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7월 제네바 북미회담의 미국대표단 단장이었던 로버트 갈루치는 7월 16일 회의에서 북한 측이 내놓은 ‘경수로 제공’ 조건이 가진 의미를 당시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당시에는 분명치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경수로 제안을 북한이 내놓았다는 것은 북한이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흑연감속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의사가 있음을 처음으로 암시한 것이었다. 1993년 7월의 경수로 제안은 이후 일 년여에 걸쳐 위기를 종식시키기 위해 진행된 협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북한이 경수로를 제공받는 대신 핵확산 금지 의무사항을 이행하고 기존의 핵 시설을 파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국측 대표단이 이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91-92쪽)

 

갈루치는 북한 측이 이 제안을 내놓던 장면도 소상하게 회고했다.

 

강석주는 [한 달 전의] 뉴욕회담에서 이 문제를 띠운 적이 있었지만, 당시는 북한의 NPT 복귀 문제가 더 시급하고 중요했기 때문에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흐지부지했다. (...)

 

강석주는 우선 경수로 기술에 대한 북한의 관심이 오래 된 것임을 과거를 짚어가며 설명했다. 그리고 흑연감속 원자로의 경우 원료로 쓰이는 농축우라늄의 공급을 위해 외국에 의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현재의 시설을 고집하는 한 이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을 것임을 알고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신 북한이 원하는 것은 새로운 원자로가 제공될 것이라는 미국의 확실한 약속이었다. 그동안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동결할 것이며 IAEA가 이를 감시하도록 허용하겠다고 했다. 일단 새로운 원자로가 설치되면 북한은 NPT 이행을 다시 선언할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은 IAEA와 “불공정” 문제를 해결하고 안전조치로의 복귀를 위한 논의를 하게 될 것이었다.

 

잘 차린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강석주는 자신들의 새로운 제안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는 김일성 주석의 지도력 덕분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또한 북한의 군부가 많은 양의 사용후 연료를 보유하는 한편 폭탄 제조 기술을 완성할 경우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표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미국을 협박하기도 했다. 내부적으로 통제가 어려울 수 있다는 고전적 협상술을 발휘하여 북한측의 한 참석자는 “그렇게 되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는 쪽에 큰 문제를 안겨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책 87쪽)

 

미국대표단에 실무자로 참여하고 있던 케네스 퀴노네스도 경수로 제안이 나왔을 때 대표단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던 상황을 회고했다. 오전 회의에서 나온 경수로 이야기를 갈루치가 강석주에게 점심시간 중 더 들은 뒤 대표단에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다.

 

우리는 강석주가 자신의 관대한 제안(2기의 경수로 요구)을 진지하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들 대부분은 믿을 수 없어했고 몇몇은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 일부는 긴장을 풀기 위해 농담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갈루치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우리 북한 전문가는[퀴노네스 자신을 농담조로 가리킨 말인 듯] 그 제안이 긍정적인 진전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와의 협조를 다시 생각해 볼 마음이 있다는 표시였다. 그러자 문제는 두 개의 경수로라는 엄청난 대가에 있다고 다른 사람들이 말했다. 재빨리 우리는 평양으로 하여금 국제원자력기구 및 사찰에 협조하고 남북대화를 재개하려 하려는 우리의 안견으로 다시 초점을 돌리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다시 회의실로 돌아간 갈루치는 강석주에게 미국 대표단은 현재 두 개의 경수로 요구에 대해 당장 대답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우선 본국 정부와 장시간 의논해야 했다. 우리는 북측에게 도대체 누가 경수로 비용을 지불할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여러 번 물었다. 강석주는 즉각 그리고 반복적으로 미국이 무이자 대출을 해주면 북한이 전액을 같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갈루치는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 규정을 지키지 않는 나라에는 핵발전소에 필요한 장비의 공급을 금지하는 국제협약을 이미 체결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결국 우리는 워싱턴과 상의해서 다음 회담 때 관대한 요구에 대해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퀴노네스, <한반도 운명>200쪽)

 

제네바에서 이 제안이 나온 바로 이튿날 워싱턴을 방문 중이던 한완상 통일부장관이 피터 타노프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을 만났을 때 경수로 제안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타노프 차관에게 나는 우선 7월 14일부터 제네바에서 진행 중인 2차 북-미 회담과 관련해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이번 회담에서 북쪽이 뜻밖에 제안한 경수로 건설 기술 제공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북한과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를 어느 정도 오래 끌 수 있는지도 잠깐 얘기했다. (...)

 

물론 당시 2차 북-미 회담에서 가장 놀라운 뉴스는 북한이 미국에 ‘경수로 기술 제공’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일찍이 경수로 지원을 약속했던 소련이 해체되는 바람에 경수로 건설이 무산되었다. 미국도 이 제의를 원천적으로 거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경수로만으로는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재료(플루토늄)를 생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타노프도 일단 북한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다만, 경수로 제공은 엄청난 재정지원도 해야 하는 까닭에 선뜻 나설 의향이 없고, 핵 문제가 해결된 뒤에나 검토해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미국은 설사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엄청난 재정지원을 할 뜻은 없는 듯했다. 그 ‘공’은 결국 우리 정부로 넘어올 가능성이 컸다. 북한으로서는 경수로가 세워지면 핵무기 개발 의혹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심각한 전력난도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한완상, <한반도는 아프다>122-124쪽)

 

한완상의 회고 중에는 회고 시점에서의 관점이 뒤섞여 내용의 정확성에 불안감을 주는 대목이 더러 있다. 이 대목도 그렇다. 제네바 현장의 미국대표단 멤버들이 경수로 제안의 현실성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던 시점에 타노프 차관의 설명을 듣고 “미국도 이 제의를 원천적으로 거부할 것 같지는 않”다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북한이 미국의 “무이자 대출”을 얘기하고 있던 시점에 재정지원의 부담이 한국으로 넘어올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시기 북핵 문제에 관한 한국과 미국 관리와 언론인들의 서술에서 북한 경제 사정에 관한 설명에 아쉬움을 느낀다. 정보 획득이 어려웠기 때문이겠지만, 북한의 대외정책을 이해하는 데 큰 허점이다.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은 지금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 연재의 9-11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산권 붕괴의 결과 북한의 경제사정에 큰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것은 당시에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어려움은 1990년대 후반의 ‘고난의 행군’으로 확인되었다.

 

1991년 북한의 유엔가입 등 개방정책에는 “하나의 조선” 등 건국 이래 국가노선의 원칙을 포기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방정책으로 나선 절대적 이유는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경제적 보호가 사라지면서 국가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에너지였다. 소련과 중국이 시혜적 기준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던 정책을 거두면서 모든 산업이 중단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핵사업에는 에너지 공급과 핵무기 제조의 두 갈래 길이 있다. 1991년 개방정책에 나서고 있던 북한의 핵사업의 기본 목적이 에너지 공급에 있었다는 데는 정황상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부차적 목적으로 핵무기 제조를 바라봤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그 부차적 목적의 비중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1991년 이전, 소련과 중국의 보호가 약해지고 있는데 북한 지도부가 아직 개방정책을 결심하지 않은 단계에서는 핵무기의 매력이 강했을 것이다. 초강대국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할 길을 바라보지 못하는 채로 ‘자주국방’의 길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동구 공산권의 해체를 바라보며, 혼자 힘으로 미국과 맞설 결의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세계정세의 변화로부터 오는 개방의 압력과 주권 수호의 의지 사이에서 북한은 중국식 개방정책을 모델로 삼았다. 동유럽 국가들처럼 주권(특히 경제주권)이 흔들리는 길을 따라갈 마음이 없었다. 중국이 한 것처럼 최소한의 군사주권과 경제주권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중국에게도 인권을 지렛대로 더 강도 높은 개방, 즉 주권 약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중국식 ‘미지근한’ 개방을 새로 개방하는 그 인접국에까지 허용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1985년 소련은 경수로 제공을 조건으로 북한의 NPT 가입을 요구했다. 개혁개방 노선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시혜적 에너지 공급과 핵우산 제공을 철회하기 위한 대비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경수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로 해체 단계에 접어들었다. 북한은 자체 기술로 건설할 수 있고 원료를 조달할 수 있는 흑연감속로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흑연감속로는 북한산 우라늄을 연료로 쓸 수 있고, 사용 후 재처리를 통해 무기용 플루토늄을 쉽게 뽑아낼 수 있다. 북한은 NPT 가입신청을 한 상태에서 플루토늄 추출작업을 시도했고, 그 사실을 1992년 5월 IAEA에 제출한 최초보고서에 밝혔다. 그런데 북한이 제출한 플루토늄을 IAEA가 미국에 맡겨 분석한 결과 한 차례 작업으로 추출했다는 북한 주장과 달리 세 차례에 걸쳐 추출한 것으로 동위원소 분석 결과 밝혀졌고, 이를 토대로 북한이 더 많은 플루토늄을 뽑아놓고 일부만 내놓은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것이 1992~1994년 ‘제1차 북핵위기’의 출발점이었다.

 

확정적 증거를 갖지 않은 채로 추측컨대, 북한의 보고 내용에는 미국과 IAEA가 지적한 대로 은폐-축소가 있었을 것 같다. 북한은 NPT 가입에 따른 IAEA와의 관계를 IAEA의 통상적 운용 기준에 따라 예측했을 것이다. 에너지 확보를 위해 진행하는 핵사업에 약간의 비용과 노력을 더 들여 무기용 핵연료 추출을 시도하면서, 그 내용의 일부만 IAEA에 통보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2006년에야 핵실험에 이른 결과를 보더라도, 1992년 시점의 플루토늄 추출은 실제 핵무기 제조에서 아득하게 먼 단계에 있었다.

 

그런데 IAEA가 북한의 예측을 벗어난 반응을 보였다. 제출받은 시료의 동위원소 분석을 의뢰한 것부터 전에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헌장 조문에만 들어있는 채로 수십 년간 시행된 일이 없는 ‘특별사찰’을 들고 나온 것은 분명히 ‘주권 침해’의 성격을 가진 일이었다.

 

모든 조약은 주권 침해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가입국들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주권 일부를 보류하거나 양보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 조약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이 사회의 안전을 위해 행동의 자유 중 일부를 보류, 양보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NPT는 핵무기의 위협을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가입국에게 핵사업 내용 공개를 요구하는 조약이다. 어느 조약이나 마찬가지로 이 요구가 모든 가입국에게 공정하고 공평하게 적용되어야만 조약이 실효성을 가질 수 있다. 특정 국가에게만 강하게 적용될 경우 해당 국가는 조약을 받아들을 동기를 잃는다.

 

문제가 된 특별사찰은 극한적인 상황에 대비하는 제도였다. 대상국의 동의 없이 IAEA가 일방적으로 사찰대상 시설을 선정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주권 침해다. 대상국이 완성된 핵무기를 감추고 있는 정황이 분명하다든가 하는 ‘위기’ 상황에나 시행을 검토할 제도였고, 수십 년간 시행을 검토할 필요가 없던 제도였다. 1992년 2월 로버트 게이츠 CIA국장이 하원 외무위원회 답변 중 북한이 핵무기를 확보한 지 1년이 넘었다고 말한 것처럼 황당한 추측이 난무한 것은 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별사찰 요구에 대해 북한의 NPT 탈퇴선언은 정당하고 타당한 대응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 선언이 나오자 북한이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미국 정부에서도 대 북한 정책을 다시 검토할 분위기가 이뤄졌다. 그때까지는 북한에 대한 관심이 적어서 군사-정보 계통의 일부 관리들이 대 북한 정책에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데, 이제 더 넓은 범위의 관리들이 북한 문제를 함께 검토하게 되면서 특정 성향 관리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NPT 탈퇴선언에 이르는 과정에서 북한 지도부는 미국 정부의 적대와 무시 앞에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싶어도 유일한 슈퍼파워 미국이 가로막는 데는 당할 길이 없었다. 미국은 같은 유엔회원국인 북한에 대해 대화를 거부하고 무력행사의 위협을 가하는 등 유엔헌장조차 도외시하고 있었다. IAEA를 통한 미국의 압박에 순응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활로를 찾을 수 있을지, 미국은 아무런 언질도 주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탈퇴선언 하나가 상황을 바꿔놓았다. 국제사회가 북한의 진로를 걱정하게 되었고, 미국 정부 내에서도 대 북한 정책의 우선순위가 올라가면서 다양한 관점이 제기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 결과 탈퇴 유예기간인 3개월이 채워지는 시점에서 탈퇴 보류를 조건으로 미국이 유엔헌장을 지키는 수준의 보장을 해주기에 이른 것이다. 미국 정부 내에서는 이 보장을 지나친 양보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보장은 당연한 것이며 아무런 양보도 아니라는 관점을 미국대표단은 취했다. 북한 지도부는 이것을 내심 미국 측의 큰 양보로 받아들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 지도부가 새로 배웠거나 절실하게 확인한 교훈이 하나 있었다. 핵무기의 극히 희미한 그림자라도 비쳐 보이기만 하면 국제사회와 미국 정부의 태도가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로부터 국제관계에서 핵무기가 얼마나 큰 자산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물론 핵무기에 대한 반응은 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무시당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나은가. ‘북핵’이 거론되기 전과 달리 미국이 유엔헌장을 지켜주겠다고 나서지 않는가. 상대방의 사랑을 잃었을 때 잊어지기보다는 미움을 받고 싶다는 연인의 마음 그대로다.

 

이 교훈 위에서 북한이 ‘포괄적 해법’을 구상할 수 있었다. ‘북핵’이 이슈화된 상황을 이용해서 자기네 진로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진로 확보를 위한 지상과제는 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미국과의 관계만 정상화되면 국제사회 진입에 아무 장애가 없었다. 일본에게는 북한과의 관계 설정을 위한 동기가 충분히 쌓여 있었고, 북-미 대결이 해소되면 남한에서도 민족주의 정서가 대결주의 전통을 쉽게 극복할 것이 예상되고 있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도랑 치는 일이라면 ‘북핵’ 이슈화 덕분에 가재 잡는 일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미국의 적대적 태도가 북한에게 ‘외우’라면 ‘내환’으로 경제난이 있었다. 북핵 문제 해결을 계기로 원조든 차관이든 외부 지원으로 경수로를 확보할 수 있다면 경제난 극복의 결정적 조건이 될 수 있었다.

 

수십억 달러로 예상되는 ‘경수로 제공’은 미국도 국제사회도 꿈도 꾸지 않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1994년 10월 제네바합의가 이 조건을 중심으로 이뤄지게 되는 것은 ‘북핵’의 이슈화 덕분이었다. 대결주의자들이 만들어내고 키워낸 ‘북핵위기’가 북한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준 것이다. 경수로 제공 비용의 70퍼센트를 남한이 부담하게 된 것은 위기를 키우는 데 남한 정부의 역할이 그 정도 비중이었기 때문일까?

 

북한은 1993년 6월 초 미국과의 뉴욕회담에서 경수로 제공 중심의 포괄적 해법을 제시했지만, 다음 달 제네바회담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시 제시할 때까지 미국 정부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부터 제네바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15개월간은 이 포괄적 해법이 북핵 문제 논의에서 중심이 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