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교과서 집필진을 공모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응모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특별히 용감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겁은 좀 없는 편이고, 재미있는 일은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흑백론을 싫어하기 때문에, 무슨 나쁜 일이 있어도 그냥 반대만 하기보다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교과서 국정화가 나쁜 일인 것은 분명한데, 이 나라 정부가 싸매고 하는 일이라면 그 일에 정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힘껏 살펴보고 따져봐야 극복을 하더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지난 주 전라도와 강원도 단풍 구경을 한 바퀴 돌고 금요일에 돌아와 보니 공모 마감이 임박해 있다. 누구랑 차분히 의논할 겨를도 없고, 혼자 앉아 궁리해도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응모하면 재미는 톡톡할 것 같은데, 너무 험한 판 아닐까? 내지른 책임을 지려면 하려는 다른 일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말려들 위험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 끝에 일단 응모를 전제로 출사표(出師表) 하나를 써보기로 했다. 응모하는 행위를 나 자신에게 최대한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일요일 저녁에 이런 글을 뽑아보았다.
국정 역사교과서 집필진 공모에 응하며
나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에 반대한다. 그리고 지금의 국정화 사업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정부가 국정화 추진을 장담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집필 능력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집필진 참여를 시도할 책임감을 느낀다. 너무 나쁜 교과서가 나오지 않도록, 나아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교과서가 나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는 마음이다.
이 응모가 어떤 결과를 이끌어낼지 예단할 수 없다. 상식적인 추측은 퇴짜 맞고 끝나는 것이다. 2008년에 낸 <뉴라이트 비판> 이래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해방일기>를 거쳐 <냉전 이후>에 이르기까지 내가 밝혀온 한국근현대사의 관점은 국정화 추진세력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이 글로 공모에 응하는 입장을 밝히는 것도 그들의 비위에 거슬릴 것이다. 응모가 거부될 경우 내 역할은 쉽게 끝난다. 집필진 ‘공모’라고 진행하는 절차가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그리고 갖지 않은 것인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이렇게 쉽게 끝나지 못하고 집필진에 참여하게 될 경우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할 일이 적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좋은 교과서’가 되도록 애쓰는 데 앞서 ‘나쁜 교과서’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그보다도 더 앞서는 일은 편찬 과정이 합당하게 진행되는지 지켜보고, 잘못된 일이 있을 경우 관심 가진 이들이 문제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알리는 것이다.
국정화와 관련해 이름을 퍼뜨린 누구누구처럼 학자로서의 기본 자질 없이 학자 행세 하는 사람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역사 공부 한 사람이라면 국정화에 반대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경로로 반대 의사를 밝히고 참여 거부를 선언하는 마당에 왜 유독 나는 공모에 응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반성이 필요한 일이다.
공부를 본업으로 삼으면서도 20여 년간 언론계에 의지해 활동해 왔다는 점을 먼저 생각한다. 지금도 내가 가장 강한 소속감을 느끼는 것은 학교나 학회가 아니라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이다. 따라서 이번 국정화 사태에 임해서도 학교나 학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프레시안>을 통해 이 사회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학자로서 내 한 몸 지키기보다, 사태의 성격을 독자들이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드릴 수 있는 길을 찾고 싶다.
그렇다고 잠입취재나 간첩활동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쁜 교과서를 막고 좋은 교과서를 만든다는 기본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집필진에 들어가게 된다면 내 의견을 당당하게 개진하고 내 소신에 따라 집필할 것이다. 편찬 작업이 공정한 절차와 기준을 지키지 못하거나, 집필진 구성의 편향성 때문에 공론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진행될 때라야 여론에 호소할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국정화의 실패를 나는 예상하지만, 실패를 통해 이 사회가 얻는 것이 많기를 나는 바란다. 여론조사에 국정화 지지가 3분의 1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정화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들이 실패의 이유를 반대편의 ‘힘’으로만 이해한다면 이 사회를 위해 불행한 일일 것이다. 나는 국정 역사교과서가 가능한 한 좋은 것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래야만 실패로 돌아갈 때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더 잘 드러날 것이다.
며칠째 이 일로 고심하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응모할 마음을 굳혔다. 하나는 안재홍 선생이다. 1947년 초 그가 민정장관으로 군정청에 들어갈 때 미군정 수뇌부는 조선의 민족주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었고 조선인 간부들은 기득권층(지주-친일파 포함)을 철저하게 대변하는 분위기였다. 얼굴마담으로 민족주의자가 필요해서 교섭이 들어온 것이지만,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의 회고문 “백범 정치투쟁사” 중 민정장관 취임 결정을 김구에게 알리는 장면에서 그의 고심을 알아볼 수 있다.
1주일을 두고 고심한 나머지, 나는 취임 수락을 하여 놓고 비로소 백범께 그 수락 사유를 말씀하였더니, 그분은 예에 의하여 그 구수한 웃음을 띠면서 “승낙을 이미 하였으면 도리가 없는 것이고, 승낙하기 전이라면 자기로서는 단연 민세의 민정장관 취임을 말라고 했겠다”고 하시며, “금후 그대는 도로무공(徒勞無功)일 것이고, 결국 득담(得談)만 많이 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나는 의심없이 반대하실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에, 그분께는 사후 양해의 의미로 승낙 직후 말씀하였던 것이었다.(<민세 안재홍 선집 2> 441-442쪽)
김구는 안재홍이 가장 존중하던 상대였다. 그런데 그가 반대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미군정이 조금이라도 더 조선 인민의 복리를 위해 운영되도록 애쓸 기회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구의 말대로 안재홍은 민정장관 위치에서 미군정의 정책에 큰 영향도 끼치지 못하면서 고생만 죽도록 했다. 그러나 비민족적-반민족적 인물이 민정장관 자리까지 차지하고 아무 견제 없이 비민족적-반민족적 정책을 추진했을 경우를 상상해 본다면 안재홍의 보이지 않는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또 하나 떠오르는 사람은 아버지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 석 달을 지낸 사연이 그분 일기 <역사 앞에서>에 적혀 있다. 연말에는 1-4 후퇴를 앞두고 부산으로 피난했다. 5세, 3세, 1세의 세 아이를 데리고 무난히 피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직전 전사편찬위원회에 상무위원으로 참여해 대령 급 문관 신분으로 차량을 제공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 자리에 오래 있지 않았다. 1951년 1-2월 두 달 동안 일기가 끊어졌다가 3월 들어 다시 시작할 때는 매우 곤궁한 형편에 몰려 있었다. 전사편찬위원회에 관한 일이 스스로 마음에 석연치 않아서인지 일기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1950년 11월 19일자 끝에 “전사편찬회 일을 보아달라는 교섭이 있었다.” 한 줄이 달랑 붙어있다.) 곁에서 일하던 강신항 선생의 설명으로 전후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위원회가 전쟁 중에는 자료 수집만 하지, 편찬에 착수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강하게 내세웠고, 상급자인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이 원칙을 수락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부산에 자리 잡자마자 편찬에 착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이 지시를 위원장-부위원장이 막아내지 못하자 사표를 내고 나왔다는 것이 강 선생의 설명이다.
안재홍 선생과 아버지, 이 사회가 몹시 어렵던 시절에 식자인(識字人) 노릇 제대로 하려고 무척 고생하신 분들이다. 그때에 비하면 훨씬 편해진 세상을 살면서 그분들에게 부끄러움 덜 느낄 길을 찾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금융조합 과장직을 버리고 서울대 사학과 조수(조교)로 들어갔을 때의 일기 한 대목(1946년 4월 16일자)이 떠오른다.
아침에 집을 나서서 법전(法專)에 가려고 산길을 향해 가니 모든 사람이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다. 그들은 시의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로서 도심지대에 출근하러 나가는 길이고 나는 산을 넘어 시외에 있는 학교로 향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긴 하나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나는 만인(萬人)과 길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지위와 많은 보수와 안정된 생활을 박차버리고 스스로 형극의 길을 가려 하는 나의 지향(志向)은 확실히 이 많은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글을 써놓고 다시 생각을 굴려본 후 응모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의 냄새 때문이다. 제갈량도 출사표를 써서 스스로 납득할 만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면 군사를 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성이 오래 시달린 상황에서 조(曹)씨의 침공이 급박하지도 않은데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려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떠올린 두 분의 처지를 갖다댄 데서 특히 냄새가 심하다. 내가 임한 상황은 그분들처럼 절박한 게 아니다. 재미 찾아 일 만들고 싶은 마음에 선인들의 어려움을 가리개로 삼으려는 술책이 내 눈에도 천박하다.
일할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할 일을 충분히 찾지 못한 나이였다면 스스로 납득이 덜 되더라도 나설 생각을 더 많이 하겠다.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선다면 더 잘 배울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충 짐작하게 된 것으로 충분하다. 그 짐작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만 해도 내 할 일이 넘친다.
아버지 일기 1950년 1월 1일자에 적힌 "새해의 맹세" 중 "남의 잘못, 학설의 그릇됨을 타내지 말고 제 바른 행동과 제 깊은 공부로써 이를 휩싸버릴 것"이란 대목이 떠오른다. 재미 너무 찾지 말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사는 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경이여, 안녕! (4) | 2016.01.01 |
---|---|
망년회 / 개인주의 (1) | 2015.12.25 |
'라이방'? (0) | 2015.10.16 |
'조반 독립' 만세! (2) | 2015.09.27 |
부활의 꿈 (2) | 2015.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