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문민정부의 햇볕정책”이란 말을 썼다. ‘햇볕정책’ 하면 대개 김대중 대통령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실행에 앞장선 임동원을 떠올린다. 햇볕정책은 국민의 정부 것이었다. 그런데 김영삼의 문민정부에도 햇볕정책이란 것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영삼 정부의 초대 통일원장관(부총리)을 지낸 한완상의 회고록 <한반도는 아프다>에 “‘햇볕정책’을 처음 제시하다”란 절이 있다.(93-96쪽) 그는 1993년 2월에서 12월까지 10개월간 자신이 햇볕정책을 추진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유화적 대북정책을 추진하면서 나그네 옷을 벗기는 데 강풍보다 햇볕이 효과적이라고 하는 이솝우화를 인용한 것은 사실이다.
대북정책 논의에 이 우화가 인용된 사례를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로 검색해 보니 <한겨레신문> 1993년 5월 5일자 “‘핵무기 재배치 용의’ 물으려다 뒤늦게 삭제” 기사 중 이런 대목이 처음이었다.
여성계 대표로 북한을 다녀온 적이 있는 이우정 의원(민주)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강풍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라는 이솝우화를 인용하며 “대북정책은 인도주의와 민족공동체 입장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흘 후 같은 신문의 한완상 통일원장관 인터뷰기사 “남북관계 어디로 가나”에 햇볕 이야기가 나온다. 신문에는 늦게 실렸지만 이 인터뷰는 이우정의 5월 4일 국회 발언보다 며칠 앞선 5월 1일에 이뤄진 것이었다.
이원섭: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서는 정부가 지나치게 미국의 대처방식에 이끌려가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해결방식에서도 경협 등을 추진해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완상: 민족복리와 공존공영 등 현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정책의 기조는 우리 민족인 반쪽인 북한의 옷을 한파보다는 따뜻한 햇볕으로 자발적으로 벗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이 핵과 연계돼 주춤하는 듯 보이지만 전체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인모 씨 방북 허용 조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부는 인도적 차원과 문화교류 차원의 각종 남북 접촉은 가급적 허용하고 있습니다.
경협을 핵과 연계시켰다고 하지만 이는 대규모 자본투자와 합영에 한한 것일 뿐이며, 그 외 물자교환-임가공 형태의 교역은 지금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3의 지역에서 우리 기업인들이 북한 당국자와 만나 상담을 하고 있을 겁니다.
두 달 후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가 영국에서 돌아올 때 햇볕 이야기가 또 나왔다.
(...) 그는 공항에서 “우리가 통일에 실패하면 다른 민족에 뒤처져 몰락하고 말 것”이라고까지 단언했다. 이미 지난 달 6일 런던대학에서 행한 “북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란 연설과 지난 1일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있었던 “새로운 대북정책의 필요성”이란 강연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그는 통일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는 우선 북한을 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냉전체제가 끝나고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퇴조한 마당에 우리의 대북 시각도 적대와 경쟁이 아니라 호혜와 협조의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런던대학에서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뜨거운 햇볕”이라는 이솝우화를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국내의 ‘보수적’ 주장에 대해서는 유엔가입과 교차승인 수용 사실을 들어 반박하고, 우리 쪽에서 이런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우리는 중국-러시아와 수교했는데 북한은 미국-일본과 아직도 국교 정상화를 이루지 못한 사실을 들어, 북한이 느끼는 위기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만일 대북강경론만을 고집할 경우 북한 안의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득세할 명분만 제공해 남북관계를 오히려 긴장 국면으로 후퇴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북한이 개방정책을 통해 남한 및 미국-일본 등 주변국과 경제교류를 활발히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 통일의 첫 단계로 들어가는 분위기 정착일 뿐 아니라, 만주-시베리아 등지로의 경제 진출을 통해 민족적 번영을 꾀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제교류가 가장 확실한 평화보장책”이라는 그의 견해가 독일 통일과 유럽공동체 국가들의 경제교류 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더욱 다듬어진 셈이다. (<한겨레신문> 1993. 7. 6, “김대중 귀국 이후 4 / ‘통일’ 대학강의 채비”)
5월 1일 한완상이 인터뷰에서, 5월 4일 이우정이 국회에서, 그리고6월 6일 김대중이 런던대학 연설에서 같은 우화를 제시한 것이다. 당시 진보개혁 서클 내에서 많이 이야기되고 있던 이 우화가 산발적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햇볕정책’이란 명확한 표현은 신문에 보이지 않고, ‘햇볕론’이란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1993년 당시 통용되지 않고 있던 ‘햇볕정책’이란 말에 한완상이 회고록에서 집착한 것은 회고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유감스러운 일이다. 앞에 말한 1993년 5월 15일자 <한겨레신문> 인터뷰기사를 언급하며 이런 내용을 인용해 놓았는데,(<한반도는 아프다> 94쪽) 실제 신문기사에는 나타나지 않는 내용이다.
햇볕정책의 힘으로 북한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북한이 냉전의 두꺼운 옷을 벗게 되면 우리도 냉전의 옷을 함께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간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은 ‘냉전강한풍’으로만 북한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강경한 냉전 대결 정책은 남북 관계를 오히려 악화시켰고 두 체제에 뿌리 내린 반민주 세력에게 힘을 몰아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북 당국자들이 상대방에게 강경하게 대응하면 할수록 서로 강해지는 적대적 공생의 역설적 비극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강경 세력이 기득권을 강화하면 그 체제는 필연적으로 폐쇄적인 반민주-반인권-반민족 체제가 될 수밖에 없다.
햇볕정책의 의미를 잘 설명한 글이고, 당시에 한완상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되기는 하다. 그러나 남한의 강경 세력을 포함한 강경 세력 모두에 대한 이처럼 직설적 비판이 담긴 글을 그 시점에서 어디에 발표할 수 있었을지는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마치 1993년 5월의 인터뷰기사 내용처럼 배치해 놓은 것이 독자의 착각을 일부러 유도하려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든다.
이 씁쓸한 마음으로부터 한완상의 ‘실패’의 이유에 대한 생각이 이어져 나온다. 그가 진보적 입장에서 유화적 대북정책을 추진하다가 북핵위기 앞에서 김영삼의 강경한 대북 적대정책에 밀려 튕겨져 나온 것으로 널리 이해되어 왔다. 그가 정부에서 물러난 두 달 후 1994년 2월 20일자 <한겨레신문>의 분석기사에는 한완상의 실각에 대한 진보진영의 배신감까지 비쳐 보인다.
“김영삼 정부 1년 (3) 대북정책 / 현실 못 읽는 강경론 ‘혼선’”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기의 한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강경한 대북한 노선을 걸어왔다.
대통령 개인의 보수적인 대북관과 우리 사회의 일정한 기득권층 이익을 반영한 그의 대북정책은 진보세력의 공격대상이 됐을지언정 그 자체의 강성을 문제 삼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문제는 김 대통령의 대북정책, 나아가 통일정책이 ‘강경을 위한 강경’으로 치우칠 때가 많아 상황 전개를 위한 유연성을 잃어버렸으며, 종종 내각과는 전혀 동떨어진 ‘불일치’를 드러냄으로써 혼선을 자초했다는 데 있다.
김 대통령의 대북 강경발언은 소리가 요란했을 뿐 아니라 미국을 직접 겨냥하는 시비로 이어져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킨 반면, 실질 정책면에서는 미국의 대북 협상노선을 뒤따라가기에 급급했고 여러 한-미 현안문제도 양보했다는 지적이다.
(...) 북한의 핵문제로 남북관계가 얼어붙어 있을 때 북한의 두터운 옷을 벗기는 데는 따뜻한 햇볕이 필요하다며 ‘햇볕론’을 주창했던 한완상 통일부총리는 김 대통령과 기득권층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해 12월 개각 때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정부의 많은 당국자들은 이때 평소의 이념적 성향을 넘어서 대통령이 스스로 임명한 각료를 믿지 못하고 여론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서는 내각이 무슨 일을 하겠느냐며 분개심까지 표출했다.
정통성 문제로 시달림을 받았던 5공은 대북-대외정책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남북정상회담 제의와 북방정책 개념정립을 했다. 6공 들어서는 냉전구조 와해의 세계적 흐름을 타고 한-소, 한-중 수교로 북방정책의 결실을 맺은 반면 남북정상회담에 집착한 나머지 국익 차원의 손해를 많이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집권 1년을 통해 드러난 김 대통령의 대북정책-대외정책 운영은 현실과 유리된 강경노선의 기조 아래 내각의 발목을 잡고 북한과 미국에 먼저 큰소리를 쳐 놓고도 결국은 미국을 뒤따라가는 일을 되풀이했다는 평가를 벗어나기 어렵다. 박종문 기자
이 상황을 이제 다시 돌아보며 김영삼 개인의 책임을 넘어 당시 한완상이 대표하던 유화적 대북정책의 한계와 문제점을 더듬어보고 싶다. ‘북핵위기’가 남북관계의 장애물로 제기되고 있던 상황인데, 한완상은 문제의 성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던가? 북한의 NPT 탈퇴선언에 대해 한완상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그 직후 평양을 방문하고 서울에 온 세계교회협의회 박경서 박사를 4월 20일 만난 소감에서 얼마간 알아볼 수 있다.
북한 당국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솔직히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정말로 김 대통령이 수구 냉전 세력으로부터 공격받지 않길 북한 당국이 바랐다면, 어떻게 우리가 리인모 씨 북송을 발표한 바로 다음날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할 수 있단 말인가. 성사 강경한 군부와 당 간부들이 그날 탈퇴 선언을 하기로 오래전에 결정했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우리가 리인모 씨의 조건 없는 북송을 발표하자마자 그런 강경 조처를 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단 말인가. 특히 김일성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를 읽고 감동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탈퇴 선언이 김 대통령이나 통일부총리인 내게 엄청난 족쇄로 작용하리라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아니면 김 주석의 힘이 정말 빠져나갔다는 말인가. 보고를 듣는 내내 이런 의문들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사실 북의 그런 탈퇴 선언 같은 악재가 없었다면, 새 정부가 북-미나 북-일 관계 개선에 도움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노태우 정부 때 북방외교를 추진하면서 모스크바-베이징과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또 평양이 워싱턴-도쿄와 관계가 정상화되기를 바란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나는 노태우 정부보다 더 평화 지향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새 정부의 마땅한 사명이라 믿었기에, 미국과 관계 개선을 바라는 평양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기에는 김 대통령도 어떻게든 북한을 고립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그런데 박 박사의 보고를 들으며 내 마음속에서 당혹감과 분노가 끓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언젠가 북한 고위층을 만난다면 꼭 이 문제를 따져보리라 다짐했다. (<한반도는 아프다> 82-83쪽)
“당혹감과 분노”를 느꼈고, 북한 당국자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북한의 NPT 탈퇴선언이 있을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한다. 심지어 김일성의 권력 누수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한완상은 NPT 탈퇴선언의 이유와 그 중요성을 정말로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중단됐던 팀스피릿훈련의 재개가 북한에게 던져주는 배신감과 위협이 리인모 송환 같은 ‘상징적’ 조치와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단 말인가? 리인모 송환 결정은 참 잘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수준의 상징적 조치를 넘어 북한이 탈퇴선언을 재고할 만한 진지한 노력을 전혀 보여주지 않은 채로 북한의 탈퇴선언에 배신감을 토로한다는 것은 너무 자기중심적인 반응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것을 근거로 북한 정권의 성격이나 상황에 의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대북정책의 수장으로서 불안한 자세다.
이것은 한완상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당시 남한사회의 상황 인식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한계가 투영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북한의 붕괴를 원하는 반북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화해와 평화를 바라는 진보진영에서도 북한에게 ‘고난의 행군’ 같은 상황을 겪어낼 능력이 없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처럼 북한을 얕잡아보는 분위기로 인해, 상징적 조치 하나만 던져주면 북한이 적극 호응해 오리라는 안이한 전망이 가능했던 것 같다.
한완상의 실패 원인 일부는 북한에 대한 오판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 오판은 김영삼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김영삼에 대한 직접 비판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박관용 비서실장 등 측근들에게 반북정책의 책임을 씌웠다. 하지만, 아무리 김영삼의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면모가 아직 국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때라 하더라도, 그만큼 가까이서 보좌하고 있던 한완상이 김영삼의 본색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리는 없다. 한완상은 과연 어떤 근거로 김영삼이 자기 노선을 지지해줄 기대를 가진 것이었을까? 불발로 끝난 ‘김영삼 독트린’의 회고 내용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993년 5월 초, 나는 그동안 통일원 자문위원인 고려대 최상룡 교수와 두어 차례 의논했던 문제를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하기로 했다. (...)
그래서 나는 ‘통일과 개혁에 대한 진언’이라는 제목 아래 ‘김영삼 독트린’이라고 이름 붙인 ‘한반도 탈냉전 몇 평화선언’(가칭) 문건을 만들었다. (...)
사실 ‘김영삼 독트린’ 문건을 작성하기에 앞서, 나는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와 그에 따른 평화정착을 위한 과감한 정책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김 대통령이 세계 어느 지도자보다 평화를 진작시킨 지도자로 부각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핵 문제 때문에 다시 세계의 화약고로 인식되고 있는 한반도의 불안한 상황이 오히려 김 대통령을 세계적인 평화지도자로 부상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남북 관계 개선으로 핵 문제 해소에 기여한다면, 오늘의 한반도 위기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만한 지도력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김영삼 독트린’이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건을 보고하러 청와대로 들어갔을 때 대통령은 다소 지쳐 보였다. 간단하게 요약하기 쉽지 않은 내용을 짧은 시간에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부시와 고르바초프의 탈냉전 선언을 김 대통령의 독트린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려는 순간, 얼핏 보니 대통령은 조는 듯했다. 그래서 다른 기회에 다시 하기로 마음먹고 보고를 중단한 채 씁쓸한 기분으로 되돌아 나왔다. 김영삼 독트린의 비전은 맥이 빠지고 말았다. 이 비전이 바로 노벨상의 정신인데... (<한반도는 아프다> 91-93쪽)
김영삼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한완상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노벨상’ 같은 미끼라면 그의 이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노벨상’ 소리만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줄 알았던 김영삼이 ‘김영삼 독트린’ 얘기에 왜 졸음에 빠지게 되었을까? 너무 지쳐서? 글쎄... 다른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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