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의 조카 집에서 며칠 쉬던 중 어느 날 아침 그 집 아이(고등학생)를 학교에 태워줄 일이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온 참이라 생각나는 대로 한 마디 했다. “며칠 사이에 나라가 홀랑 뒤집어지고 있네?” 아이 대답이 절창이었다. “뭐 지금 뒤집어지고 있는 건가요? 실컷 뒤집어져 있던 게 며칠 사이에 드러나고 있는 것일 뿐이죠.”

 

아이를 내려놓고 돌아오다 그 말을 다시 생각하니 정말 큰일이다. 나라가 뒤집어진 채로 몇몇 해를 지내온 게 아닌가. 그 동안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보며 속만 끓이고 있던 것이 아,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였구나, 확인하는 것은 시원한 일이다. 그런 일들 저지른 자들이 얼마간이라도 응징당하는 꼴을 보는 것도 통쾌한 일이다. 하지만 시원하고 통쾌한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지금까지 잘못된 일들을 얼마나 바로잡을 수 있을지, 이 사회의 역량을 생각하면 마음이 밝아질 수 없다.

 

結者解之란 말이 왜 있겠는가? 저지른 놈이 수습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수습하려면 힘이 몇 배나 들기 마련이고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기도 쉽다. 저지른 게 누군가?

 

통용되고 있는 최순실게이트가 아니라 박근혜게이트라고 하는 말이 당연히 옳다. 공권력의 사유화가 문제의 핵심인데, 최순실은 공권력 가진 자가 아니지 않은가? 비서실장은 박근혜도 피해자라 했는데, 그건 정신과 의사가 할 소리지, 비서실장 할 소리가 아니다.

 

박근혜가 저지른 일인데 박근혜가 수습할 수 없다는 데서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아마 정신과 의사들도(백선하 같은 가짜 의사들 말고) 진찰할 기회를 가진다면 박근혜에게 수습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해 줄 것 같다. 설령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럴 의지가 있으리라고 국민 다수를 납득시킬 길이 없어 보인다. 그 동안 배신의 정치니 뭐니 하면서 너무나 바닥을 드러내 보였다.

 

박근혜가 책임질 능력도 의지도 없다면 다음으로 책임질 위치에 있는 것은 새누리당이다. 새누리당 역시 능력과 의지를 의심받을 소지가 많다. 총선 참패 후 심기일전할 계기에 새로 구성된 당 지도부의 꼬라지를 볼 때 더욱 그렇다. 없는 꼬투리를 잡아 국회의장 사퇴에 목숨을 걸겠다고 날뛰다가, 막상 국기문란이 드러난 상황에서는 나도 연설문에 친구들 의견을 참고해요.” 소리를 말이라고 하는 대표가 이끄는 당의 능력과 의지를 누가 믿겠는가.

 

거국내각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한 개인, 한 당에게 정권을 맡겨 놓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권의 기반을 넓히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냐는 생각이겠다. 정말 이 사회는 정답을 너무 좋아한다. 고양이 위협을 피하려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게 정답 맞다. 누가 어떻게 다느냐 하는 생각도 좀 했으면 좋겠다. 거국내각의 거국을 누가 판정한단 말인가? 그리고 거국내각의 책임은 거국적인 것이 될 것인가?

 

진지한 마음으로 거국내각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새누리당의 행보를 보면 박근혜에게 수습을 맡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새누리당에게 맡길 마음도 안 든다. 그러나 거국내각 주장 중에는 경쟁자로서 새누리당을 무력화시키려는 당략도 끼어들고, ‘거국이란 그럴싸한 이름 때문에 현실적 고려 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거국내각을 바라보기 전에 새누리당의 재활용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싶다. 원래 물이 안 좋은 동네인 데다가 이명박의 저질 정권과 박근혜의 괴질 정권에 들러리를 서다 보니 꼬락서니가 민망하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국의 정치를 위한 자원을 꽤 모아놓은 동네 아닌가. “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원이란 말을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

 

쳐다보기도 싫어진 지 오래된 새누리당의 역할에 지금 와서 새삼스레 기대를 거는 것은 즈이들도 이제 더 물러설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총선 참패의 위기 앞에 친박 지도부 구성이라는 반동 노선으로 새누리당이 나온 것이 이미 그 절박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정상적인 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앞세웠다가는 박근혜 체제가 버림받을 위험이 컸기 때문에 이정현 같은 어릿광대 투사들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권력을 쥔 박근혜 일당이 하도 목숨 걸고 나오니까 멘탈리티가 그 정도는 아닌 사람들도 휘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휘말려들었던 사람들이 정신 차리고 새누리당의 주체로 나설 때 새누리당이 난국 수습에서 주체적역할을 맡을 기회가 생기고, 이 나라가 정치적 악순환의 고리에서 헤어날 희망이 커질 것이다. 나는 거국내각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구체적 책임을 지지 않고 거국적책임으로 돌아가는 혼란을 싫어하는 것이다. 박근혜 개인 다음으로 지금 상황에 책임을 가진 새누리당이 제대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국민의 정치 불신이 무한정 확장되는 것을 막기 바란다.

 

물론 새누리당이 책임지는 자세로 나오더라도 그것을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보는 시각을 불식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희생이 필요하다. 어떤 규모의 어떤 희생에 만족할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소속 국회의원 중 정치수준 하락에 앞장 선 십여 명만 출당시키면 만족할 것 같다. 잘 뽑아서 쫓아내기만 하면 내가 새누리당 지지자가 될 수도 있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