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전화를 받았다. 헌법재판소 아무개 사무관이라며, 한 번 강연을 와 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전화를 했다고 설명한다. 헌법재판소?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습헌법' 이야기를 놓고 그곳 재판관들이 "이완용보다 나을 게 없는 놈들"이라고 욕하고, 통진당 판결 때는 "이완용보다 더 나쁜 놈들"이라고 욕했던 그 기관 아닌가. 거기서 강연을 해달라고?

 

멈칫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저쪽에서 묻는다. "헌법재판소가 어떤 기관인지 아시는지요?"

 

뭐라고 대답하나, 잠깐 망설이다가 뒤집어 물었다. "헌법재판소가 어떤 기관이라고 내가 생각하는지 아시는가요?"

 

어리둥절한 기색이다. 그래서 설명을 해줬다. 그 기관에 대해 공개적으로 무척 심한 욕을 한 일이 몇 번 있다고. 그래도 초청을 해준다면 헌법재판소에 대한 도발을 가급적 자제하며 충실한 강연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겠지만, 혹시 그쪽에서 내가 그 동네 욕한 사실을 모르는 채로 나를 초청했다가는 관계자들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난감해 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잘 검토해 보고 방침을 확실히 정해서 연락해 달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는 강연 내용보다 강연자가 어느 편이냐 갖고 문제삼는 풍조가 있지 않습니까? 조심해야죠."

 

제헌절에 즈음해 헌법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초청이라면 참 좋은 기회다. 국가 운영에 있어서 권력과 권위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요즘 더듬어보고 있는데, 전통시대의 정치적 권위가 왕실의 혈통에 있었다면 근대국가에서는 헌법이 권위의 주체 아닌가. 헌법의 의미를 기능적 차원을 넘어 모색하는 강연은 생각을 정리할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평화재단 대담에 앞서 윤여준 선생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다가 무슨 말끝에 그 얘기를 하니 무척 재미있어하신다. 나중에 대담 진행 중 청중 한 분이 묻기를 내 주장대로 외부 형세를 중시한다면 당시의 반민족행위자들을 관대하게 보는 쪽이 되지 않겠냐고 했다. 그래서 사실이 그렇다고 했다. 이완용을 헌법재판관들과 비교하는 데 들먹이다가 생각해 보니 이완용 못지않거나 더 심한 짓이 요즘도 많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이 대목에서 윤 선생이 아까 들은 얘기가 생각나는지 빙긋이 웃으며 묻는다. "칼럼에서 헌법재판관들을 심하게 비판하셨다는데, 혹시 그쪽에서 부르지는 않던가요?"

 

그래서 아침에 전화 받은 얘기를 청중에게 밝혔더니 막 뒤집어진다. 많은 사람 앞에서 얘기하던 중 이처럼 열광적인 반응은 처음이다. 평화재단에서 녹음파일을 얻어 여기 올려놓을 수 있을지 알아봐야겠다. 맨날 딱딱한 얘기만 늘어놓는 후진 동네 찾아와 주는 분들에게 좋은 서비스가 될 텐데...

 

지금도 내 초청을 성사시키려고 애써주고 있을지 모르는 헌법재판소의 어떤 분들에게는 전화 이야기를 너무 서둘러 깨놓는 것이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 덕분에 어제의 대담 청중을 즐겁게 해드렸으니, 미안해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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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