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에서 살 길 찾아 빠져나온 집단이 "바른정당"이란 간판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보수"란 이름을 내걸지에 논의가 많이 집중되었던 모양이다.
"보수" 내걸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보수"가 한국 와서 고생이 너무 많지 않았나. 새누리에 이르기까지 "보수"를 내걸고 이상한 짓 너무 많이 해온 동네가 있어서 "보수"에 어떤 성형, 어떤 미용을 가해도 곱게 보이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진보"도 그렇지만 "보수"도 원래 절대적 의미가 없는 말이다. 변화를 많이 바라면 진보, 적게 바라면 보수, 상대적 의미일 뿐이니 정치세력의 간판에 오를 때는 그 사회의 관습과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통용되는 것이다. 내가 2008년 이래 "보수주의자"를 자임해 온 것도 편의를 위해서일 뿐이다. 2010년에 이렇게 쓴 일이 있다.
나를 진보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보 쪽 인사들과 교우관계도 많고 수구의 행태에 대한 비판도 강하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들에게 나는 내가 "향상심도 없고 정의감도 약한 인간"이라고 겸손한 척하며 말한다. 그 개떡 같은 말을 "욕심이 없고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으로 찰떡처럼 알아들어 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정말 이 세상에 근본적인 불만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분노와 고통과 슬픔이 넘치는 세상이긴 하지만 인간세상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그런 것 다 겪으면서도 대개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분노와 고통을 오히려 불필요하게 늘리기 쉬운 일에 따라 나설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 자신 불만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근년에 얻은 편안한 마음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리라. 나 자신을 확! 바꾸고 싶은 마음이 많았기에 이 세상이 바뀌었으면 하는 욕심도 강했을 것이다. 지금은 더 풍족한 생활도 바라지 않고 더 훌륭한 사람 되고 싶지도 않고,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회에 대해서도 더 풍요로운 세상이나 더 정의로운 세상보다 그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조건만을 생각하는 것일 게다.
이른바 "진보"진영의 여러 주장에 나는 대충 동조한다. 그런데 나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지금 나타나 있는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보다, 역사의 흐름으로 볼 때 이 사회에 앞으로 떠오를 필요를 찾아내는 것이 내 할일이다. 역사 공부하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보다 문명사를 공부하고 역사의 큰 굴곡을 살피는 내게 각별히 중요한 과제다.
그래서 "보수주의"를 표방했다. 생각 있는 대부분 사람들이 많은 변화, 큰 변화를 바라고 있는, 그래서 "진보"진영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지금 이 사회의 상황은 특수한 상황이다. 개항기 이래 백년 넘게 제대로 된 정치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빚어진 상황이다. 정치가 살아난다면... 진보와 보수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게 된다. 수구세력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표현의 기회를 잃은 보수의 의미를 확충해야 균형 비슷한 것이 가능할 것이다.
보수와 수구의 차이를 물리학 기본 원리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 보수란 변화를 최소화하려는 경향이다. 그런데 s(위치), v(s/t, 속도), a(v/t, 가속도) 중 어떤 차원의 변화를 대상으로 하는가에 차이가 있다. 위치의 변화까지 막으려는 것이 수구다. 힘 갖고 돈 가진 자들이 위치를 그대로 지키려는 것이다.
속도의 변화를 막으려는 입장을 보수의 주류로 볼 수 있다. 인간세상에 위치의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억지로 막으려 했다가는 언젠가 끔찍한 폭발을 겪게 된다. 어느 정도 변화는 순순히 받아들이되, 변화의 속력과 방향이 너무 갈팡질팡하지 않고 가급적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보수라고 나는 본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보수를 자처한다.
속도의 변화까지 추구한다면 진보 입장으로 넘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는 변화를 불편해 하는 측면이 있는데, 일정한 속도의 변화라면 대다수 사람들이 적응할 수 있다. 그런데 변화의 속도, 그 방향과 속력까지 수시로 오락가락한다면 그 불확실성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불확실성을 무릅쓰고 혁명적인 진보의 길로 많은 사람들이 나서게 하는 것이 역사의 발전에 대한 "믿음"이다.
50년 역사 공부를 통해 나는 역사의 발전에 대한 믿음이란 것이 매우 고약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인간사회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니 그 움직임에 "발전"이라고 이름 붙이는 데는 아무 이의 없다. 그런데 그 발전에 대해 합리적인 "생각"만 하면 안 되나? 왜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하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놓고 진행 방향을 차분히 가늠해서 최선의 대비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다. 각자 머릿속에 그리는 유토피아를 향해 역사가 발전한다는 "믿음"을 갖고 그 방향을 향해 변화를 가속시키려는 노력이 크게 일어날 때 참혹한 일이 일어나곤 했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보수가 정치의 주축을 맡는 것이 정상이다. 위치 변화까지 거부하는 수구도 한 쪽에 있고 속도 변화까지 추구하는 진보도 다른 한 쪽에 있다. 밀고 당기면서 이쪽 저쪽으로 조금씩 왔다갔다 하지만 사회의 전체적 노력은 일정한 변화 속도를 유지하는 "질서 속의 변화"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개항기 이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왔다. 폭압적 권력이 일체의 변화를 봉쇄하는 상황이 백년 넘게 이어져 왔다. 1987년 이후 민주화의 환상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돈의 폭력성이 총칼에 못지 않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 있다. 다른 것 차치하고 문화계 블랙리스트 하나만 하더라도, 여러 해 동안 이 사회의 문화발전을 가로막은 힘이 난폭한 탄압과 투옥에 못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 않은가.
수구세력의 오랜 횡포 앞에 올바른 마음 가진 사람들이 "확 바꿔!" 쪽으로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상황에서 보수주의자가 당장 할일이 없다. 현상의 두드러진 문제들이 정리된 뒤에 어떤 노력이 이 사회에 필요할지, 뒷전에서 궁리나 하고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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