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를 역사로 다루는 역사 에세이스트김기협 역사학자

조성일 기자  |  pundit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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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호] 승인 201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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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시사로 보고 시사를 역사로 보는’ 역사학자 김기협(66, 사진)은 지난 100년간의 한반도 근현대사를 조망하는 작업에 매달려왔다. 2010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와 2015년 전10권으로 완간한 《해방일기》(너머북스)에 이어 최근 《냉전 이후》(서해문집)를 내놓음으로써 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관점’에서 한반도 근현대사를 조망하는 3부작 작업을 완결했다. 이제 ‘서세동점의 끝’이 언제 어떻게 될지를 조망하는 애초 계획의 최종판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는 그를 경기도 일산 대화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완결판’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아요. 근현대사라면 ‘3부작’의 완결 의미가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서세동점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앞으로도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서세동점이 계속된다고 보고, 그 끝나는 시점까지가 내 작업의 여정입니다.”
그랬다. 김기협의 지금부터의 작업은 ‘미래사’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그의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역사학자’의 연구범주는 최대한 늘려 잡아도 ‘지금’까지이다. 그렇다면 지금을 넘어선 ‘내일’은 역사학자가 아닌 미래학자가 나서야 할 분야가 아닌가. 활용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미래사) 서술을 위해서는 ‘가정법’을 동원해야 함에도 그가 이 작업에 나선 이유는 뭘까.

서세동점 관점서 조망한 3부작
“한반도의 분단 원인은 ‘서세동점’의 관점에서 찾아야 합니다. 서세동점의 의미가 19세기 말에는 단순히 군사적 정치적 차원에서 진행됐지만 지금은 정신적인 것까지도 아우르는 것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대장정의 첫 출발을 알렸던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는 민족국가를 잃어버리는 과정에 대해서 천착했는데, 사실 대부분이 망국의 결과에 대해서만 주목했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던 점을 감안하면 의미 있는 작업이다.

또한 그는 10권의 ‘대작’으로 내놓은 《해방일기》를 통해서는 분단의 근본 원인을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요인이 더 크다고 진단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합병됐던 민족국가가 해방공간에서 분단으로 이어져 오늘날이 이르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요인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체제’였다는 것. 그런데 이런 냉전체제는 소련과 동유럽의 해체로 종식을 고하지만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그 체제가 해소되기는커녕 더 공고해지고 있다고 그는 이번에 낸 《냉전 이후》에서 주장한다.
“내가 이 작업에 나서는 것은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바꿔서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민족문제를 제대로 이해해보자는 의미에서입니다.”

물리학도 출신 역사학자
사람들은 김기협을 ‘무소속의 역사평론가’ 또는 ‘역사 에세이스트’라 부르기도 한다. 엄연한 제도권 대학에서 역사학과 교수를 지냈음에도 그에게 이런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은 아마도 그의 삶과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전도유망한 물리학도였다는 사실부터가 역사학자 김기협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전복시킨다.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를 다니던 시절 2등이 보이지 않는 1등인 천재였고, 이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던 재원이었다.

“고3까지는 존재감 없는 아이였는데, 고3 올라가 모의고사를 보면서 두각을 나타냈어요. 친구들도 의아해했지요. 과외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닌 전혀 공부 잘 할 환경이 못 되어서 더더욱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그가 역사학자가 되었던 것은 이과적 삶이 가져다 줄 갇힌 생활이 싫어서였다고 술회했다.
“인문학은 밥 먹고 사는데 급급할 것 같아 이과로 진학하라는 어머니의 요구에 따랐는데, 평생 군대생활처럼 판에 박힌 생활을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도망쳤지요.”

역사학과로 전과
그가 역사학과로 전과한 것도 원해서가 아니라 전과가 가능한 과를 찾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박사학위까지 받고는 대구의 계명대에서 역사학자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다.

“아버지가 남긴 유고를 어머니가 역사학자인 제게조차 비밀로 했어요. 다 떠나서 한 마디로 저를 역사학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렇다면 교수직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인정하지 않는데….”
여기서 잠깐 그의 부모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아버지는 역사학자이자 서울대 교수로 《조선역사》를 쓴 김성칠이었고, 어머니는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첫 여학생이자 한국어 어원 연구의 개척자였던 전 이화여대 교수 이남덕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9·28 수복까지 피난가지 않고 3개월간 공산당 치하의 서울에서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의 본질을 겪었던 이야기를 담은 일기를 남겼었다. 이 일기는 민족사의 비극을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어머니가 1987년 말 공개할 때가지 아들에게조차 비밀로 했던 것이다.
그는 반공독재상황에서 자식들에게 혹 누가 될까봐 혼자 지켜왔다고는 하지만 어머니의 이 같은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급기야 어머니와 불화를 빚어낸다.

어머니와 불화
오랫 동안 어머니의 “훌륭한 점보다는 모순과 위선을 더 많이 생각하며 살았”던 그는 2011년 치매를 앓던 어머니와 그간의 불화에 대해 화해했다.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3남1녀를 키우며 교수로, 또 불교 수행자의 삶을 살다 치매를 앓던 어머니가 2007년 하안거 중 쓰러진다. 그때 그는 곁에서 어머니를 간병하며 ‘시병일기’를 쓴다.

“미국에 사는 큰형과 어머니 지인들에게 병세를 알린다는 생각에서 블로그에 시병일기를 썼는데, 결국 내가 힐링을 하는 효과를 얻었지요.”

2년여에 걸쳐 시병일기를 쓰면서 그는 불화했던 어머니와 화해한다. 어머니의 병상 스케치를 하면서 결국 자신의 자아와 대면했고, 결국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화해와 치유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병일기는 나중에 《아흔 개의 봄》이란 제목의 책으로 세상 독자들과 만났다.

이 책에서 그는 아버지가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과 같은 덮여 있던 가족사의 비밀까지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는 부모님의 결혼과정에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도 불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술회한다.
병상생활이 어머니의 제2의 인생이라고 생각한 그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웨하스를 날름 삼키기도 하고, 어머니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면서 사랑을 표시하기도 했다.

제도권과 거리 둔 삶
그런 어머니마저 3년 전에 작고하자 그는 이제 완전한 고아가 되었다. 그렇다. 이 ‘고아’라는 말은 어쩌면 그의 인생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나와 중앙일보에서 객원으로나마 글을 쓰고 있었지만 보수화가 지나치게 심화되자 미련 없이 그만둔다. 또 다시 제도권과는 거리를 둔 ‘나 홀로의 삶’을 결행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사실 이 땅에서 그 어렵다는 전업 저술가의 삶을 살고 있다. 그가 내는 책들이 설령 ‘베스트셀러’라는 헌사가 바쳐진다고 하더라도 인문, 사회과학 분야는 1만 부 넘기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삶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랬다. 나는 그에게서 가난한 선비의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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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