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 12일 북한의 NPT 탈퇴선언으로 비롯된 긴장은 탈퇴가 이뤄지기까지의 유예기간 만료 직전에 북한의 탈퇴 보류 선언으로 한 고비를 넘겼다. 갈루치 국무성 차관보를 단장으로 하는 미국 대표단은 북한의 상황이나 의중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북한이 원하는 양보를 해줌으로써 위기를 넘기고 다음 단계 대화의 장을 열 수 있었다.

 

미국의 ‘양보’는 엄밀한 의미에서 양보가 아니었다.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겠다,” “선제적 무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공동성명에 넣은 것뿐이다. 이것은 유엔 회원국끼리 함께 지킬 유엔헌장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이다. 회담 대표단은 회담 결과에 대한 강경파의 불평을 막기 위해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유엔헌장을 지키겠다고 명언한 것은 지금까지 북한을 대하는 태도와 전혀 다른 것이었고, 북한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NPT 탈퇴를 유보한 것이다.

 

내용은 차치하고 미국이 북한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는 것 자체가 북한에게 큰 소득이었다. 1992년 1월의 뉴욕회담에서는 거부당했던 일이다. 남한의 대결주의자들이 긴장하는 모습에서도 그 의미를 알아볼 수 있다.

 

한편, 워싱턴과 평양 사이의 성공은 서울의 우려와 맞부딪쳤다. 이런 우려는 한국을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겠다는 미국의 대한방위 의지에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솔직히 말해 이런 우려 밑바닥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우려가 감춰져 있었다. 핵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북한과 미국의 신뢰구축은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에 한국이 차지하고 있던 서울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우려 말이다.

 

이러한 우려는 1993년 6월, 미국과 북한 두 정부가 협상하기 전에 북미공동성명 내용을 검토하고자 하는 서울의 태도로 나타났다. 그래서 한 한국의 외교관이 이른 아침에 성명문 내용을 보자고 내 호텔로 전화를 한 것이다. 나중에는 또 미국이 성명문 내용에 부적절한 단어, 즉 ‘공동’이란 단어를 삽입시켜 이 성명을 1972년 7월 4일 최초의 남북공동성명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우려를 표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대사관과 유엔 대표부에서 표시한 수많은 우려를 보면 한국은 미국이 먼저 급한 불을 꺼놓고 실제로 평양과 대화할 때는 미국이 한국의 에이전트처럼 행동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 기대는 비현실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의 이런 우려는 그 후 더 심해졌다. 특히 미국과 북한이 핵문제에 관해 서로 수용할 수 있는 해결에 근접하자 더욱 그랬다.

 

반면 여타 국가들, 특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일본은 최초의 북미협상 결과에 대해 안심하고 만족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미국 대표단장의 ‘전면적인’ 핵사찰 입장을 견지한 데 대해 치하했다. 또 모든 나라의 대표들도 다음 회담은 언제 열릴 예정이냐고 물어왔다. (퀴노네스, <한반도 운명> 179-180쪽)

 

한국 측의 감춰진 우려를 알아보는 것이 퀴노네스의 ‘한국통’ 자격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의 하나다. 한국의 대결주의자들에게는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우선순위를 확보하는 것이 국내의 정치권력 유지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1980년 광주사태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의혹과 불만감이 1987년 이후 반미감정의 형태로 한국 내에 자라나고 있었다. 미국의 확고한 지지가 없으면 야당을 지지하는 반미감정이 더 힘을 얻을 위험이 있었다.

 

대표단장 갈루치 역시 6월 11일의 합의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미국 내 반응은 갈라져 나타났지만, 미국이 아무런 양보도 하지 않은 것이므로 반대 의견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한국의 색다른 반응에 주의를 기울인다.

 

미국의 의견은 엇갈렸다. <뉴욕타임스>는 공동성명서 채택을 환영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유력지인 <워싱턴포스트>는 달랐다. 칼럼니스트 랠리 웨이머스는 북한이 5월에 실험한 탄도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했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녀는 미 행정부가 “북한의 NPT 완전이행을 위한 일정을 정하고 IAEA사찰 허용을 요구하며 유엔의 제재조치를 전행해야 한도”고 촉구했다. 그와 같은 비판에 대해 갈루치는 성명서에 담긴 약속은 미국의 양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리스를 방문 중이던 워렌 크리스토퍼 국무장관도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국제적 반응도 조심스러웠다. 중국은 회담에서 이루어진 “초기 단계의 진전”을 높이 평가했다. 일본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미야자와 일본 총리는 총리로서 잡힌 많은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집이나 집무실에서 뉴욕협상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지를 물을 정도였다. (...)

 

모든 당사국 중에서 한국이 가장 기뻐해야 했을 것이다. 6-11 공동성명서는 북미협상을 적극 촉구한 한국의 입장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한승주 외무장관의 반응도 미국과 일본정부의 성명과 같은 맥락이었다. (...) 그러나 서울은 달랐다. 서울에서는 북핵위기를 거치는 동안 오랜 동맹국인 한국과 미국 양국관계를 곤경에 빠뜨린 여러 번의 시험 중 그 첫 번째 무대가 막을 올리고 있었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75-76쪽)

 

이 무렵 김영삼 대통령의 남북관계에 대한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6월 4일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이다. 이 회견에서 “핵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핵 가진 자”가 미국을 가리킨 말이 아닌 바에는 100일 전과 영판 다른 태도다. 김영삼 정부에서 남북관계를 맡고 있던 한완상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1993년 6월에 접어들자 김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 내용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2월 25일 취임식 때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라는 평화 선언은 북한 당국에도 신선한 충격을 안긴 바 있다. 실제로 김일성 주석은 이 구절을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6월 4일 ‘100일 회견’ 때 김 대통령이 “핵 가진 자와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는 강경 방침을 천명할 것이라는 얘기가 들려왔다. 대학 후배이기도 한 청와대 이경재 대변인에게 사실을 확인한 나는 그런 발언이 나온다면 남북 관계를 불필요하게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통령이 직접 극단적인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평소 소신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이 대변인에게 신신당부했다. (...)

 

나는 이 대변인에게 여러 번 전화로 확인했다. 그러나 이 대변인은 잘 안 된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그 표현만큼은 바꾸도록 힘써 달라고 부탁했다. (한완상, <한반도는 아프다> 103-104쪽)

 

2월 25일 취임사는 한완상이 중심이 되어 작성한 것이었다.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에서 한완상이 중요한 역할을 맡으리라는 전망이 그래서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00일 후의 회견문 내용은 한완상에게 “들려왔다”고 한다. 통일부총리보다도 ‘개혁 전도사’ 한완상에 대한 신임을 김영삼이 그 사이에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취임 당시 김영삼의 한완상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였다. 자랑스럽게 내건 ‘문민정부’의 이름도 한완상의 아이디어로 알려졌다. 취임 초 하늘을 찌를 듯하던 김영삼의 지지도는 한완상 같은 재야 인물들을 포섭한 데서 온 ‘개혁’에 대한 기대감 덕분이었다.

 

한완상 등 재야 출신 개혁파 인사들은 김영삼이 국민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자기네를 필요로 하는 만큼 자기네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서로 이득을 보는 윈-윈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거래관계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해소되어 각자의 길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100일도 안 되어 아직 목적 달성이 안 된 시점에서 벌써 파탄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어찌된 일일까?

 

한완상의 회고 중에는 1993년 5월 말께 김영삼에게 서둘러 찾아가 보고를 올린 일 하나가 적혀 있다. 북한을 방문해 4월 10일 김일성을 만난 재미 조동진 목사가 찾아와 해준 이야기를 보고한 것인데, 조 목사의 이야기 중에는 한완상의 유화정책을 뒷받침해줄 만한 김일성의 태도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곧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조 목사와 김 주석이 함께 찍은 사진과 오찬 식단을 보여주고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보고했다. 김 주석이 대통령의 취임사에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를 비롯해 그가 했다는 말을 전했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김 대통령의 첫 반응은 이랬다. “믿을 수 있는가?” 그는 진지하게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김 주석이 말한 10대 강령이 김 대통령의 취임사에 대한 정중하고 사려 깊은 반응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리인모 씨 북송 발표 다음날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을 하는 상황을 막지 못하는 등 김 주석에게 아쉬움이 컸던 때였지만, 우리는 그때 조 목사에게 토로한 김 주석의 메시지를 좀 더 전략적으로, 또 좀 더 신중하게 분석했어야 했다. (<한반도는 아프다> 72쪽)

 

‘100일 회견’의 강경한 내용을 한완상이 저지하기 위해 애쓰던 때의 일이다. 김일성을 최근 만난 사람에게 고무적인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청와대에 들어간 것이다. 김일성이 김영삼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니 유화정책을 쓰면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설득하기 위해.

 

김영삼이 “믿을 수 있는가?” 물은 대상은 직접적으로는 조동진 목사이지만, 간접적으로는 한완상 본인을 가리킨 말로 볼 수 있다. 조동진이 전하는 이야기를 충분히 검증하고 와서 자신을 설득하려 하는 것인지 “믿을 수 있는가?” 물은 것이다.

 

한완상의 기록에서 그 직전 상황을 본다면 5월 14일의 국가조찬기도회가 있다. 1200명이 하얏트호텔에서 가진 이 모임에서 한완상은 개회 기도를 맡았고, 김영삼의 연설에 대해서는 “남북 관계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나 개혁 의지는 뚜렷했고 힘이 있었다.”고 적었다.(위 책 97-98쪽) 그 시점까지는 김영삼의 심경 변화를 알아챈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그 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5월 20일에 남한이 “남북 총리회담을 뼈대로 한 대북 제안”을 했는데 북한이 5월 25일 전통문을 보내 부총리급 특사 교환을 역으로 제안해 왔다. 그 전통문의 취지를 한완상은 이렇게 해석했다.

 

이즈음에서 특사교환 제의에 나타난 몇 가지 흥미로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핵 문제를 위시한 큰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풀어가자는 북한 당국의 의지가 엿보였다. 정상회담을 포함해서 민족 당사자 간의 회담에서 모든 주요 당면문제를 포괄적 획기적으로 풀어가자고 했다. 이는 김 대통령의 취임사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또 미국에 요구해온 포괄적 대화를 남쪽과도 할 용의가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변화였다. 여기서 포괄적이라 함은 일괄 타결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이때 미국도 이미 포괄적 타결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북의 제안은 현실합리적인 제안이었다. 둘째로 이미 전임 노태우 정부에서 남북이 합의한 것을 새롭게 실천해나가자는 의지가 엿보였다. 남북이 직접 대화를 하자는 뜻이니 긍정적인 메시지였다. 셋째로 총리 대신 부총리급이 만나자는 것은 각기 최고위급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실세 간의 회담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읽혔다. 이것은 그간 총리회담이 최고위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음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북한 당국은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으로 남쪽 부총리의 입지를 크게 좁혀놓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한반도는 아프다> 100쪽)

 

내용 중에 납득이 잘 안 가는 점들이 있다. 첫째로 꼽은 “포괄적으로 풀어가자는 북한 당국의 의지”를 놓고 북한의 태도를 매우 높이 평가했는데, 그런 평가를 위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던 것인가?

 

이 시점에서 북한은 6월 12일의 NPT 탈퇴 유예기간 만료를 앞두고 미국 정부와 접촉, 6월 2일부터 북-미 회담 일정을 잡아놓고 있었다. 미국 측에서는 북한이 접근해 올 때 남한과의 대화부터 복원하라는 요구를 전제조건처럼 내놓고 있었다. 5월 25일의 특사 교환 제안에는 북-미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취지의 제안에서 남한을 비난하지 않고 대화를 바란다는 뜻을 밝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처럼 당연한 내용을 넘어 북한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평가할 만한 구체적 내용이 이 전통문에 담겨 있었던가?

 

한완상은 북한의 이 제안을 “현실합리적”인 것으로 판단한 근거로 북한이 일괄 타결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포괄적 대화”를 미국만이 아니라 남한과도 나눌 용의를 보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덧붙여 그때 미국도 포괄적 타결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한완상의 이 대목 회고 중에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다.

 

‘포괄적 타결’이란 말이 북-미 대화와 관련해 많이 쓰이게 되는데, 1993년 6월의 뉴욕회담 때까지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6월 11일의 뉴욕회담 타결에 대해 미국 수석대표 갈루치도 실무자 퀴노네스도 실질적으로 아무런 양보도 하지 않은 것으로 회고했고, 7월부터 시작된 제네바회담의 성과에 대해서도 별다른 전망을 갖지 않고 있었다. ‘포괄적 타결’이란 말의 출발점이 된 ‘경수로 제공’ 제안은 7월 16일 제네바회담의 두 번째 모임이 북한대표부에서 열렸을 때 나왔다.

 

갈루치는 이 제안이 점심식사 자리에서 나왔다고 회고했지만(<북핵위기의 전말> 87쪽), 오전 회담 중 나왔다고 하는 퀴노네스의 회고가 세밀한 정황 설명을 곁들인 점으로 보아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갑자기 강석주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발언을 했다. 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평양이 ‘관대한’ 제스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미국이 팀스피릿을 종식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한 후 북한에 두 개의 경수로를 제공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와 협조하고 핵안전협정 약속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사찰만은 여하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평양은 그런 모욕적인 주권 침해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평양의 관대한 제스처 발언을 듣는 순간 우리는 어리벙벙해졌다.

 

‘강석주가 제정신일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핵확산금지조약 준수는 거부하면서 미국에게 수십억 달러의 경수로를,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처음에 우리는 그저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워싱턴 상관들에게 보고한단 말인가. 그들은 너무 우스워서 말도 안 나온다고, 당장 꺼지라고 할 게 틀림없었다. (퀴노네스, <한반도 운명> 195-196쪽)

 

‘경수로 제공’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포괄적 타결’의 열쇠가 될 이 제안이 당시 미국 측에게 어떻게 보였는지 유념해 둔다. 결국은 북한과의 타협을 위한 기본 요소가 될 이 제안의 타당성을 미국 측에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7월 16일까지 미국 측은 ‘포괄적 타결’의 가능성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가능성을 북한 측이 열어준 것이 7월 16일의 일이었다. 그런데 한완상이 5월 25일의 북한 전통문 이야기를 하면서 ‘포괄적’이란 말을 거듭 쓰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회고문을 쓰는 시점에서 혼동을 일으킨 것일까? ‘포괄적 타결’의 의지는 북한의 태도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혼동이 있다면 증언의 신뢰성에 큰 문제가 된다.

 

북한의 특사 교환 제안에서 ‘부총리급’을 규정한 것은 남한 특사로 한완상을 지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한완상의 유화노선에 대한 호감을 표시한 것일 수도 있는데, 한완상 본인은 이것이 일종의 ‘죽음의 키스’였다고 말한다. 남한의 대결주의자들(“보수 세력”)을 더욱 격분시키고 단결시키는 전략적 착오라는 뜻이다. (<한반도는 아프다> 100-101쪽)

 

한완상은 1993년 연말까지 10개월간 통일부총리 자리를 지키지만, 정부 출범 100일이 되는 6월 초까지는 이미 김영삼의 신임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6월에서 7월에 걸쳐 퀴노네스가 관찰한 남한 정부의 입장은 한완상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남북대화 재개를 북미회담의 재개에 연결시키려는 [미국 측의] 고리는 남북대화와 북미회담 모두에 심각한 장애물이 됐다. 평양은 국제원자력기구와의 대화 재개는 고려해 보겠지만 서울과의 대화 재개 책임은 북한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강석주는 서울이 문제라고 되풀이해서 우겼다. 그러다 보니 미국 대표단은 우방인 서울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핵문제는 남북의 경쟁과 적대감 대문에 옆길로 밀려나고 말았다.

 

서울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한편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하지 않았고, 미국은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핵안전협정의 전면적 이행을 평양에 밀어붙였다. 게다가 워싱턴은 평양에 대해 서울과의 대화 재개도 촉구했다. 다른 한편, 문제를 남북대화와 연결시키자 워싱턴과 평양의 관계가 복잡해졌다. 국제적 문제인 핵확산금지조약 문제가 지역적인 문제인 남북대화 이슈와 뒤섞이자 자연히 핵문제 협상에 외교적 정체현상이 발생했다.

 

1993년 7월, 이런 상황의 잠재적 위험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울은 그것이 평양을 외교적으로 목졸라 결국은 평양으로 하여금 양보하게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반도 운명> 192쪽)

 

북한과의 대결상태가 해소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남한에 1993년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까지도 있다. 김영삼 정부 출범 때는 그런 사람들이 정책 결정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게 될 희망이 있었고, 그 희망을 대표하는 인물이 한완상이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난 후에는 그 희망이 사라진 것으로 퀴노네스의 눈에 비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