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독자들과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밖에서 본 한국사>(2008)와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를 쓸 때 내가 생각한 표준적 독자는 중등학교 역사 선생님들입니다. 고등학생에게는 어려운 책이죠. 그런데도 여러분이 읽어주었다는 것이 고맙고 반가운 일인데, 혹시라도 소화에 어려움이 있다면 오늘 같은 기회에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예컨대 ‘합리주의’ 같은 것이 소화에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두 책에서 나는 합리적 해석의 확장에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은 세상을 보는 것도, 역사를 보는 것도 합리적 이성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이성과 감정이 함께 작용하죠.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의존하려 들면 안정된 자세를 취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나는 동아시아의 전통을 해석하는 데 감정적 측면, 즉 주관적 정체성에 비중을 더 두려고 노력합니다. 서구식 학문방법이 합리성에 너무 치우치면서 동아시아 전통의 주관적 정체성을 경시하는 폐단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의 가치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서구식 학문방법에서 인정되지 않는 독자적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있고, 그런 기준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주관적 입장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역사를 서술하는 데서는 합리성을 강조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주관적 기준이 너무 지배적으로 적용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독도는 우리 땅!” 외치며 일본 욕하는 한편으로 “만주도 우리 땅!” 외치는 독단적-배타적 민족주의가 횡행하는 바탕에는 국사 서술의 합리성 부족이라는 문제가 깔려 있습니다.
한국사 서술의 비합리성에 대한 책임을 ‘민족주의’에 지워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족주의를 극복 대상으로 보는 ‘국사 해체’ 주장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비합리성을 이유로 민족주의를 등진다는 것은 공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식을 버리겠다는 것과 같은 무책임한 태도라고 나는 봅니다. 공부 잘하도록 도와줄 여지가 있는데도 말이죠.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민족주의에는 합리성을 늘릴 여지가 너무나 많이 있다고 나는 보았기 때문에 역사 서술의 합리성 확장에 노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세계화’의 시대에는 어차피 민족주의를 ‘졸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150년 전 대원군이 척화비를 열심히 세울 때와 비교하면 국경이란 것이 거의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그렇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중요성이 그 동안 크게 줄어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것이 예상됩니다.
하지만 세월만 보냈다고 졸업이 됩니까? 학점을 따야죠. 민족국가를 제대로 회복한 다음에는 세계 변화에 맞춰 (유럽국들처럼) 민족국가의 중요성을 줄여나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참혹한 분단 상태를 그대로 둔 채 민족주의를 내다버린다는 것은 팔다리가 부러져 있는 채로 요가를 따라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애물단지”라는 말을 노인들이 많이 하죠. 애정 때문에, 책임 때문에 고통을 감수해야 할 대상이란 말입니다. 나는 민족주의를 우리 사회의 애물단지로 생각합니다. 많은 고통을 주지만, 잘 키워내기만 하면 다른 데서 얻을 수 없는 보람을 가져다 줄, 운명으로 주어진 우리 자식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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