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선생과 조용히 앉아 이야기 나눈 일이 몇 해 전 꼭 한 차례 있다.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내가 청한 자리였는데, 막상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정작 부탁하려던 일은 꺼내봤자 잘 될 것 같지도 않아서 꺼내지도 않고, 잡담만 하다가 싱겁게 헤어졌다.

그 때 부탁하고 싶었던 것이 옛날이야기를 좀 체계적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해방일기> 집필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면서 그를 이을 대한민국 실록작업을 구상하게 되었다. 구상하다 보니 문헌으로 구할 수 있는 자료를 넘어 기억에 의거한 구술 자료를 얻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 대상으로 남 선생이 떠오른 것이었다.

남 선생은 중요한 일을 아주 많이 아는 사람이다. 1950년대에서 90년대에 걸쳐 언론인과 정치인으로서 오랜 경력이 일단 두드러진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겪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성찰을 하면서 겪어온 사람이다. 그래서 사회를 상대로 자기 지식과 경험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설명할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귀중한 사람이다.

그런 남 선생에게 회고록 작성을 권하고 싶었다. 앞서 냈던 <정치-언론 풍속사>(민음사 펴냄)의 미시적 시각을 뛰어넘어 대한민국사의 거시적 시각에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한 차례 정리할 것을 권하고 싶었다. 역사학자인 내가 문헌 조사나 관점 정리를 도와드린다면 의욕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가 좋은 회고록을 쓰도록 도와드릴 수 있다면 내가 혼자 작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체계적인 회고록 작성을 권하는 말씀을 조금 꺼내보다가, 반응이 시원찮아서 내가 도와드리고 싶다는 구체적인 이야기까지는 꺼내지도 않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나름의 회고 작업을 꾸준히 해서 작년 초에 <통 큰 사람들>(리더스하우스 펴냄)을 내고 이번에 이 책 <진보 열전>을 낸다. 그리고 이번 책에 붙일 글을 내게 청해보라고 출판사에 권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청탁을 권했을까? 쓴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물이 절반 채워진 컵을 놓고 절반이나 있네.” 하는 사람도 있고, “절반밖에 없네.” 하는 사람도 있다. 이 책 내용의 재미와 가치를 높이 평가해서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독자가 많겠지만, 나는 불만이 먼저 떠오른다. “이런 좋은 밑천, 시원하게 좀 풀어놓으시지.”

 

이 책에 담긴 내용을 <프레시안>에서 읽을 때는 이런 불만이 내 마음속에 깔려있었다. 그런데 편집자가 모아준 원고 전체를 보면서는 뭔가 새로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연재로만 읽었던 <통 큰 사람들>도 책을 구해서 봤다. 그러자 두 권의 책이 10년 전의 <정치-언론 풍속사>와 다른 점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정치-언론 풍속사>나의 문주(文酒) 40이란 부제처럼 개인적 에피소드를 생각나는 대로 적은 글이다. 그 직후에 나온 <아주 사적인 정치비망록>(민음사 펴냄)도 마찬가지다. 공적(公的)인 책임감을 묻지 말아달라고 사적(私的)’이란 말을 앞세우기까지 했다.

그런데 최근의 두 책에는 공적 가치를 바라보는 뜻이 겉으로 드러난다. 가벼운 인물스케치내지 휴먼 스토리를 표방하는 스타일이지만 인물 선정에서부터 공적 기준이 분명하다. 두 책 중 이번 책이 그 점에서 더 적극적이다. <통 큰 사람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인물들을 다루고 대중이 쉽게 흥미를 느낄 만한 측면을 서술한 데 비해 이번 책에서는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의 보여주고 싶은 측면을 서술하는 쪽으로 비중을 옮겼다. 저자의 주관을 앞세운 것이다.

<진보 열전>에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소개된다. 1남북관계에 얽힌 사람들2혁신정당에 매진한 사람들에 실린 여덟 사람은(1그룹) 저자가 언론인 입장에서 취재 대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다. 한편 3바른 언론을 위해 애쓴 사람들4언론인의 귀감이 된 거목들의 여섯 사람은(2그룹) 저자의 동료 언론인들이고, 그중에는 정치계에서도 함께 활동한 사람들이 들어 있다.

2그룹 인물들에 대해서도 남 선생 아니면 포착하기 힘든 시각이 많이 나타나 있지만, 그들이 활동한 언론과 문필 분야는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어느 사회에서나 주목받는 영역이다. 반면 제1그룹 인물들의 활동 영역은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진 분야다. 같은 사회의 바로 아래 세대인 우리도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인 만큼, 눈 밝은 그 세대 관찰자의 해설이 귀중한 것이다.

저자가 직접 겪어본 경험에 바탕을 둔 해설이기 때문에 공식적 정보에만 입각한 관점과 다른 점이 있다. 이 점을 저자 자신도 의식하고 있다.

좀 가혹한가. 거듭 말하지만 장 교수는 객관적이었고, 주최 측이 일종의 축하 행사에 인선을 잘못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나는 장 교수의 평가에 이의를 제기할 뜻은 없다. 다만 장 교수는 김철 씨를 직접 알지 못했고, 기록에 의지하여 평가한 것이라면, 김철 씨와 30여 년에 걸쳐 가끔 만나고 지냈던 나의 평가는 약간 다를 수밖에 없다.”

김철 씨 추모행사의 세미나에 발표자로 나선 장상환 씨의 엄격한 평가에 대한 소감이다. 기록에만 의지한 장 씨의 평가와 개인적 접촉을 가졌던 자신의 평가에 차이가 있다면, 더 넓은 근거를 가진 자신의 평가가 가진 의미에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개인적 접촉이 관찰의 객관성을 저해하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 인정에 끌려 모진 비판을 삼가고 확실치 않은 가치를 너무 적극적으로 인정해 주는 경향도 있지 않을까? 저자 자신도 객관성에 그리 집착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대목이 많다.

내가 남 선생을 찾아뵌 것은 그를 한국현대사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많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잠재적 사료(史料)공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책 원고를 비롯해 그의 글을 읽는 데도, 지금 이 글을 쓰는 데도 사료로서의 가치를 앞세워서 본다. 그와 그의 글을 다른 각도에서 평가하고 음미하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제 눈의 안경이라 하지 않는가.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사료로서의 측면이다.

그를 만날 때 내가 청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사료로서 객관성을 확충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쪽으로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주관적인 서술을 계속해 왔다. 나로서는 실망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이제 그의 글에서 오히려 더 큰 만족감을 얻는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두 그룹의 인물들에 대한 서술 기조에서 온도 차이를 느낀다. 2그룹 인물들에 대해서도 애정과 유대감을 느끼는 대목이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객관성을 유지하는 편인데, 1그룹 인물들을 놓고는 개인적 경험에 입각한 주관적 견해의 비중이 크다. 2그룹 인물들은 도중에 고생을 했건 뭐를 했건 나름대로 뜻을 펴는 데 성공한 이들인 반면, 1그룹 인물들은 역사의 표면에 제대로 나서지 못하고 그야말로 파묻혀버린데 대한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정치에서는 흔히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만이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훌륭한 사람이 많다. (...) 그러므로 세속적 기준에서는 비록 실패했다 하더라도 진정한 인재를 알아보고 그 훌륭함을 인정하는 데 인간의 구제가 있고, 역사의 올바름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실패한 정치인 가운데서 오히려 자주 진실한 정치인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들 가운데서 오히려 인간적인 면을 느끼기도 하고, 인간의 길을 보기도 한다.”

너무 냉소적인지 모르지만, 한국 정치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다. 성공한 사람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것은 우연한 일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성공의 조건은 훌륭한 인품이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는 말이다.

해방공간을 들여다보면서 굳어진 생각이다. 민족사회의 주체적 발전을 바라본 민족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이 바로 좌절의 조건이었다. 김규식 선생을 보라. 미군정의 신뢰를 누구 못지않게 얻은 인물인데도 민족주의를 등지지 못해서 경륜을 펼칠 수 없었다. 여운형 선생을 보라. 좌익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여망을 모은 사람인데도 외세 의존을 거부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외세에 등 대고 그들을 배제한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그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승승장구하는 세상이 되었다. 좋은 뜻을 가진 이들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없는 풍토가 오랫동안 펼쳐졌다.

김규식과 여운형을 비롯한 소위 중간파가 곧 민족주의 진영이었다. 외세에 의존하는 극우와 극좌 세력이 현실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 틈바구니에 끼어 중간파라는 초라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사실 자체가 민족주의의 설 땅이 없던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이북에서는 민족주의가 힘을 쓰지 못하면서도 명목상의 존중은 받은 반면, 이남에서는 분단건국이 가시화되면서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중간파 주요 지도자 일부가 정부 수립을 전후해 이북으로 넘어갔고(월북), 또 일부는 전쟁 때 북쪽으로 모셔졌다(납북).

남 선생 자신이 진보 열전이란 제목에 다소 불만을 느낄 것 같다. ‘진보’, 너무 대중없이 쓰이는 말 아닌가. 1그룹만 놓고는 혁신 열전이란 제목도 생각해 보았음직하다. 하지만 혁신도 한국에서 고생이 많았던 말의 하나다. 어느 방향의 혁신이란 말인가? 굵직한 지도자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1950년대 남한에서 남아있는 중간파가 제대로 표현의 길을 찾지 못해 혁신계란 이름으로 낙착된 것도 서글픈 사실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요즘 혁신 핑퐁을 보며 더욱 서글퍼진다.

혁신계의 유래가 해방공간의 중간파에 있기는 하지만 1950년대 이후 혁신계의 정체성에는 애매한 점이 많다. 이 책 속에도 고정훈 씨를 놓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혹시 정보기관의 끄나풀로 의심을 받았다느니, 박진목 씨를 놓고 혹시 에이전트가 아니냐, 정계교란자가 아니냐 하는 오해를 샀다느니 하는 대목이 있거니와, 진보당사건 이후 현실적 근거를 잃은 혁신계는 그 존재 자체가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

혁신계는 한국 정치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존재다. 독재정권과 보수야당의 양당체제에 수용되지 않는 넓은 영역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영역이 넓은데다 현실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정체성을 명확히 밝히기 어렵다. 의미가 큰데도 정체성이 명확치 않은 존재를 놓고는 객관적 서술보다 주관적 서술이 그 존재를 더 잘 드러낼 수도 있다. 존재가 어느 정도 드러난 뒤라야 객관적 파악의 시도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 선생의 주관적 서술이 큰 만족감을 주는 것 아닐까.

 

근년 근대성의 의미에 생각을 모으다 보니 역사학을 포함한 근대적 학문의 일반적 특성을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보이는 것에 집착해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는 경향도 중요한 특성의 하나로 떠올랐다. 19세기 중엽에 나온 어느 글 제목에 접했을 때 떠오른 생각이다. 그 생각을 이렇게 적은 일이 있다.

프레데리크 바스티아가 1850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이란 글에서 이 우화의 허점을 지적했다. 유리창이 깨지지 않았다면 빵집 주인이 그 돈을 얼마든지 다른 소비행위에 쓸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유리가게 주인의 이득이 빵집 주인의 손실보다 작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손해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바스티아의 글 제목에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근대 학문에는 분야를 막론하고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일반적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경제학에서는 바스티아의 지적을 바탕으로 기회비용개념이 보완되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해 왔기 때문에 그런 보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보완이 어쩌다가 단편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는 일반적 경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7622)

이제 남 선생의 새 책 원고를 앞에 놓고 3년 전의 만남을 떠올리며, 나 자신 보이는 것에만 매달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를 사료(史料)공장으로 여기고 생산성을 높일 생각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내놓는 사료는 공장제품이 아니라 수공예품이다. 작가의 마음속에서 여백이 어우러진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실마리가 남아있다.

만년의 한우근(1915-99) 선생님께 20여 년 전 얻은 가르침 하나가 생각난다. 나는 그때 데이터베이스 기술이 한문 자료에 적용될 경우 역사학계에 일어날 변화의 전망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에 관한 내 생각을 듣다가 당신의 경험을 말씀해주셨던 것이다.

그분이 중년에 하버드옌징연구소에 1년간 체류할 때, 욕심나는 자료는 많은데 복사비가 비싸서 갖고 돌아온 자료 대부분이 손으로 베껴 쓴 것이었다고 한다. 마음껏 복사해 가져오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쉬웠는데, 수십 년 지나는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며 은근한 미소를 띠고 하신 말씀이 귓가에 남아있다. “욕심껏 복사해서 잔뜩 가져왔다면 베껴 온 자료를 그 동안 활용한 만큼 알뜰하게 활용하지 못했을 거야.”

사료에 대한 갈망은 역사학도에게 숙명이다. 더 많은 자료를 바라는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식욕이 숙명인 인간도 나이가 드는 데 따라 양()에 대한 집착에서 질()로 마음이 넘어가는 것처럼, 역사학자도 성숙에 따라 자료의 질을 가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남 선생은 유신 말기에 언론계에서 정치계로 옮긴 후 17년간 집권당 소속으로 노동부장관, 당 정책위의장 등 현직(顯職)을 많이 맡았다. 그런데도 그를 양지쪽만 찾아다니는 해바라기로 보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진흙 속의 연꽃으로 아끼는 사람이 많다.

정치에 깊은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그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평가를 할 생각이 없다. 그가 스스로 정치를 마치 학문하는 것처럼 했다고 한 말을 어디서 본 듯한데, 내게는 그가 정치계에서 문화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궁중의 광대(joker)처럼. 권력 가까이 있으면서도 권력을 직접 만지지는 않고 초연한 위치에서 예술의 형태로 논평을 내놓는 역할.

20세기 후반 한국의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졌으면서도 명확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주제가 혁신계만이 아닐 것이다. 남 선생이 개인적 관계에 입각해서 그려주는 혁신계의 모습은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 시야를 밝혀준다. 사실화 아닌 추상화의 가치를 음미할 줄 아는 경지로 나아가고 싶은 의욕을 역사학도에게 키워주는 글이다. 이제 공장(工場)’ 아닌 공방(工房)’의 역할을 그에게 기대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