫은 국회의원, 더 늘리자는 소리인가?

Q3. 선거제도를 바꾸려면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 것 아니야?

 

<비례민주주의연대>란 곳에서 만들었다니 이 팸플릿 내용을 포함해서 그 단체의 주장을 홈페이지에서 열람할 수 있을 것 같다. www.myvote.or.kr

 

이 팸플릿의 취지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그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는 대목들이 있는 것은 내 평소의 공부가 (민주주의 정치이념을 포함하는) 근대체제의 비판적 검토에 치중하는 위에, 최근 <차이나모델>의 번역작업에서 선거민주주의체제의 한계와 민주점에 생각을 모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나는 선거제도의 개혁을 바라고, 매우 중요한 일로 여긴다. 그러나 이 팸플릿 내용과 다르게 볼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고, 주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심화될 때는 혼란을 일으킬 것이 걱정된다. 그렇게 보이는 점을 틈틈이 적어보겠다.

 

 

첫 질문의 대답에 "스웨덴의 복지, 덴마크의 행복이 부럽다면 선거제도에 개혁을!" 하는 제목 아래 덴마크, 스위스, 핀란드, 뉴질랜드 등 삶의 질 상위권 국가들이 덜 부패했고 민주주의 지수가 높으며 정치가 잘 이루어진다고 지적했다. 삶의 질과 정치의 특성 사이에 연관성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팸플릿이 풍기는 것처럼 그 사이를 확고한 인과관계로 볼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두 번째 질문의 대답에서 비례대표제 선거는 압도적 다수당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연립정부가 구성된다고 한 다음, "협상과정에서 각 정당들이 서로의 좋은 정책을 받아들이게 되고, 타협을 통해 '좋은 정책'을 실현하는 정치가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연립정부가 현실에서도 좋지 않은 특성을 보이는 일이 꽤 있고, 그런 특성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정권의 연립이 덜 필요한 선거제도를 택하는 나라도 적지 않게 있는 것 같다.

 

우리 정치계에 현존하는 인적자원을 갖고 연립정부를 세운다고 하면 잘 될까? 나는 아주 어렵다고 본다.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은 국회 과반수의 연립정부를 세울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춘 사이다. 그런데도 연립은커녕 원만한 '협조'도 이뤄지기 어려운 까닭이 즐비하지 않은가. 행여 연립정부를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정치의 개선을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다방면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충분한 노력을 통해 기반조건이 개선된다면 꼭 연립정부가 아니라도 썩 만족스러운 정치가 가능하게 될 것 같다.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28위인데 왜 국민행복도는 58위밖에 안 되는가 하는 질문에도 다시 생각할 점이 있다. 소득도, 선거제도도 국민행복도를 결정하는 많은 요소들 중 일부다. 공동체를 파괴하고 마비시키는 개인주의에 제일 큰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개인주의 원리에 따라 개인의 주권을 부각시키는 선거민주주의체제의 어두운 면을 크게 본다. 선거제도의 개혁이 행복도 증진의 충분조건인 것처럼, 연립정부가 꼭 바람직한 정치 형태인 것처럼 지나친 무게를 두는 길은 삼천포로 빠질 위험이 크다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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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