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학인작가(學人作家) 홍명희

 

홍명희의 만년의 말 한 마디가 이렇게 전해진다.

 

말년의 어느 날 선생은 자식들 앞에서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이다. 일생 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 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라고 하며 조용히 그러나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말하였다.

 

1910829일 금산 군수로 있던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이 망국의 비보 앞에 자결을 행할 때 홍명희는 23세 청년이었다. 설령 부친의 의지를 미리 얼마만큼 알고 있었더라도 그 결행은 홍명희에게 막중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부친이 남긴 뜻이 그의 일생에 큰 지표가 되었을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부친이 그에게 남긴 유서는 이런 내용이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 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명시해서 아들에게 내린 임무는 잃어진 나라를 찾는것이었다. 그 아들의 평생 가장 중요한 업적이 <임꺽정>이란 작품이라면 그 작품을 쓴 목적이 잃어진 나라를 찾는데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만년의 홍명희가 자신은 홍범식의 아들로 살아왔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50여 년 전 중학교 입학 전후해서 <임꺽정>1년 넘게 빠져 살았다. “의형제편 세 책과 화적편 세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저자의 의도나 목적을 살필 나이도 아니었고, 그저 책에 담긴 내용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 책이 내게 무엇을 남겼는지 조금씩 조금씩 떠올려보게 되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필치였다. 어릴 때 나는 글쓰기에 신경 쓰지 않고 컸는데, 마흔이 넘어 글을 많이 쓰게 되었을 때 생각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접한 아버지 일기에서 아버지가 후배들에게 그 책을 우리글의 좋은 모범으로 많이 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우리글 쓰기를 위한 최고의 훈련을 받는 줄도 모르는 채로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미필적 고의를 의심하기도 했다. 국어학자이기 때문에 당시 금서이던 그 책을 소장할 수 있었는데, 왜 하필 우리 형제가 뒤져보기 쉬운 집안 벽장 안에 소장하신 걸까? 어머니에게 물었을 때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몇 해 전 <해방일기> 작업 때 저자의 행적을 더듬으면서도 내 마음속에서 저자의 모습은 작품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그 모습을 그린 한 대목을 뒤에 붙인다. 단독건국이 진행되고 있던 19487월말 안재홍 선생과의 가상대담이다. 이번 발표는 <임꺽정>의 집필에 초점을 두고 해방 후 저자의 행적을 다루지 않는데, 그 측면에 대한 보충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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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발표를 부탁받으며, 홍명희와 <임꺽정>에 관한 생각을 한 차례 모아볼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구상을 시작하자 발표자로서 내 입장에 관한 생각이 한참 마음속을 맴돌았다. ‘역사학자로 행세해 온 사람인만큼, 주최 측에서는 역사학자의 입장을 기대할 텐데 나는 마침 역사학자 노릇 그만두고 앞으로는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참이다.

그래서 오늘 발표에서 선생을 바라보는 내 입장은 몇 가지가 뒤섞인다. (전직) 역사학자의 입장도 있고 독자의 입장도 있다. 그러나 중심이 되는 것은 작가 지망생으로서 모델로 삼는 선배의 자세를 바라보는 내용이 될 것이다.

내가 모델로 삼고자 하는 자세란 학인작가(學人作家)의 자세다. 위에서 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생각을 했다 하지 않고 써야겠다는생각을 했다고 적었다. 안 써도 되는 것을 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갖고 써야겠다는 마음이다. 나는 홍명희가 그 공부한 바를 드러내 세상에 공덕을 이루기 위해 <임꺽정>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가 생각한 공덕이 어떤 것이고 그 방법으로 <임꺽정> 집필을 택한 까닭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홍명희의 일생을 크게 가르는 분기점으로 합방과 해방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합방에는 부친의 자결이 겹쳐져 23세 청년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 짐작되고, 해방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요구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 두 개 분기점은 외부상황에 의해 주어진 것인데, 그의 내면에서 빚어진, 어쩌면 더 큰 또 하나의 분기점이 1927년경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신간회 활동을 하면서 <임꺽정> 집필 준비를 마무리한 시점이다. 이 분기점에서 그의 자세를 그려봄으로써 작품 <임꺽정>의 성격과 의미를 생각해보려 한다.

 

1. 평생의 숙제를 받기까지

 

1910년까지 홍명희는 명문가 도련님으로부터 준수한 학인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전통적 엘리트(양반-선비)의 성장 코스였다. 그런데 이 코스의 공부방향이 시대 변화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갑오경장(1894)으로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제도적 기반도 바뀌었다. 공부의 기초를 전통적 방법으로 쌓아놓은 위에 신학문을 수용하는 중체서용(中體西用)’ 원리가 조선 양반가 청소년의 공부 방식에도 적용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15세이던 1902년부터 3년간 중교의숙에서 신교육을 받은 데 큰 전환의 의미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그 연령대에 조부와 부친이 있는 서울에서 지내며 스승을 찾아 배우고 벗을 찾아 사귀는 것은 전통시대의 관습 그대로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틈을 좀 내서 西用의 길을 맛이나 좀 본 것이지, 신교육 받기 위해 서울 와서 지낸 것은 아닐 것이다. 손자의 공부 내용을 듣고 조부가 메돝 잡으려다 집돝 놓치겠다.” 했다는 말씀을 봐도 그렇다.

1905년 봄 괴산으로 돌아왔다가 1년도 안 되어 일본으로 떠나는데, 이를 둘러싼 부친의 태도가 흥미롭다. 집에 돌아오자 <춘추> 4전을 읽으라는 어마어마한 숙제를 내린 것으로 봐서는 서울에서 묻은 때[洋臭]를 싹 씻고 전통적 공부로 돌아오게 하려는 뜻이었던 것 같은데, 막상 일본으로 떠날 때는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고 한다. 여행 한 차례 다녀오고 싶다는 아들에게 몇 해 머물며 공부를 하고 오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1905년 말 시점에서 아들에게 일본 유학을 권한 부친의 뜻은 어떤 것이었을까? 당시 홍범식은 35세의 관리로서 을사조약 체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5년 후의 자결에 이를 조건이 갖춰져 가고 있었다. 그의 자결에는 명문가 출신 관원으로서의 책임감과 현실 속의 무력감 사이의 괴리가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종의 권력 사유화 집착으로 인해 조정에서 힘깨나 쓸 만한 자리에는 고종의 충복 아니면 영혼 없는 기술자들만 앉아 있고 전통적 덕목을 갖춘 신하들은 모두 겉돌고 있었다.

고종은 서연(書筵)의 경험 없이 왕위에 앉고, 그 후에도 자기 경연(經筵)이나 세자(태자)의 서연에 힘을 쓰지 않은 임금이었다. 신하가 깊고 큰 뜻을 가졌어도 그런 뜻을 돌아보는 임금이 아니었고, 그 우매함이 일본의 야욕을 거들어주고 있었다. 전통적 덕목을 쌓아온 자신으로서는 순국밖에 할 일이 보이지 않게 된 홍범식이 아들은 다른 길로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미지의 길이지만 조선을 뒤흔드는 힘의 근원을 찾아 나서도록 권한 것은 자신이 겪는 것 같은 무력감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 아니었겠는가. <춘추> 4전에서 일본 유학으로 몇 달 사이에 권유 방향이 극단적으로 바뀐 것은 1905년의 정치적 격변 때문일 것이다.

순국(殉國)’이란 이름이 비장하기는 해도 결국 자살의 범주에 드는 것이다. 자살을 처음 체계적으로 탐구한 에밀 뒤르켕은 <자살론>(1897)에서 자살을 (1)과도한 개인주의가 사회와의 유대감을 약화시킨 결과로 나타나는 '이기적 자살', (2)사회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이타적 자살', (3)사회의 기준과 가치관 혼란에 기인하는 '아노믹 자살', 세 범주로 분류했다. 홍범식의 순국은 (2)의 범주에 드는 것인데, 그것으로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주의를 전제로 한 뒤르켕의 시각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십여 년 전에 쓴 글 한 꼭지를 떠올린다. “壯士의 뜻이란 제목이다.

 

바람이 소소하니 역수 물 찬데(風蕭蕭兮易水寒), 장사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리(壯士一去兮不復還).” 중국문학사를 통해 가장 비장한 구절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이 대목은 형가(荊軻)가 연()나라 태자(太子) ()의 부탁으로 진() 시황(始皇)을 암살하러 떠날 때 지음(知音)의 벗 고점리(高漸離)와 작별하며 부른 노래다.

형가가 진나라 궁정에서 시황을 배알하는 척하다가 척살(刺殺)에 간발의 차로 실패한 뒤 시황은 형가의 주변 인물을 모두 죽였다. 다만 고점리만은 그 절세의 연주솜씨를 아껴 두 눈을 뽑고 살려뒀다. 고점리는 기회를 엿보다가 시황의 앞에서 연주할 때 악기 속에 넣어두었던 납덩어리를 꺼내 시황을 때려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죽었다.

형가는 원래 연나라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태자 단의 부탁에 목숨을 걸게 된 것은 전광(田光)이라는 친구 때문이었다. 연나라 원로 명사인 전광은 저자바닥에서 놀고 뒹구는 유랑인 형가의 고매한 인격을 알아보고 망년지교(忘年之交)로써 후히 대접했다.

노골화하는 진나라의 정복사업 앞에서 연나라는 화친이냐, 적대냐,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태자 단은 화친을 통해 나라를 길게 보전할 수 없으며, 시황의 암살만이 천하를 안정시키고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 믿었다. 그래서 전광에게 일을 맡기려 했으나 전광은 노쇠함을 이유로 사양하고 대신 형가를 추천했다.

태자는 전광을 배웅하며 일이 누설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전광은 태연히 웃으며 응낙했지만 형가를 만나 태자의 뜻을 받들어주도록 부탁한 다음 이렇게 일렀다. “일을 행함에 상대로 하여금 의심케 한 것은 협객의 도리가 아니다. 태자를 만나거든 내가 이미 죽었으니 누설을 염려하지 말라고 전해 주오.” 그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광의 죽음은 선비의 결벽증이 아니었다. 그는 태자의 뜻이 천하와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 여겼고, 손수 받들지 못하는 대신 자기 목숨을 던져 형가와 태자를 맺어준 것이다. 남은 두 사람이 숱한 갈등을 넘기고 결행에 이른 것은 전광의 살신성인(殺身成仁) 덕분이었다.

구속될 처지의 안기부 간부가 새 부장의 정치적 라이벌에게 기밀문건을 넘겨준 일을 놓고 여러 모로 한탄이 나온다. 권력기관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보다 정권과 사익(私益)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은 오랫동안 있어 왔다. 그것이 의구심만이 아니었던가.

 

전광 선생의 사례를 뒤르켕에게 보여줬다면 범주 (3) “아노믹 자살로 분류했을 것이다. 그가 벗어날 수 없었던 개인주의 원리로는 해명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광은 형가와 일체감을 느끼고 형가의 몸을 통해 자기 뜻을 이루고자 살신성인의 길을 걸었고 그 행실은 중화문명권에 하나의 전범으로 남겨졌다. 홍범식도 맏아들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에게 자기 뜻을 온전히 남길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에 훌훌 떠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아들은 이 뜻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부친의 순국을 맞기 전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할 텐데, 19102, 학교 졸업을 마무리하지 않고 서둘러 귀국한 사실이 우선 눈에 띈다. 그리고 귀국 직전 부친으로부터 받은 편지 한 통을 베껴놓은 것이 또한 눈에 띈다. 베껴놓을 만큼 중시한 편지에 어떤 뜻이 담겼던 것일까? 그 뜻이 아들의 귀국을 서두르게 한 것은 아닐까?

 

문안 편지가 잠시 끊기어 걱정이 실로 크다. 엄동설한인데 객지생활은 잘 하고 있으며, 학교 수업에서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는 않는지, 적잖이 염려되는구나. 나는 여전히 객지에서 벼슬살이하느라고 이달 들어서도 귀성을 하지 못해 마음을 진정하기 어렵다. 시름으로 나날을 보내니 온갖 고뇌가 날로 얽힌다. 다만 근자에는 편안하고, 가족들에게도 위급한 일이 없기는 하다. 며칠 전에 눈바람이 몹시 세찼는데 추위 고생은 면하였겠지? 바빠서 대충 쓰고 이만 줄인다.

 

편지가 잠시 끊겼었다는 사실이 주의를 끈다. 어떤 편지가 오고가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이 부자간에는 상호 소통을 위한 노력이 컸던 듯한데 편지가 얼마동안 끊겼다는 것은 누군가 소통에 어려움을 느낀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편지에 담긴 내용보다 담기지 않은 내용이, 부친에게 꼭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 아들의 귀국을 서두르게 하지 않았을지.

19102월 아들의 귀국에서 8월말 부친의 자결 사이에 어떤 접촉이 부자간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기간 홍명희의 동정을 주로 괴산에 있으면서 자주 서울을 왕래하였다고 한 강영주의 요약은 별다른 접촉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중대한 결심을 굳혀가는 과정에서 부자간의 소통이 전혀 없었으리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 시기에 홍명희가 <소년>(전에 번역해 둔 것으로 보이는) 번역문 몇 편밖에 기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그가 앞을 바라보는 일보다 뒤를 돌아보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을 정황을 그려볼 뿐이다.

 

2. ‘복국사업의 모색

 

부친 사후 2년간 은둔해 있던 홍명희가 3년상을 벗자마자 1912년 가을 중국으로 떠났다가 6년 후에 귀국했다. 이 기간의 절반은 1914년 말에서 1917년 말까지의 남양(싱가포르) 체류였다. 상중의 2년간 깊이깊이 생각한 결론이 할 수 있는 대로 멀리 떠나는 것이었나 보다.

부친의 유지(遺旨)에 묶여 살았다는 술회가 진심이겠지만, 그 대의(大義)를 받든 것이지 소절(小節)에 얽매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부친의 뜻을 이어받되 부친 같은 좌절을 피하기 위해서는 부친이 걸은 길로부터 멀리 떠나, 부친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자기 아들 기문과 맞담배를 피웠다는 일화를 보면, 아들 역시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바란 것 같다. [상해에서 신규식(1879-1922)과의 만남이 부친의 유지를 새기는 데 하나의 큰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두 차례 순국 시도를 한 바 있는 신규식이 순국자의 자제 홍명희에게 순국의 의미를 절실하게 풀어주었기에 신규식이 죽었을 때 홍명희가 조사조차 격식 갖춰 쓰지 못할 만큼 애통해 할 만한 관계로 맺어진 것이 아니었을지? 신규식이 죽은 6일 후인 1922101일자 <동명>에 실린 홍명희의 글은 너무 애통해서 글도 못 짓겠다고 편집자 최남선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부친을 이어받는 뜻이란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는것이었다.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될 상해로 간 것은 그 목적에 맞춰 쉽게 이해되는 일이다. 그런데 상해에서보다 더 긴 기간을 남양에서 지낸 것은?

해외로 나간 독립운동가 중에는 지속가능성을 가진 기지(基地)’를 만들려고 애쓴 사례가 더러 있었다. 홍명희의 남양 체류도 그 가능성을 모색한 것으로 이해된다.

독립운동을 장기간 지속하려면 자급자족적인 기지가 필요하리라는 것을 2년간 상해에서 지내며 홍명희는 깨달았을 것이다. 상해의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초기에 신규식의 동제사를 통해 국민당 측의 도움을 받았으나 191372차혁명의 실패로 손문이 망명한 후 곤경에 빠져 있었다. 하와이 교민사회와 만주 지역 조선인사회가 해외 독립운동의 발판이 되어주고 있었지만 만주는 일본이 눈독을 들이는 방향이었고 하와이는 너무 멀었다.

손문(孫文)의 동맹회(同盟會)가 남양에서 많은 힘을 얻은 사실을 알게 된 홍명희는 개발이 빠르게 진행 중인 남양에서 한교(韓僑)도 화교처럼 자리 잡을 여지가 있지 않을까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손문의 배경이 되어준 남양 방면에 한교사회를 만들면 중국 국민당정부와 생산적 협력관계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을 것이다. 남양에 그런 기지를 만든다면 나라를 완전히 되찾기 전이라도 조그만 조선인의 나라를 확보하게 될 것이었다.

3년 만에 남양 사업을 포기하고 상해에 돌아온 홍명희는 바로 귀국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강영주는 <평전>에서 그가 봉천에서 아우 성희를 만나 집안 사정을 들은 뒤 비로소 귀국을 결정한 것으로 보았지만 남양에서 돌아온 몇 달 후 상해를 떠나 북경을 거쳐 봉천에 이른 홍명희의 행로를 보면 귀국의 방향이 이미 잡혀 있었던 것 같다.

홍명희가 남양 사업을 포기하면서 독립운동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해외 독립운동은 포기한 것일 수 있다. 해외 활동은 일제의 직접 사찰을 벗어난다는 점에 이점이 있지만 대중의 독립정신을 함양하는 사업은 외부에서 하기 어렵다. 일본의 일상적 통제를 받는 위치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이 힘들고 위험한 일이지만 더 큰 성과를 바라볼 수 있는 면도 있다. 6년간 해외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해 본 결과 문필을 통한 국내에서의 운동이 자신에게 적합한 것이라고 홍명희는 판단한 것이 아닐까.

홍명희는 1910-122년간 상중에 활동을 줄였고 귀국 반년 후인 19193월부터 1년 남짓 옥고를 치렀다. 나중에 1929년 말부터 2년 남짓 투옥된 것까지 붙여서 생각하면 그는 대략 10년 간격으로 1~2년간 침잠하는 시간을 가진 셈이다. 귀국 전에 해외활동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겠지만, 국내 활동의 구체적 방향은 충분히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1919년의 투옥 기간은 국내 활동의 방향과 계획을 깊이 생각할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20년 봄 출옥한 후에도 그의 활동은 확고한 지향성을 보이지 않았다. 19245월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비로소 맡았다. 그러나 일시적 필요 때문에 그를 영입했던 사주 측의 사정이 풀리자 1년도 안 되어 물러나 시대일보 경영을 맡았지만 그 역할도 오래가지 못했다. 192610월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나 그 직후부터 신간회 일에 몰두하면서 학교 일에는 큰 힘을 쏟지 못했다.

강영주는 <평전>에서 1913년 말 홍명희의 상해 시절 이야기 중 홍명희의 일생 동안 갈등의 와중에 들어가지 않고 인생을 관조하는 태도로 살아가겠다는 의미관조론을 언급했는데, 1920년대 전반기 홍명희의 거취는 바로 그런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확실한 자신이 서지 않는 일에 너무 깊이 말려드는 것을 피하면서 여건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가능성을 모색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에 그의 모색은 신사상연구회(1923. 7)-화요회(1924. 11)-정우회(1926.4)를 통한 사회주의운동과 조선사정연구회(1925. 9)의 모습으로 나타난 민족주의운동, 두 갈래로 펼쳐졌다. 민족주의운동은 그의 기본노선이라 할 수 있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조직 활동보다 개인적 공부의 형태로 가까운 동료들 사이의 토론과 협력을 통해 진행되었다. 한편 조직 활동이 발전하고 있던 사회주의운동에는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자세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역시 사회주의운동에 나선 아들 기문의 적극성과 대비되어 부자간의 갈등도 일어났을 것이다.

 

3. 기본사업 <임꺽정>과 특별사업 신간회

 

1927년 초 홍명희가 신간회 결성에 나선 것은 그의 모색기가 마무리된 결과로 보인다. 이제 행동에 나서야겠다는 결의는 무엇보다 그의 나이에 원인이 있었을 것 같다. 40. 모색도 아니고 관조도 아닌, 책임 있는 행동에 나서야 할 나이였다.

게다가 40세는 그 부친이 순국할 때의 나이였다. 그는 부친과 같은 뜻을 좇되 길은 다른 길을 찾으려 애쓴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부친을 존경하더라도 자결을 행할 만큼 굳은 뜻을 가진 것이 존경스럽지, 자결이라는 결과에 이른 사실이 존경스럽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하지만 부친이 돌아가신 연세에 이르렀을 때까지, 다른 길을 통해서라도 뜻을 분명히 드러낼 위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두 가지 일을 나란히 추진했다. 하나는 신간회였다. 그가 모색 과정에서 참여한 두 가지 운동이 어울려 신간회의 뼈대를 이루었으므로 직책과 관계없이 그의 역할이 핵심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간회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나와 있고, 오늘의 내 고찰에서는 중점을 두지 않는다.

또 하나의 일이 <임꺽정> 집필 준비였다. 그는 동경 유학시절부터 문학에 깊은 관심과 의욕을 줄곧 가져 왔으므로 넓은 의미에서의 준비는 언제 시작한 것이라고 잘라 말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임꺽정>이라는 작품의 구상은 귀국 후 시작했고 실제 집필에 들어가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1927년 중에 세워놓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92811월에 시작해 13개월 동안 원고지 4천 매 분량의 수준 높은 글을 써낸 것은 다시없는 천재라도 웬만한 준비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강영주는 <평전>에서 첫 번째 연재기인 1920년대 말은 그가 신간회운동으로 분주한 가운데 생계의 방편 겸 일종의 여기(餘技)<임꺽정>을 썼던 시기라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2년여의 투옥과 그 후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할 수 있게 된 사정 등 예상외의 여건 변화에 따라 작품 성격에 상당한 변화가 오게 되기는 했지만, 투옥 전에 쓴 내용을 보더라도 필생의 역작을 바라본 사실은 틀림없다.

두 가지 일을 나란히 추진한 것은 <맹자>여의치 않으면 한 몸을 홀로 닦을 것이요, 뜻을 얻으면 천하를 두루 건질 것(窮則獨善其身 達則兼濟天下)”이라 한 이치에 맞는 것이다. 신간회는 혼자 하는 일이 아니었다. 운수가 맞으면 천하를 크게 건지는 길이 열릴 수도 있지만, 개인이 장담할 일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서서 함께 하는 일의 운수가 맞지 않을 때는 안으로 들어와 혼자 할 일이 필요했다.

홍명희가 평생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의 위치를 지켜 왔다는 만년의 술회는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으라는 부친의 유언을 등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부친의 향년(享年)을 자신이 채우는 시점에서 복국의 뜻을 위해 세운 두 개의 사업 중 그가 이것만은 실패할 수 없다는 필사의 다짐을 둔 것이 <임꺽정> 집필이었을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그의 기본사업으로 본다. 그에 비해 신간회는 운수에 의지해 시도한 특별사업이었다.

왜 나라를 되찾는 데 <임꺽정> 같은 작품이 필요했을까? <논어>에는 자공이 정치의 의미를 물었을 때 군비(足兵), 경제(足食), 신뢰(民信之), 세 가지를 말하고, 그중 하나를 없애야 한다면 군비를, 또 하나를 없애야 한다면 경제를 포기할 수 있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고(民無信不立) 대답한 대목이 있다. 백성의 믿음이 국가의 본질이고 경제와 군비는 수단이라는 말이다.

조선 망국 후의 항일 독립운동 중 복벽(復辟)의 비중이 적었던 것은 5백여 년 국가를 주재해 온 왕조라는 점을 생각할 때 뜻밖일 정도다. 아마 막판에 왕조 노릇을 너무 잘못한 탓일 것이다. 망국 직후의 의병 중에는 더러 복벽의 깃발이 있었지만 10년이 안 되어 3-1운동이 일어날 때는 민심이 민국(民國)’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흔히 망국의 상황에서 왕조 입장과 민족 입장을 잘 구분해 살피지 못하는 풍조를 경계해서 나는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 이렇게 썼다.

 

조선 왕조의 멸망 자체에 대해서는 일본에게 큰 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왕조가 왕조 노릇 제대로 못하면 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조선 왕조는 일본의 도움 없이도 망할 길을 오랫동안 잘 찾아 왔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진짜 피해자는 왕조가 아니라 민족사회였다. 왕조가 왕조 노릇 못한 것은 이 피해를 막거나 줄여주지 못한 하나의 주변조건일 뿐이었다.

 

그러니 백성의 믿음을 모을 주체가 사라졌다는 것이 조선 복국의 과제 앞에서 공자도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로 나타난 것이다. 군주와 왕조에 대한 믿음 대신 민족의식이 국가의 본질로서 필요하게 된 상황이었다. ‘민국의 기초가 될 민족의식의 형성, 그것이 홍명희가 학인으로서 공부하고 작가로서 글을 쓰는 목적으로 세운 것이었다.

국호에 들어 있는 민국의 의미를 지금 사람들은 민주주의 국가로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만들 당시에는 민족의 국가라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을 소유하고 있던 왕이나 황제가 아니라 조선민족이 복국의 주체가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왕조가 사라진 이제 이 민족에게 집체적 행동을 위한 조직이 없었다. 임시정부를 세웠지만 힘과 역할을 키울 길이 막막했다. 임시정부에서 뜻있는 사람을 모아 활동을 키우는 것을 하드웨어 확장으로 본다면, 민족의식의 질료를 조달하는 소프트웨어 확보가 더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였다고 볼 수 있다. 10년 전 해외활동을 포기하고 들어올 때 홍명희가 자신의 공부하고 글 쓰는 능력을 이 소프트웨어 확보의 과제에 쏟을 전망을 얼마나 분명하게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 <임꺽정> 집필에 나선 것은 확실한 작업계획을 세우고 노력을 집중하는 길에 들어선 것으로 이해된다.

 

4. 소설이었나?

 

민족의식 함양의 과제를 인식한 것은 홍명희만이 아니었다. 국내의 민족주의운동을 대표한 조선학운동이 바로 이 과제를 추구한 노력이었다. 홍명희는 조선사정연구회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문일평, 안재홍, 정인보 등 대표적 조선학 연구자들과 밀접한 교분을 유지하며 그 자신 연구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사실이 <임꺽정> 내용에 드러난다.

발표 초입에서 학인작가라는 말을 썼는데, 홍명희의 본질()학인으로, 그 응용()작가로 보는 것이다. ‘학인은 의미가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은 말인데, 내가 이 발표에서 쓰는 의미는 선비학자의 연장선이 만나는 곳에 있다. 선비도 공부하는 사람이고 학자도 공부하는 사람이지만 선비의 공부는 본인의 수신(修身)을 위한 개인적 활동인 반면 학자의 공부는 학계의 토론에 참여하고 공헌하는 제도적 활동이라는 차이가 있다.

20세기 초부터 서양에서 형성된 근대학문이 들어오면서 전통적 학자로서의 제도적 학술활동은 위축되고, 전통적 주제를 탐구하는 학자들도 근대학문의 연구-토론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홍명희 주변의 조선학운동도 그런 흐름 속에 있었다. 그런데 홍명희는 자기 공부로 자식들을 비롯해 주변사람들의 학술활동을 도와줄망정 스스로 학술활동에 나서지는 않고, 작품에 반영했을 뿐이다. 그래서 학문을 닦되 제도적 학술활동을 벌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학인이란 말을 쓴 것이다. 수신을 위한 전통적 선비의 공부와는 사회적 과제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물론 전통시대 선비 중에도 사회적 과제에 중점을 둔 경향이 부분적으로 있었는데, 실학이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근대학문을 익히고 최근까지 학자로 행세해 왔다. 그런데 지금 학자로서의 더 이상 학술활동을 포기하려는 것은 학술활동의 제도적 조건으로 인해 시야에 제약을 느끼기 때문이다. 제도적 조건이라 함은 내 업적이 학술계에 통용되는 규칙(개념과 논리)에 맞는 범위 내에서만 유효하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학술계의 규칙은 근대학문의 원리에 제한되어 있어서 내 문명사 공부 중 근대문명의 범위를 벗어나는 주제를 제대로 다루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학자에서 학인의 입장으로 돌아설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학문의 근대성이 가져오는 질곡을 홍명희가 나와 같은 시각에서 인식하지는 않았겠지만, 당시 일본인과 일본 기관들이 권위를 누리고 있던 학술계가 좋은 활동분야가 못 되겠다는 느낌은 가졌을 것 같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몸에 익힌 전통적 학인의 자세가 그에게는 편안했을 것이다. 또한 그에게는 문학이라는 유력한 선택지가 따로 있었다.

홍명희가 어려서부터 익숙한 문학 장르는 한시였다. 김진균은 벽초 홍명희의 한시에 대하여에서 홍명희에게는 한시 역시 근대의 서정을 담을 수 없는 비현대적인 양식이었던 것이라 했는데, 납득하기 어려운 의견이다. 그는 근거로 홍명희가 최남선의 <백팔번뇌>(1926)에 붙인 발문의 아래 대목을 제시한다.

 

육당은 시조를 우리의 것이라 하여 매우 숭상하나 시형으로 보아서는 그다지 숭상할 가치가 있을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런 의미로 일본의 하이꾸[俳句]를 싫어하고, 일본의 와카[和歌]와 한시의 絶句와 및 波斯[페르시아]의 루바이야트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시조를 숭상하지 아니한다. 일본의 하이꾸눈 齷齪한 일종 시형으로 거의 대표라 할 만하니, 그 악착함이 稻粒으로 조각한 佛像과 흡사하다.

 

같은 대목을 놓고 한영규는 벽초 홍명희와 한시 아비투스”(<민족문화> 40, 2012)에서 이는 한시의 절구와 같은 짧은 형식을 즐겨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한시 전체를 부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는데, 인용된 글의 해석으로는 이것이 맞다. 글자 수를 너무 적게 제한하는 정형시가 자신이 생각하는 문학의 역할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가까운 친구의 시조집 발문에 그 장르 자체를 비판하는 내용을 스스럼없이 적었을 것이다.

한영규는 변영만, 정인보 등이 한문 문장의 전통을 지키려 애쓴 것과 달리 벽초는 1920년대 이후 한문 문장쓰기로부터 거리를 두며 의식적으로 한문글쓰기를 상대화시키려 했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그러나 홍명희가 남긴 한시를 보면 꼭 거리를 두었다고 보기 어렵다. 가까운 친우들과 창수를 계속했고, 한시의 격식이 적절한 장면에서는 한시를 내놓았다. 다만 우리글 글쓰기를 전통시대 선비가 한시를 구사하던 것과 다른 차원의 목적으로 모색하게 되었고, 그 거대한 성과에 비해 한시의 성과가 약소하게 보이는 것 아닐까? 가장 긴 한시인 述懷가 옥중에서 정인보에게 보내는 글로 나온 것을 봐도 그렇다. 개인 서간과 시국 논설의 성격이 겹쳐진 이 글은 옥중의 제약된 조건 때문에 한시의 형태로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글쓰기의 목적을 홍명희가 새로운 차원에서 모색하게 되었다 함은 근대문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19339<삼천리>에 실린 “<林巨正傳>을 쓰면서에서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한 작품이란 목표를 말하기에 앞서 최근의 문학은 또 구미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양취(洋臭)가 있는 터라 하였는데, 근대문학의 형식을 받아들이되 내용은 조선 정조를 담겠다는 뜻이다. 아마 량치차오(梁啓超)소설과 정치의 관계를 논함(論小說與群治之關係)”(1902) 같은 글에서 文學救國의 뜻을 받아들였을 것 같다.

량치차오의 소설론은 전통문학과 다른 근대문학의 특징을 부각시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무엇보다 소설의 사회적 작용을 밝힌 데 큰 의미가 있다. 소설이 정치사상과 사회 기풍을 새롭게 하고 인민의 지혜를 개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그리고 쉽고 재미있다는 특징 때문에 소설이 특히 파급력이 크다는 점을 밝혔다. 민족의식의 함양과 보급에 가장 적합한 장르가 바로 소설이라는 것이다.

특히 소설의 예술적 감화력을 훈(), (), (), ()의 네 갈래로 분석한 것은 홍명희가 읽었을 경우 매우 흥미롭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 ‘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끌려드는 것이고, ‘은 읽는 동안, 그리고 읽은 뒤까지 생각이 소설 내용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는 뜻밖의 순간에 갑자기 새로운 느낌에 빠져드는 것이고 는 읽는 사람이 소설 속 인물의 입장에 빨려드는 것이다. 계몽소설의 특성을 포괄하면서도 문학의 예술성을 더 깊이 파고드는 담론이다. 어쩌면 홍명희도 량치차오의 설명을 의식하며 집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임꺽정>에도 들어맞는 특성이다. 량치차오 글의 한 대목을 옮겨 놓는다. 홍명희가 읽으며 맞아, 맞아!” 하지 않았을까?

 

소설은 항시 사람을 다른 세상에서 노닐도록 이끌어냄으로써 그 사람이 늘상 호흡하던 공기를 바꿔주는 것이 그 하나다. 인지상정이란 것이 사람의 생각과 경험치에서 우러나온다고 하지만, 행동하고도 무엇을 행했는지 알지 못할 때가 많고 익숙한 가운데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기 일쑤다. 슬프건, 즐겁건, 원망스럽건, 노엽건, 아깝건, 걱정스럽건, 부끄럽건 간에, 그런 감정을 느낄 줄은 알면서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는 늘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정을 묘사하고 싶어도 속에서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 말로 표현하지도 글로 써내지도 못한다. 그때 누가 쟁반에 받쳐 내놓듯 그 사정을 완벽하게 설명해 준다면 책상을 치면서 소리칠 것이다. “맞아, 맞아! 바로 이거야!” (小說者, 常導人游於他境界, 而變換其常觸常受之空氣者也,此其一. 人之恒情, 於其所懷抱之想像, 所經閱之境界, 往往有行之不知, 習矣不察者. 無論爲哀, 爲樂, 爲怨, 爲怒, 爲戀, 爲憂, 爲慚, 常若知其然而不知其所以然. 欲摹寫其情狀, 而心不能自喻, 口不能自宣, 筆不能自傳. 有人焉, 和盤托出, 徹底而髮露之, 則拍案叫絕曰: “善哉善哉! 如是如是!”)

 

결어: 학인 정신에 입각한 리얼리즘

 

홍명희에 대한 량치차오의 영향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루쉰(魯迅, 1881-1936)의 역할도 생각해 봐야겠다. 루쉰의 명성을 일으킨 狂人日記<新靑年>에 발표된 것이 홍명희의 귀국 직전인 19185월의 일이었다. 그 작품이 조선에 번역 소개된 것이 19278(<동광>)인데, 소설의 힘을 엄청나게 확장해서 체현하고 있던 루쉰의 존재를 중국에 있던 친우들과 연락을 계속하고 있던 홍명희가 그 전에 알고 있었을 것 같다.

소설에 대한 홍명희의 태도에 또 하나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이 톨스토이로 보인다. 193511<조선일보>에 연재한 대 톨스토이의 인물과 작품을 놓고 강영주는 홍명희가 톨스토이의 사상적 변화를 그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톨스토이 문학의 위대성을 철두철미한 리얼리즘 정신에서 찾고 있다고 했는데, 홍명희의 그 글 끝맺음이 두드러진다.

 

든든한 맘 외에 또 한 가지 욕심으로 바라는 맘은 우리 조선에도 얼른 톨스토이 같은 인물이 나서 조선 사람의 생활과 이상을 작품으로 표현하여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과학은 만인의 길이라 천품이 그다지 문제되지 않으나 예술은 과학과 달라서 첫째 천품에 달렸으므로 나는 장래 나올 사람에게 바라는 맘이 두텁다.

 

자신이 이미 벌여놓고 있는 일을 천품에 대한 겸양 외에는 그대로 묘사한 것 아닌가. 그의 겸양이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자신의 천품이 허용하는 만큼 조선 사람의 생활과 이상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일로 <임꺽정> 집필을 여기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품이야기가 나온 김에 홍명희와 함께 조선 3()”로 명성을 날리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인 최남선과 이광수의 문학과 홍명희의 문학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앞에서 최남선의 <백팔번뇌>에 붙인 홍명희의 발문 중 한 대목을 인용했는데, 그 발문에는 이런 대목들도 들어 있다.

 

육당의 님은 구경 누구인가? 나는 그를 짐작한다. 그 님의 이름은 조선인가 한다. 이 이름이 육당의 입에서 떠날 때가 없건마는 듣는 사람은 대개 그 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 그러하면 내 말과 같이 육당의 님의 이름이 조선이라 하면 육당을 허깨비와 씨름하는 장사와 같이 말할 사람이 없지 아니할 것이나 사랑은 그 길을 밟은 사람이라야 말할 자격이 있다 하니, 엄정하게 말하면 육당과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야 육당의 사랑을 비판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 아니랴.

 

육당이 자기 개인에 대한 훼예는 猶然히 웃어버리지 못할 사람이 아니나 한번 그의 님 조선에 대하여 해를 끼치는 것이라 생각하면 水火를 헤아리지 아니하도록 정이 격하여 언동이 과한 지경에까지 미치고 뉘우치지도 아니한다. 이것은 육당이 그의 님 조선을 남달리 사랑하는 사람인 까닭이다. 사상가의 육당, 언론가의 육당, 문장가의 육당은 말하지 말고 학자의 육당도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냉정한 과학자적 태도를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그 귀중한 연구에 폐해를 끼침이 없지 아니하다. 나의 말을 듣고서 <백팔번뇌>를 보면 아직 육당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거의 육당의 진면목을 눈앞에 방불히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홍명희는 최남선의 조선 사랑을 그 사랑을 함께 가진 사람으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그 표현방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시조 형식이 육당이 사랑하는 정념을 표현함에는 다시 둘이 없는 좋은 형식일 수 있다고 인정하는데, 그러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정념의 표현에 그치는 것이 불만인 것이다. 냉정한 과학자적 태도를 지켜야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도 같은 사랑이 일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홍명희는 생각했고, 그런 자세로 <임꺽정> 집필에 나선 것이다.

홍명희가 천품을 높이 인정한 또 한 사람 이광수에 대한 언급이 드물다는 사실이 뜻밖이다. 홍명희가 활동방법으로 택한 소설을 이광수가 앞서서 활용하고 있었으니 그에 대한 비평이 있었음 직한데, 싱가포르 체류 중 이광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재 중이던 <무정>을 신통치 않게 평했다는 이야기 외에는 눈에 띈 것이 없다. 최남선에 대해서는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이광수의 문제점에 대한 생각은 심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토로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갈등의 성격을 이원조의 평론 “<임꺽정>에 관한 소 고찰”(조광 48, 1938. 8)에서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춘원과 이 작자를 비교해본다면 춘원은 취재부터도 자기의 주관적인 것을 고르지마는 이 작자는 서술에 있어서도 주관적인 것이 나오지 않는다. 춘원의 <단종애사>는 그 제재가 벌써 춘원적인 데서 취재되었으며 동시에 그 묘사가 六臣의 처형이나 단종의 최후에 이를 때 그 정경을 그리는 것보다 우선 작자 자신의 동정과 감격과 비분이 지면에 나타나 있지마는, 이 작자는 임꺽정의 영웅적 행동이라든지 朝臣들이나 방백들의 秕政을 그릴 때도 추호도 흥분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작가는 종시 작품 속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춘원의 작품을 읽을 때 그 작품 속에서 춘원을 만나지 않는 곳이 없지마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한번도 작가와 대면하는 기회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작가로서 춘원과 벽초는 서로 대척적인 양극단에 서 있어 전자가 철저한 이상주의자라면 후자는 철저한 사실주의자인 때문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는 폐해를 모자라는 아쉬움보다 크게 생각한 것 같다. 이광수는 소설의 힘을 최대한 불러일으켜 자기 생각과 느낌을 독자에게 실어 보내려 했다는 점에서 아이디얼리스트이고 홍명희는 주제를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해 주는 데 힘썼다는 점에서 리얼리스트라는 대비가 당대 평론가들 사이에 통했던 모양이다. “조선 3란 높은 천품을 기린 말인데, 최남선은 표현의 기교에 몰두하고 이광수는 스스로를 돌아볼 줄 모르는 것이 홍명희에게는 안타까웠을 것이다.

나는 홍명희의 리얼리즘을 학인 정신이란 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에 인용한 <백팔번뇌> 발문 끄트머리에 냉정한 과학자적 태도를 언급했는데, 사물에 대한 최대한의 확실한 인식을 위한 노력이 정념의 절실한 표현이나 이념의 효과적 전파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의 본질을 학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타고난 예술적 천품을 발휘해서 공부를 드러낸 것은 그의 응용일 것이다. 그렇게 ()’()’을 구분해서 모자람과 지나침에 빠지지 않음으로써 작품의 뜻이 크고 오래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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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