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신민족주의’가 필요한가?

 

이 책을 쓴 목적을 간단히 얘기한다면 ‘신민족주의’를 제안하려는 것이었다. ‘신민족주의’란 말이 지금까지 나온 것 중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안재홍의 제안이다. 그는 해방 후 한 달 남짓 지난 1945년 9월 22일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란 원고지 약 2백 매 길이의 글을 발표했고, 이 글은 얼마 후 소책자로도 발간되었다.

 

이 글의 구성을 보면 “서언”에 이어 제1장 “국제적 개관과 신민족주의”, 제2장 “조선 정치철학과 신민족주의”, 제3장 “결론으로서의 신민족주의”로 되어 있고, 아주 짧은 제4장만이 “신민주주의의 건국이념”으로 되어 있다. 해방을 맞아 정치적 이념의 기준을 제공하기 위해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함께 제시하면서도 국학 연구에 매진해 온 민족주의자로서는 민주주의보다 민족주의 쪽에 할 말이 많았을 것이 당연한 일이다.

 

황급하게 작성된 글로 보인다. 해방 당시까지 가장 엄격한 사찰 대상의 1인이었고 해방 직후에는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활동에 바빴던 안재홍이 8월 말 건준 부위원장을 그만둔 후 서둘러 작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다른 글에 비해 체계가 어지럽고, 그가 제시한 논점들(어원 설명 등) 중에는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왜 ‘신’민족주의를 제안하느냐 하는 뜻은 분명하다.

 

“각자의 민족은, 그 자체가 고유한 문화를 가진 까닭에, 어느 민족의 현재의 사태와 및 그 전도와를 형성함에 당하여는, 반드시 그 민족의 과거가 영향되는 것이다. (...) 일 인민에게 적정타당한 사회도덕의 구현으로서의 진정한 입법은, 반드시 당해 인민의 과거 문화의 총화인 역사의 소산이어야 한다. (...) 그러므로, 문화의 전통을 거세한 합리주의적인 인공적인 국제추수주의는, 일편 공식으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보다도 민족적 개아성을 적정하게 발휘시키는 것은, 전 국제협동의 분야에서 각각 독자의 이채를 발양케 하는 것이니, 그는, 사회주의 실행의 국가에서도 각 개인의 천품과 능률에 따라 그 사회적 임무와 지위를 달리하게 됨과 전연 동일한 이의이다.”

 

해방을 맞아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를 앞에 두고 건국의 원리로서 민족주의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민족주의’면 됐지, ‘신’ 자를 붙일 필요가 없다. 더 중요한 뜻은 이런 말에 담겨 있다.

 

“근대에 있어 국제적 협동관련성을 무시하는 고립배타적인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는 배격되어야 하겠지만, 민족자존의 생존협동체로서의 주도이념인 민족주의는 거룩하다. 이에 특히 신민족주의가 제창되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보아 온, 일본 민족주의와 같은 ‘고립배타적’ 민족주의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드러내 지적하지는 않지만, 식민지시대 조선인의 민족주의도 그와 같은 범주로 볼 수 있다. 독단적인 군국주의시대 일본 민족주의의 틀을 그대로 본받아 주체만 일본인 대신 조선인으로 바꾼 것이 식민지시대 조선 민족주의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억압에 묶여있던 식민지시대에는 일본인의 침해와 비하에 맞서기 위해 ‘자존’에 치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독립된 민족국가를 이루어 국제사회에 어울리기 위해서는 균형감각과 책임감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 필요성을 안재홍이 담은 말이 ‘신민족주의’였다.

 

그가 뜻한바 신민족주의가 한국에서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한 사실은 베트남전 참전 방식과 그에 대한 반성의 부족에서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다른 여러 측면에서도 한국의 민족주의 담론이 식민지시대 수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식민지인의 민족주의와 독립민족의 민족주의

 

21세기로 들어오면서 민족주의 ‘극복’ 담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를 계기로 ‘세계화’ 구호가 거세진 끝에 1997년 IMF사태를 맞으며 한국 사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이 크게 일어난 결과였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국사 해체’ 주장으로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흐름 위에 또 하나의 움직임이 편승했다. 2002년 대선과 2004년 선거에서 패퇴한 수구세력이 권토중래를 위해 이데올로기 수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뉴라이트’ 운동을 일으키면서 ‘반공’을 기본노선으로 산업화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역사 해석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제물로 삼아 교과서 분란을 일으켰다.

 

나는 2008년 가을 <뉴라이트 비판>을 써서 뉴라이트 역사관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뒷받침하려는 정략적 목적을 위해 무리한 해석을 시도한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뉴라이트의 민족주의 비판에는 한국 사회의 ‘과잉민족주의’hyper-nationalism에 대한 적절한 지적도 많이 들어있다. 과잉민족주의에 대한 일반인의 합리주의적 반감에 영합하려 한 것이다.

 

<뉴라이트 비판>에서 나는 “뉴라이트로부터도 배울 만한 것은 배워야 한다”고 했다. 뉴라이트 담론의 정략성과 허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이 사회의 민족주의가 겪고 있는 혼란을 수습하기에 부족하다. 식민지시대의 독단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과잉민족주의에 기운 민족주의 담론을 시대 상황에 맞춰 보정하고 확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와 <해방일기>(10권, 2011~2014 완간 예정)를 통해 민족주의 담론 발전의 근거를 확보하는 데 노력해 왔다.

 

이 사회가 처한 상황이 70년 전과 지금 사이에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뉴라이트로부터 배울 가장 중요한 점이다. 세계 곳곳의 식민지가 독립의 길을 걷고 있던 70년 전과 달리 지금은 세계화의 시대다. 자본, 상품과 정보의 흐름이 비교가 안 되게 커져서 국경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끼리’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에 만족해서는 지구촌에 어울리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세계화’의 추세를 인정하되 그 의미와 한계를 파악하는 것이 민족주의 담론의 발전 방향을 찾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세계화가 경제적 세계화에 그쳐 왔고 이제부터 정치적 세계화의 과정에 접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뉴라이트는 개인의 파편화를 요구하는 경제적 세계화를 세계화의 모든 것으로 보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전적으로 배척한다. 그러나 세계화의 본 단계인 정치적 세계화는 인류사회의 유기적 조직을 위해 민족과 민족주의를 기본 요소로 받아들일 것을 나는 기대한다.

 

식민지시대 민족주의가 가진 1차적 한계는 주권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책임 측면을 도외시하고 권리 측면만 주장하는 독단성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바탕에 있는 문제점은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근대서양의 관념을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근대서양의 민족주의는 19세기 유럽을 풍미한 원자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만국공법’을 국제관계의 원리로 내세웠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밀려온 서세동점의 물결은 종래의 유기론적 ‘천하체제’를 무너뜨렸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서도 조선을 ‘독립국’으로 규정함으로써 천하체제로부터 이탈시키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민족과 국가들 사이에 실재하는 강약-대소 관계를 허구의 평등으로 가려놓음으로써 약육강식 현상에 대한 저항을 없애는 것이 제국주의시대 만국공법의 역할이었다. 이에 입각한 민족주의는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을 조장하는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경향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3. 사회의 파편화와 자연의 타자화

 

홉스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말한 것은 1651년의 일이었다. 인간사회를 경쟁 위주로 보는 관점은 유럽에서 중상주의시대부터 제기된 것이다. 이 관점은 산업혁명의 진행과 자본주의의 확산에 따라 확장되어 오다가 19세기 초 돌턴의 원자론이 나오자 자연계에서 인간사회까지 모든 것을 설명하는 복합적 사상체계로 자리 잡게 된다. 모든 물질이 독립적인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원자론이 인간사회를 경쟁의 주체인 독립적 개인의 집합으로 보는 개인주의를 위해 적절한 비유를 제공해준 것이다.

 

자연과학에서 원자론은 19세기가 다 지나기도 전에 무너져버렸다. 물리학 연구가 원자 내부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론에 입각한 인간관은 19세기 말에 더욱 강화되었다. 제국주의시대 분위기 속에서 경쟁 위주의 관점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물질세계나 인간세계나 원자론적 특성과 유기론적 특성을 아울러 갖고 있다는 사실은 직관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문명의 어느 단계에서나 지배적 사상체계에서는 두 측면이 함께 인식되었다. 19세기 유럽에서 시작해 20세기까지 원자론적 세계관이 지배적 영향력을 누린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무엇이 이런 현상을 가능하게 해준 것일까?

 

원자론적 세계관은 경쟁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이런 세계관이 큰 영향력을 가진 사회는 파괴와 낭비의 경향을 일으켜 지속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억제된다. 그런데 문명이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생산력의 폭발적 확대가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이 생산력 확대가 “파괴는 건설의 아버지” 식의 논리로 19~20세기 원자론적 세계관의 유행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수렵-채집 단계에서 농업 단계로 이행할 때도 이와 비슷한 생산력의 폭발적 확대가 여러 곳 고대제국의 성립을 뒷받침한 것으로 보인다.

 

생산력의 폭발적 확대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인간을 파편화하는 원자론적 세계관은 자연 역시 타자화함으로써 무절제한 착취의 대상으로 삼게 해주었다. 인간의 소외와 자연의 소외 사이의 연관성을 생태론자 머레이 북친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그 역도 성립한다.

 

20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환경과 자원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맹목적 자연 착취가 한계에 도달한 결과였다. 이로부터 ‘지속가능성’이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기본적 세계관이 바뀌지 않은 채로는 고작 파국을 늦추는 노력에 지나지 못한다. 자연을 타자화해 놓고 환경과 자원의 ‘보전’이나 ‘보존’을 논하는 정도로는 문제의 구조적 해결을 바라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군사력과 자본력을 장악하고 있는 반동세력의 저항을 넘어설 수 없다. ‘근대적’ 가치관의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심지어 ‘인권’도 자연과 인간의 상대적 관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준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로마클럽보고서(1973)가 나온 지 40년이 지난 이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조정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 위에 새로운 사회조직 원리가 곳곳에서 개발되기 시작하고 있다. 아직은 미약한 움직임이다. 국가 차원의 움직임은 없고, 도시 차원에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거대하고 강력한 기존 시스템에 사회조직 방법이 묶여 있는 현실 속에서 이런 움직임이 작게라도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전체 시스템의 변화가 시작되면 그 변화는 매우 크고 빠른 것이 될 것이다. 그 변화가 ‘세계정부’ 구성을 향한 정치적 세계화가 될 것으로 나는 기대한다.

 

 

4.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세계정부’의 전망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충격을 받은 아인슈타인이 “인류와 문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계정부의 창설에 달려 있다.”고 했다고 한다. 현실성 없는 발언이란 비판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세계정부라는 생각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면 우리 미래에는 단 하나의 현실적 전망만 있을 뿐이다. 바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전면적 파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세계정부’란 지금까지의 국가정부가 국가 내의 질서에 책임을 가졌던 것처럼 세계적 질서에 책임을 가지는 ‘정치적 세계화’를 뜻하는 것이다. 개인주의의 확장을 통해 국가를 약화시키면서 새로운 질서의 구축을 외면해 온 ‘경제적 세계화’와 달리 진정한 ‘세계주의(globalism)’에 입각한 세계 규모의 질서체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래 전 세계적 경제구조의 성립과 교통-통신의 발달에 따라 지역 간 교류가 크게 늘어나면서 민족과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전 세계적 정치질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타난 세계질서의 형태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말한 ‘세계체제’ 정도가 고작이다. 제국주의시대 만국공법이 제창한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어 온 것이다.

 

1차 대전 후에 국제연맹, 2차 대전 후에 유엔이 구성된 것은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통해 세계정부의 필요성이 부각된 결과였다. 그러나 이 국제기구들은 만들어진 후 얼마 안 되어 패권국가들의 이용 대상으로 전락하고 세계정부로의 발전을 보지 못했다. 무정부상태를 좋아하는 패권국가들을 견제할 안정 추구세력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미국이 전 세계 군사비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은 유엔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는 결정적인 족쇄다.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와 소련 해체에 따라 유일한 패권국가로 남은 미국을 중심으로 ‘1극체제’가 빚어질 때 나온 ‘세계경찰’ 논의도 세계정부의 염원이 비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경찰의 권력만을 탐하고 책임을 외면하면서 이 논의마저 무색해진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후 중국의 국력과 역할이 자라나면서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G2의 위상에 올라선 중국이 종래의 패권국가들과 다른 면모를 보일만한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다른 패권국가들의 대두 단계와 달리 지금의 세계적 상황은 일방적 팽창주의를 용납할 여지가 적은 단계에 처해 있다. 둘째, 세계 인구의 20% 이상을 품고 있는 중국 입장에서는 ‘나’와 ‘남’을 구분해 대립관계를 조장할 여지가 적다. 셋째, 중국은 유기적 천하체제를 포함한 방대한 문명 전통을 가진 나라다.

 

중국이 내세워 온 “화평굴기”나 “소프트파워”를 견제를 회피하는 전술적 구호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위의 조건들이 작용한 결과이며 지속성을 가진 노선이 될 수 있다. 물론 중국인 중에도 중국의 문명배경에 대한 인식 없이 패권국가의 자리를 중국이 차지하기만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영국, 독일, 러시아, 미국 등 20세기 패권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는 방대한 문명자산을 활용할 가능성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 자산을 활용해 유기적 세계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지 여부는 중국인과 세계인 모두의 노력에 달려있다.

 

농업문명으로 접어드는 단계에서 그리스의 원자론, 중국의 명가 등 원자론적 세계관이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키운 일이 있다. 그 단계에서의 급격한 생산력 발전에 힘입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농업문명이 정착된 후로는 어디서나 유기론적 세계관이 주축이 되고 원자론적 세계관의 영향력은 미미하게 되었다.

 

산업문명으로 접어드는 단계에서 원자론의 득세도 문명전환 단계의 특수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산업문명의 정착에 따라 유기론적 세계관의 회복을 예상할 수 있다. 이에는 근대 이전 모든 문명의 유기론적 전통이 참고가 되겠거니와, 가장 풍부한 유기론적 문명 전통의 주인공이 바로 중국이다. 그래서 중국의 ‘굴기’가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이다.

 

 

5. 정체성 회복의 중심 고리로서의 민족주의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서 나는 망국의 의미를 국가(왕조) 차원, 민족 차원, 문명 차원의 세 개 층위에서 파악할 것을 제안했다. 1945년의 ‘해방’은 국가의 회복을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민족의 회복은 충분치 못했고, 문명의 회복은 전혀 가져오지 못했다.

 

1백 년 전의 망국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파괴했다. 이민족 지배와 전쟁, 그리고 분단 대결 등 20세기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핵심 과제가 정체성의 회복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한국인이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것도 민족정체성의 회복이라는 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인이 회복해야 할 정체성에 세 개 층위가 어우러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한 개 층위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다른 층위의 회복을 가로막을 수 있다. 국가에 집착하면 민족문제 해결에 장애를 일으키고, 민족에 집착하면 세계적 변화에 보조를 맞추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세 개 층위를 어우르는 중심 고리가 민족 층위에 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의 역할이 클 것을 나는 기대한다. 단, 민족주의가 중심 고리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다른 층위와의 연결이 확실해야 할 것이다.

 

내가 주력해 온 공부는 민족 층위와 문명 층위 사이의 연결이다. 실효성 있는 민족정체성은 문명전통 속에서만 제대로 확립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만국공법의 원자론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독립적 존재로서 민족의 공허한 관념에만 매달려서는 20세기의 비극을 극복하는 길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과거의 한민족도 문명권 안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했던 것처럼, 지금의 한민족도 세계문명 안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정체성 회복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10여 년 전 <밖에서 본 한국사>를 처음 구상할 때는 문명정체성 회복의 전망이 매우 불투명했다. 그러나 2007년 집필을 진행할 때는 중국의 부상 덕분에 전망이 밝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내가 중국조선족의 관점을 모델로 제시한 것은 배타적 민족정체성에만 단선적으로 매달려온 한국 민족주의가 국가정체성과 문명정체성을 시야로 끌어들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싶은 뜻에서였다.

 

이 책을 내고 7년째 되는 이제, 조선의 망국을 몰고 온 ‘서세동점’ 현상의 퇴조를 갈수록 뚜렷이 느끼고 있다. 그에 따라 복합적-중층적 민족정체성을 추구하는 ‘신민족주의’ 수립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면서 그 뜻을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는 자리로서 강의를 제안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