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를 선언했다. NPT 탈퇴에는 3개월의 유예기간이 규정되어 있다. 6월 12일 이전에 탈퇴선언을 취소하지 않으면 공식적 탈퇴가 되는 것이다. 결국 북한이 6월 11일에 북-미 공동성명과 함께 탈퇴 연기를 발표함으로써 위기가 한 차례 수습된다. 오늘은 그 과정을 살펴보겠다.

 

“한 번 만들어진 조직은 그 유지와 확대를 위해 움직이는 경향을 가진다.” 소련과의 대결을 위해 만들어진 미국의 정보-군사 기구들은 냉전 해소 후 필요가 없어지거나 줄어들었다. 그러나 축소와 폐지에 저항하는 추세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그를 위해 새로운 존재의의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이것이 북핵위기 형성의 배경 일부가 되었다.

 

부서의 기능에 따라 선호하는 정책의 방향이 다른 것도 밥그릇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국방부가 대결을 좋아하고 국무부가 대화를 좋아한 것은 자기네 업무를 늘려주는 방향이기 때문이었다.

 

클린턴 행정부 내에서의 관료조직 간의 갈등 또한 부시 행정부의 그것과 유사했다. 국무부는 핵확산금지 체제에 초점을 두었다. 반면 국방부 장관실은 북한의 플루토늄 추가확보를 저지하는 데 집중했다. NPT는 핵물질 재처리는 금지하지 않았으므로 국방부는 재처리 포기를 약속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그에 따른 남북 상호사찰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국방부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4월 7일 부수장위원회 회의에서 국방부의 프랭크 위즈너 정책담당차관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완전히 폐기되었다는 보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NPT, 국제적 안전의무 및 남북한 공동선언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내용이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46쪽)

 

부시 행정부의 말기인 1992년에서 클린턴 행정부 초기인 1993년에 걸쳐 미국 정부의 공식적 대북정책은 대결과 대화 어느 쪽으로도 절대적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각 부서 관리들의 성향이 있는 그대로 주장과 활동에 나타나고 있었다.

 

국무부 관리들은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해 온 냉전시대 이래의 제약이 풀리기를 바랐다. 그들이 당시 북한에 대해 깊고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도 대화 제약이 풀리면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장 대결주의자들과의 정책 경쟁에서는 논거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코리아데스크 담당자였던 케네스 퀴노네스의 회고록 <한반도 운명-북폭이냐 협상이냐>(노순옥 옮김, 중앙 M&B 펴냄)에는 국무부 실무자로서 저자가 겪던 고충이 가득 담겨있다. 한국어에도 능통한 그는 1992년 연말에 로버트 스미스 상원의원의 평양 방문을 수행했기 때문에 몇 달 후 북핵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북한 인사들과의 대화에 나서기에 적격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열기 위해서는 저쪽에서 접근해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5월 중순, 상황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그러나 유엔에 파견된 우리 외교관들이나 다른 일반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를 대비해 나는 늘 전화통 옆에 붙어 있었다. 어느 날 점심, 내가 막 샐러드를 한 숟갈 입에 물었을 때였다. 코리아 데스크에서 15년 동안 근무한 조 앤이 사무실 문앞에 나타나 놀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자, 자기가 부, 북한 대사라며 어떤 사람이 통화를 하고 싶다는데요. 이름이 허 뭐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녀 못지않게 놀란 나도 말을 더듬었다. 미소외교[북한인과 마주치면 미소만 짓지,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국무부 방침]가 아직 유효할 때였다. 직속 상관은 모두 점심 먹으러 나갔고, 최소한 한 시간 안에는 돌아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순간적으로 평양에서 이미 여러 명의 북한 관리들을 만난 마당에 허종 대사와 한 번 더 만나는 것이 대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1월 카터 센터에서 만난 이후 처음 하는 통화였다. 처음에 약간 머뭇거리던 그도 평상시의 태도로 돌아왔다. 그의 얘기는 믿을 수 없는 요구로 시작됐다.

 

“나는 우리 정부로부터 귀 정부에 양측 정부가 서로 만나 쌍방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나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했다. ‘무슨 주제로 어느 선에서 언제 어디서?’ 그는 양측 정부가 핵문제를 논의한다는 원칙에만 동의한다면 세부적인 내용은 추후에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134-135쪽)

 

NPT 탈퇴 유예기간을 한 달 남겨놓고 북한 측이 미 국무부에 접촉을 해온 것은 “나 좀 말려 달라”는 뜻 아니겠는가. NPT 탈퇴의 직접 이유는 IAEA의 ‘특별사찰’ 요구였다. IAEA에 대한 미국의 압도적 영향력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인데, IAEA가 창설 이래 처음으로 특별사찰을 들고 나온 것이 누구 때문이겠는가. 허수아비인 IAEA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실질적 주체인 미국 나오라고 한 것이 NPT 탈퇴선언이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도록 미국이 대화에 나서지 않으니 이야기 좀 하자고 이제 연락을 취한 것이다.

 

유엔 북한대표부 부대사 허종이 퀴노네스에게 전화를 걸 때까지 미국 측에 아무런 대화 노력도 없었다는 사실은 퀴노네스의 서술로 보아 분명하다. 노력이 있었다면 그가 동원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생각하기 힘들다. 한편 걸려온 전화를 받는 데까지 망설인 것을 보면 실무자급의 자연스러운 접촉까지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용문 중 “1월 카터 센터에서 만난” 일이 언급되어 있는데, 퀴노네스가 카터센터에 출장 갔을 때 허종이 그곳에 와 있는 것을 알고 국무부에 전화해 허락을 받고서야 만났던 것이다.(122쪽) 허락을 받지 못했다면 여러 사람 있는 자리에서 미소만 짓고 지나쳐야 했을 것이다.

 

일단 연락이 오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퀴노네스는 허종의 전화를 받은 이튿날 뉴욕으로 가서 허종의 상급자인 김종수 부대사를 만났고, 핵문제 협상을 위한 북-미 회담을 두 주일 후에 유엔 미국대표부에서 열기로 단 10분 만에 의논이 끝났다. 북한의 NPT 탈퇴를 비난하면서 대화를 거부할 명분이 미국 쪽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6월 2일 강석주가 이끄는 북한 대표단과 로버트 갈루치가 이끄는 미국 대표단이 6월 2일 열렸고, 이 회의로부터 6월 11일의 북-미 공동성명이 도출되었다. 성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실무접촉을 맡았던 퀴노네스는 양측 간의 이해 수준이 너무나 낮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예컨대 북한 측이 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보다 언론에 나타나는 평론가들의 ‘사적 논평’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을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니 ‘private’란 말의 의미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북한인들이 대화 도중 ‘private’이란 단어의 정의를 내려달라는 질문을 받았던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 북한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서로 뭔가를 private한 것으로 하자고 약속할 때 그것이 ‘비밀의’ 또는 ‘극비의’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private’이란 단어가 ‘개인적인’ 또는 ‘공식적인 정부관리와는 아무 상관없는’이란 뜻으로도 쓰인다고 설명했다. 이 모든 것이 어찌 보면 우습고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시처럼 상대방에 대한 무지로 팽팽히 긴장해 있던 상황에서 이런 상대적으로 작은 장애물들을 먼저 치우지 않고는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조차 시도할 수 없었다.(168쪽)

 

온갖 시시한 문제들이 실무자로서 퀴노네스의 어려움을 보태주었다. 북한 대표단을 회담장에 데려오는 것부터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막상 회담을 하려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세부사항이 자꾸 불거져 나왔다. 세관은 북한 대표단이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 마약이나 위폐 또는 무기를 밀반입하려고 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나는 외교관인 북한대표단의 몸수색을 하는 것은 안 된다고 그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짐을 열어보거나 검사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X레이는 통과시키지만 열어볼 수는 없다고 못 박았다. 이민국에서는 입국을 허가하기 전에 대표단의 사진을 찍고 지문을 채취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카메라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설치했고 지문은 입국절차를 서둘러 간신히 모면했다.

 

유엔 주재 미국대표부의 보안담당자는 북한대표단 중 누군가가 회의장을 빠져나가 아래층에 있는 기밀문서를 훔쳐볼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했다. 비밀 유출을 막기 위해 회의장 출입구와 회의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무장 해병을 배치하겠다고 했다. 나는 무장군인의 배치는 절대로 안 된다고 빌다시피 그를 설득했다. (...)

 

관료들은 외교관으로서 나의 임무를 순전히 북한 사람들의 자존심이나 달래주는 의전상의 장식품 정도로밖에 평가하지 않았다. 더 긴 안목을 갖지 못한 이 사람들이 놓친 것은 그들이 더 실질적인 진행을 방해하기 전에 이런 복잡한 예상문제들을 내가 사전에 예방하고 해결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것이 내 일이었고, 나는 내 일을 효율적이고 외교적인 방식으로 진행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44-146쪽)

 

북핵 문제를 놓고 북한을 상대하는 주체는 남한과 미국, 그리고 IAEA의 3자였다. 북한을 상대하는 미국 실무자로서 퀴노네스는 수시로 한국 입장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IAEA에 대해서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는 기색이 없다. 1993년 6월 북-미 고위급회담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도 퀴노네스는 한국의 반응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국정부는 마지못해 마지막 카드인 북미회담을 받아들였다. 결국 북한을 외교적으로 포용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과 상당한 경제지원이라는 당근에 대해 북한이 되돌려준 것은 무기제조용 플루토늄의 생산을 숨기려는 속셈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이런 잘못된 행동에 벌 대신 상을 주려 한다는 것이 한국인들의 시각이었다. 그것도 평양이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북미 고위급회담이라는 상을.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과 유엔 한국대표부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했다. 협상 전략 수립에 영향력이 있는 미국 정부 내 모든 부서가 중대한 로비 대상으로 떠올랐다. 미국 대표단의 개개인 역시 면밀한 주시의 대상이 되었다.

 

북한데스크로서 미국과 북한 정부 간 대화유지 책임을 맡고 있던 나도 자연히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한국대사관에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히라는 지시를 상관으로부터 받았다. 다시 말해 친구인 한국이 모든 것을 알게 하라는 것이었다. 한국대사관이 모르는 사실을 북한이 언론에 흘리면 내가 그 동안 한국대사관과 쌓아온 신뢰가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5년 동안 내가 남북한 모두로부터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투명성 덕분이었다. 불행하게도 미국 정부 내 정책 결정자급의 일부 인사들은 이 투명성 원칙을 어기고 협상의 일부를 한국 측에 숨김으로써 한-미 정부 간의 상호 신뢰에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 (138쪽)

 

1993년 6월의 북-미 고위급회담은 좋은 성과를 낳았다. 북한은 NPT 탈퇴선언의 카드로 미국을 회담장에 끌어내어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고 무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미국도 ‘거의 아무런 양보 없이’ 북한을 NPT에 잔류시킬 수 있었다. ‘거의 아무런 양보 없이’라고 따옴표를 친 것은 여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에 나온 것처럼 회담 자체가 북한에 대한 ‘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고 무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엄청난 양보처럼 보일 것이다. 퀴노네스를 위시한 실무자들의 공로를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는 점은 그런 사람들의 반대를 쉽게 물리칠 길을 찾아낸 것이다.

 

6월 10일 목요일 아침이었다. 시한이 불과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워싱턴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회신이 왔다. 미 대표부에 가자 대표단원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성명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나는 북한이 원하는 것은 북미공동성명으로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해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 것과 북한의 주권을 존중할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나는 유엔 헌장 처음 몇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유엔 헌장 몇 구절만 바꾸면 그대로 성명이 될 것 같았다. 결국 유엔 헌장에 서명한 나라로서, 또 북한의 유엔 가입을 찬성한 나라로서, 우리는 잃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 친구 하나가 워싱턴의 국가안보회의에 전화를 걸어 통과 또는 승인 요청을 했다. 그는 천천히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깜빡거리는 초록색 글자들을 읽었다. 그 단어들이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북한을 상대로 그런 말들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국이 북한의 주권을 존중할 것이라고 암시하다니 북한 사람들한테 완전히 넘어간 것 아닌가.”

 

친구와 나는 그들의 입을 막을 답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그 말들이 실제로 유엔 헌장에 있는 말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에 무슨 새로운, 과격한, 유별난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다. (172-173쪽)

 

유엔 회원국이 다른 회원국에게 주권 존중하겠다, 무력행사 않겠다, 새삼스럽게 약속을 할 필요부터 없는 일이었다. 유엔 헌장만 지키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정도 약속을 “북한 사람들에게 완전히 넘어간 것”으로 보는 것이 많은 미국 관리들의 인식이었다. 그들에게 유엔 헌장을 기억시켜 준 것이 퀴노네스 등 실무자들의 큰 공로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