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글래스'란 말을 우리 어렸을 땐 안 썼다. '색안경' 아니면 '라이방'이었다. 순우리말과 한자어의 감각이 자리 잡힐 만하게 되었을 때, '라이방'은 어느 쪽도 아니므로 서양말이거니 했다. 그런데 조금 더 커서 영어도 익히게 되자 서양말도 아닌 것 같았다.
꽤 오래 지난 후에 '라이방'이 'Ray-ban'의 일본식 발음임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완전히 확인하지는 않고 있지만 아마 색안경의 어느 제품 이름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복사기가 한 때 '제록스'란 이름으로 통한 것처럼 어느 시절에 '레이밴' 제품이 색안경 시장을 주름잡은 것이라고.
오늘 아침 박 선생님이 전화해서 새것과 다름없는 '레이 밴'을 꽤 싼 값에 살 수 있다고 튕겨줬다. 전화로 아내 양해를 구해 매입을 결정한 다음 주민등록등본을 팩스로 보내고 돈을 송금해 주니 오후 늦게 차량등록증과 보험증서까지 다 챙긴 차가 왔다. 집 앞 주차장에 세워 놓고 있다가 늦게 퇴근한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문득 '라이방' 생각이 났다. 별 뜻 없이 실없는 생각이다.
나이 지긋한 스펙트라를 중고로 구해 여러 해 잘 탔다. 근년에 별로 운전을 않으니 차가 팍팍 늙어가는 것 같아, 앞으로 더러 전주에 차로 다닐 일도 있을 생각을 하니 난감하기도 하던 참이었다. 10월 1일 바람 심하던 날 밤에 모처럼 아내 모시러 차 몰고 나갈 일이 있는데, 주차장에 나가 보니 바로 옆 파출소의 순경들이 모두 나와 내 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차장 모퉁이의 꽤 굵은 버드나무가 뽑혀 내 차를 덮치고 있었던 것이다.
울고 싶은 참에 뺨 맞은 격으로 퇴출 결정을 내렸다. 아직 기본 기능이 살아있는 놈을 무덤으로 보내기가 마음 아프지만, 이 사회의 소비 행태가 10년 전과도 다르다. 몇 해 전의 내 사정 같으면 바로 이런 차 얻어걸렸으면 하고 열심히 찾았을 텐데.
아내가 대충 둘러보고 마음에 든다고 해서 다행이다. 아무리 봐도 잘 생긴 차는 아니다. 하지만 기능 탄탄하고 비용 적게 드는 차를 구해 놓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새 차를 사본 것이 근 20년 전이고, 중고 세 대를 겪어본 후에 "새것과 다름없는" 차를 몰게 되어 금석지감도 느낀다.
좌석이 둘뿐인 밴(van)을 사기로 하면서 그래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뒷좌석에 사람 태운 기억이 별로 없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누구 태웠을 때, 누구 태웠을 때, 하며 두어 차례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우리 생활방식에 비추어 크게 불편할 일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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