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여름 이후 북한은 노선의 큰 변화를 보였다. 이 변화를 무엇보다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 1992년 4월의 헌법 개정이었다. 정통성을 중시하는 북한에서 헌법은 남한보다 훨씬 큰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1992년의 개헌은 20년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1948년 9월에 제정된 북한 헌법은 네 차례 부분 개정을 겪으며 1972년까지 시행되었다. 이것을 ‘인민민주주의 헌법’이라 하고 1972년 12월에는 ‘사회주의 헌법’이 새로 제정된 것으로 본다. 건국 초기의 사정에 맞춘 임시적 헌법으로부터 완성 단계의 사회주의국가로 넘어왔다는 뜻이다.
사회주의 헌법이 20년간 개정 없이 시행된 것은 김일성 통치체제의 안정성을 비춰 보여주는 사실이다.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며칠 앞두고 최고인민회의 제9기 3차 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할 때 개헌의 필요성은 두 측면에서 제기되어 있었다. 하나는 ‘김일성 이후’를 대비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냉전 종식 등 세계정세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당·국가기구·군대>(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 엮음, 한울아카데미 펴냄) 247-251쪽에 1992년 헌법의 내용상 특징 일곱 가지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첫째, 주체사상의 강조를 들 수 있다. (...)
둘째, 주권소재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구헌법 제7조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권은 로동자, 농민, 병사, 근로 인테리에게 있다”라고 규정했으나, 신헌법 제4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근로 인테리와 모든 근로인민에게 있다”라고 하여 ‘병사’ 대신 ‘모든 근로인민’으로 대체시켰다. (...)
셋째, 통일 저해 문구가 삭제되었다. 통일 헌법 제정을 위한 쌍방 간의 노력에 걸림돌로 작용해온 헌법상의 문구를 삭제하여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구헌법 제5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외세를 물리치고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며 완전한 민족적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투쟁한다”라고 규정하여 사회주의적 흡수통일을 천명하였으나 신헌법 제9조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반부에서 인민정권을 강화하고 사상-기술-문화의 3대혁명을 힘있게 벌려[벌여]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여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다”로 바꿔 시비가 되었던 ‘전국적 범위에서 외세를 물리치고“라는 문구를 삭제하였다. (...)
넷째, 당의 우위를 재확인하고 있다. (...)
다섯째, 대외관계의 유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구촌 시대인 21세기에 적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쇄국정책에서 벗어나 조심스런 개방정책을 펴려는 뜻을 신헌법에 담고 있다. 1972년 헌법에서 1개 조항(해외동포권리옹호)만을 두었던 것을 1992년 헌법에서는 기존의 조항과 더불어(신-구헌법 제15조) 3개 조항을 신설하고 있다. (...)
여섯째, 법률문제를 강조하였다. 당우위의 국가에서는 당강령이나 당규약이 우선되기 때문에 사실상 실정법은 유명무실하다. 그런데도 법에 대한 조항을 대폭 강화한 것은 대중을 동원하고 조직하는 데 필수적 무기로 법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
일곱째, 국방 관련 규정을 강화하였다. 신헌법의 외양적 특징 중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제4장 국방의 장 신설이다. 구헌법에서는 제14조에서 포괄적으로 규정하였던 국방의 문제를 신헌법에서는 별도의 장으로 격상시켜 구헌법 제14조의 규정을 세분화하여 확대하였다. (...)
이 헌법은 그 후 1998년과 2009년에 개정을 겪게 되지만, 1992년 시점에서는 그때까지 20년간 개정 없이 시행되어 온 것처럼 앞으로도 20년간은 개정 없이 시행되기를 바라는 자세로 개정에 임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 신중한 개헌에 위의 셋째와 다섯째 항목처럼 남북관계와 대외관계에 대한 고려가 들어 있는 것을 보면 국제사회 진입을 위한 국가노선이 확고하게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이러한 노선 변화는 장기적 통일 전망은 차치하고, 당장 남북 간의 대립을 완화하여 한반도 평화를 가져올 계기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 계기를 완성하여 평화를 실현할 역할의 또 하나 주체가 남한이었다. 남한은 1987년의 군사독재 종식 후 냉전대립을 탈피하는 북방정책을 추진해 왔고, 서울올림픽 이후 북방정책의 초점이 남북관계에 맞춰졌다. 그래서 1991년 북한의 노선 변화가 드러나자 곧바로 유엔에 나란히 가입하고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 남북대화 발전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한과의 대립 완화와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을 환영하는 남한 정부의 자세가 정말 확고한 것이었을까? 북한의 노선 변화가 명확해졌을 때 이상한 기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평화공세’란 것이 있었다. 내심으로는 평화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위에서 마음에 없는 화해 제안을 남발하는 선전공세를 말하는 것이다. 북방정책을 일종의 평화공세로 여긴 세력이 남한 정부 내에 있었다. 북한이 정말로 화해 제안에 호응할 태세를 보일 때 그들은 태도를 바꾸게 되어 있었다.
이 세력의 존재를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이 세력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지 망설여진다. ‘보수’, ‘수구’, ‘반공’, ‘대결’, ‘냉전’ 등 여러 이름이 쓰여 왔는데, 맥락에 따라 지칭하는 범위에도 얼마간의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혼란의 여지가 적은 말로 ‘반북세력’이란 말을 쓰겠다. 북한과의 대화를 반대하거나 대화를 승인하더라도 극히 엄격한 태도를 주장하는 입장이란 뜻이다.
이승만 이래 독재정권은 반공주의를 정권옹호에 이용하면서 반공세력을 열심히 조직했다. 정권 안에서도 반공주의자들이 권력을 점유했다. 그래서 평화와 통일을 원하는 국민에 비해 소수이면서도 강한 조직력을 갖게 되었고, 냉전 해소로 ‘반공’ 명분이 사라진 뒤에도 ‘반북’세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불공정한 체제의 혜택을 누려온 ‘기득권층’은 체제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빠른 변화를 가로막는 이 세력을 후원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한완상은 회고록 <한반도는 아프다>(한울 펴냄)에서 1993년 2월부터 12월까지 김영삼 정부의 초대 통일원장관을 지내는 동안 “냉전수구 세력”에 의해 자신이 추구하던 노선이 좌절된 일을 거듭거듭 아쉬워한다. 가장 가까운 업무파트너인 차관을 고르는 과정에서부터 이 문제가 나타난다.
그는 임동원 차관을 유임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북한에 고향을 둔 군 장성 출신이었지만 외교관다운 세련됨도 갖춘 인물로 합리적이고 온건한 대북정책을 선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 안팎의 냉전수구 세력이 강하게 반대한다는 이유” 때문에 김영삼이 교체를 결정했다고 한다. 몇 달 전의 ‘훈령 조작 사건’에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영삼은 다른 외부 인사를 차관으로 추천했으나 한완상은 이를 사양하고 내부 인사 중 송영대를 골라 차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바람직한 자세다. 장관인 자신이 관계 경력이 없는데 차관까지 외부 인사로 하기보다 내부 인사를 발탁하는 것이 당장은 좀 불편하더라도 장기적 업무 추진을 위해 좋은 길이다. 그런데 회고록에서 이 결정을 후회한다.
그런데 그때 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간과했다. 냉전근본주의적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통일에 대한 문제의식-목적의식-비전-철학은 나와 비슷하거나 같아야 했다. 그 비전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을 선택하는 문제에서는 내 생각과 달라도 좋다. 다를수록 서로 소통하며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목적과 비전이 다르면 통일 업무를 추진하는 데 지장이 올 수 있으니 더 신중히 고려했어야 했다. (같은 책 60-61쪽)
차관으로 발탁하면서 아무런 확인이 없었을 리는 없다. 적어도 골수 ‘냉전수구파’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면 지나간 뒤에 후회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한완상은 당시 골수 냉전수구파가 아닌 합리적 관료이기만 하다면 충분히 함께 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 같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합리적 관료가 출세는커녕 신분 유지를 위해서라도 냉전수구파의 노선에 맞출 압력을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한 것 같다. 그 노선에 맞추지 않은 임동원이 눈앞에서 튕겨나가고 있지 않은가.
1987년의 민주화로 권력에 의한 반공-반북 노선이 정리될 기회가 왔을 때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은 적절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면서도 변화를 위한 기반 조성을 소홀히 했다. 강준만이 북방정책의 정략성을 지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4, 140-145쪽) 박철언 등 북방정책 추진세력이 사회 내의 평화-통일 운동을 육성하려는 노력 없이 국민의 염원과 세계정세 변화를 권력 확보에 이용하려고만 들었기 때문에 그 기회주의적 행태에 비하면 오히려 전통적 반공세력의 애국심이 더 돋보이는 분위기가 정부와 정치권에 형성되기까지 했다. 강준만은 당시 안기부장 박세직의 말을 인용한다.(위 책 143쪽)
“박[철언] 보좌관은 대북 문제를 혼자 독점하려 했습니다. 또 안기부를 도외시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큰 마찰이 있었죠. 그는 과정을 생략하고 문제를 풀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시나리오에 따라 일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1991년 말까지 남한의 반공세력은 힘든 시간을 지내야 했다. 반공세력의 양대 보루가 청와대와 미국인데, 대통령은 북방정책에 매달려있고 미국은 소련 해체의 대비책 강구에 바빴다. 미국 핵무기가 철수되고 옛 공산국과의 수교가 늘어나고 북한과 기본합의서가 체결되는 상황에서 다수 국민은 한반도 긴장 완화를 환영하고 있었다.
1992년 들어 반격의 조건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1월의 뉴욕회담에서 미국의 냉랭한 태도는 남한 반공세력의 입장을 존중한 것이었다.
미국 관리들은 북한을 향해 내밀 수 있는 ‘당근’이 무엇이며 휘두를 수 있는 ‘채찍’은 무엇인가를 하나하나 검토하는 동시에 91년 가을부터 북한과 고위급 회담 개최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북한과의 직접 대화라는 의제는 워싱턴 행정부 내에서 엄청난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결국 지지파 쪽이 남한과 그 문제를 협의해도 좋다는 승인을 얻어냈다. 남한 정부는 미국이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후속 회담으로 연결하지 않고 단 한 차례로 그친다는 조건 하에 이를 찬성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395-396쪽)
뉴욕회담을 1회성으로 제한하는 남한 정부의 입장은 누가 주도한 것이었을까? 북방정책 추진세력이었을까, 아니면 전통적 반공세력이었을까? 몇몇 요직만을 차지하고 있던 북방정책 추진세력보다는 여러 부처에 두루 깔려 있던 반공세력이 주도한 것이기 쉽다. 그리고 북방정책 추진세력도 이런 점에서는 다른 주장을 내지 않았을 것 같다.
1993년 초 미국에서는 클린턴 행정부가, 남한에서는 김영삼 행정부가 출범했다.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는 공화당 부시 행정부에 비해 북한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펼 가능성이 크게 보였고,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는 대통령 취임사에서부터 민족문제에 대한 감동적 메시지를 내놓고 있었다.
칠천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 저는 역사와 민족이 저에게 맡겨준 책무를 다하여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상적인 통일지상주의가 아닙니다.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입니다.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협력할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계는 대결이 아니라 평화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과 국가 사이에도 다양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김 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봅시다. 그때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원점에 서서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관계의 발전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린 이 메시지가 나온 꼭 보름 후 북한의 NPT 탈퇴선언이 나왔다. 한완상 통일원장관이 리인모 노인 무조건 북송 방침을 발표한 바로 이튿날이었다. 오랫동안 논란이 된 리 노인 문제에 대한 획기적 조치를 발표하고 북측의 화답을 바라던 한완상은 NPT 탈퇴선언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앞장섰던 ‘햇볕정책’은 여기서부터 힘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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