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째 기획위원, 편집위원으로 이름 올려놓고 지내던 프레시안에서 퇴직합니다. 기고문도 그만 보내려 합니다. 앞으로 따로 청탁받지 않고 내가 내켜서 쓰는 글은 이 블로그에만 올리려 합니다.

 

다시 돌아보며 프레시안과의 인연에 깊은 고마움을 새삼 느낍니다. 특히 세 분에게 여러 해 동안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근성 고문, 박인규 대표, 강양구 기자.

 

창간 대표인 이근성 고문과의 오랜 인연으로 시작되었죠. 고교 1년 후배이자 같은 과 후배인 이 고문과는 학창시절부터 알던 사이인데, 중앙일보에 객원으로 걸어놓고 지내던 시절에도 내 데스크를 많이 맡아준 분이죠. 같은 때 중앙일보를 빠져나오며 그분이 "선배, 노는 김에 염불한다고, 심심하면 우리 글 좀 써줘요." 하는 바람에 "페리스코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인터넷신문의 장래에도, 프레시안의 노선에도 확실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큰 무게를 두지 않았습니다. 두어 해 지난 후 당시 편집국장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기고를 중단하고 몇 해를 지내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2008년 <뉴라이트 비판> 집필에 들어갈 때 강양구 기자의 도움을 받아 프레시안 연재를 하면서 기고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기고를 중단한 지 몇 해 되어 서먹한 감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입사한 강 기자는 '황우석 사태' 때 그 역량과 태도를 높이 평가했던 분이었고, 그분이 청하는 덕분에 프레시안에 다시 접근할 수 있었지요.

 

그 후 몇 해 동안 강 기자가 데스크를 맡아주면서 내 집필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생각이 명민하고 활달한 분이어서 내 집필 의도를 잘 이해해 주고,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하는 방향으로도 생각을 넓히도록 많은 자극을 주었죠. 중앙일보에서 이근성 고문의 도움을 받은 것과 함께, 내 언론활동에는 정말 데스크 복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강 기자와 손발이 잘 맞아 신나게 일하고 있는 몇 해 동안 박인규 대표의 도움이 은근히 커지고 있었습니다. 강 기자의 도움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것과 달리 박 대표의 도움은 완만하고 포괄적인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세계관을 공유하는 폭이 매우 넓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된 것이죠. 그분과의 협력관계는 프레시안의 틀을 벗어나서도 계속될 것으로 내다봅니다.

 

그밖에도 프레시안의 많은 분들에게 좋은 도움을 얻었지만, 특히 세 분의 도움은 내 프레시안 활동에 그치지 않고 내 일생의 과업을 뒷받침해준 것이라는 점에서 따로 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분, 그리고 프레시안 덕분에 <망국의 역사>-<해방일기>-<냉전 이후>를 잇는 작업이 가능했습니다.

 

대학에 있었다면 작년에 퇴직했겠죠. 그런데 더 하고 싶은 일이 남아있어서 여태까지 뭉개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이후> 와 <세세동점의 끝>. 아마 내년 이맘때까지 두 작업을 마치고 나면 더는 머리아픈 글 안 쓰게 되고, 프레시안에 의지할 필요도 없어지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지금 시점의 퇴직을 결정하게 된 데는 나름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퇴직 사실만 알려드리고 그 계기는 후일담으로 알려드리기 위해 아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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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