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간의 화해 전망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은 2000년과 2007년의 정상회담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가장 긴밀한 접촉이 이뤄진 것은 1990년 9월에서 1992년 9월 사이에 3박4일씩 여덟 차례 열린 고위급회담이었다. 남북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대규모 대표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2년간 회담을 이어간 것은 남북 간의 화해와 관계 발전을 위한 양측의 노력이 최대한 서로 어울린 일이었다.

 

이 노력의 결과 1991년 12월 제5차 회담에서 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그리고 민족 재통일의 희망을 위해 남북의 정권이 이뤄낸 최고최대의 성과였다. 기본합의서 채택 후에는 그 실행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그러나 1992년 9월 중순의 제8차 회담 이후 고위급회담이 중단되고 기본합의서의 실행 노력도 중단되고 말았다.

 

비록 바로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이 기본합의서는 이후 남북관계 전개를 위한 하나의 지표 노릇을 해왔다. 양측 정권이 협력을 거부하는 상황에서는 합의서가 무시되었지만, 협력을 지향하는 상황이 오면 이 합의서를 재출발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을 위한 ‘기본’ 원칙을 가장 포괄적으로 담은 문서로서 가치를 갖고 있다. 이 합의가 이뤄진 과정을 더듬어봄으로써 그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한다.

 

김해원은 <북한의 남북정치협상 연구>(선인 펴냄) 129쪽에서 “1988년 12월 28일 강영훈 국무총리가 북한 정무원총리 연형묵에게 ‘남북고위당국자회담’을 제의한데 대해 북한이 이를 변칙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고위급회담의 출발점을 설명한다. 남북관계 자료와 연구물 중에는 남측의 주도권을 강조하면서 북측의 행위를 가려놓아 균형 잡힌 이해에 어려움을 주는 것이 많다. 강영훈의 제의는 40여 일 전인 11월 16일 연형묵의 부총리급 고위급 정치군사회담 제안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었다.

 

남한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무사히 치러낸 후 그 시점까지 큰 성과를 거둬온 ‘북방정책’의 초점을 남북대화에 옮겨 맞출 단계에 와 있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북한이 고위급회담에 나선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적절한 설명을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국제관계에서 수세에 몰린 북한이 하나의 돌파구를 모색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부총리급이든 총리급이든 고위급회담을 열자는 데 남북의 뜻이 맞았지만, 실제로 회담을 여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1989년 2월 8일 첫 예비회담으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990년 7월 26일 제8차 예비회담에 이르러서야 겨우 ‘남북고위급회담 개최에 관한 합의서’가 이뤄지고 이에 따라 1990년 9월 4일 첫 본회담이 열리게 된다.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을까? 여러 가지 요인이 얽혀서 작용했을 텐데, 한 가지 분명한 요인이 있었다. 팀스피릿훈련이다. 예비회담만이 아니라 본회담에서도 팀스피릿은 계속 지연 요소로 작용했다. 예비회담과 본회담의 날짜만 살펴봐도 이 점이 분명하다.

 

제1차 예비회담 1989. 2. 8

제2차 예비회담 1989. 3. 2

제3차 예비회담 1989. 10. 12

제4차 예비회담 1989. 11. 15

제5차 예비회담 1989. 12. 20

제6차 예비회담 1990. 1. 31

제7차 예비회담 1990. 7. 3

제8차 예비회담 1990. 7. 26

 

제1차 본회담(서울) 1990. 9. 4~7

제2차 본회담(평양) 1990. 10 17~20

제3차 본회담(서울) 1990. 12. 11~14

제4차 본회담(평양) 1991. 10. 22~25

제5차 본회담(서울) 1991. 12. 10~13

제6차 본회담(평양) 1992. 2. 18~21

제7차 본회담(서울) 1992. 5. 5~8

제8차 본회담(평양) 1992. 9. 15~18

 

해마다 봄이 오면 대화가 중단되는 것이다. 그랬다가 1989년에는 10월에, 1990년에는 7월에, 1991년에는 10월에야 회담이 재개되었다. 1992년에만 봄을 타지 않았다. 그 해에는 팀스피릿훈련이 없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대화 중단과 재개가 거듭되는 상황을 김해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팀스피릿’훈련과 관련한 치열한 공방에도 불구하고 남북 쌍방은 차기 회담을 1989년 4월 12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북측이 회담 개최에 임박하여 회담연기를 제의하는 바람에 결국 제3차 예비회담은 7개월 뒤인 1989년 10월 12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공개리에 진행되었다. 남측 송한호 수석대표는 지난 1, 2차 예비회담에서 팀스피릿훈련 문제를 들고 나와 회담의 진전을 가로막고 회담을 일방적으로 장기간 공전시킨 데 대해 북측에게 책임을 추궁하면서 온당치 못한 대화 자세의 시정을 요구하였다.(<북한의 남북정치협상 연구> 135쪽)

 

남북한은 1990년 1월 31일 개최된 제6차 예비회담에서 제7차 회담일자를 3월 7일 개최키로 합의한 바 있으나 북측은 2월 7일 남북체육회담 제7차 본회담을 끝으로 2월 8일 이른바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남북적십자 실무대표접촉 북측 대표단 명의의 연합성명을 발표, 모든 대화를 중단하였다. (...) 남측은 6월 25일 대북전통문을 통해 남북고위급회담 제7차 예비회담을 7월 3일에 개최하자고 수정제의하였으며, 이에 북측이 동의해 옴으로써 5개월 만에 남북대화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같은 책 140-141쪽)

 

북측은 책임연락관 접촉을 연기시킨 후 곧이어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의 개최를 연기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북한은 1991년 2월 18일 평양방송을 통해 발표된 남북고위급회담 북측 대표단 성명에서, 남측의 걸프전쟁과 관련한 경계태세와 팀스피릿 합동군사연습 실시로 25일 평양에서 개최될 예정인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예정대로 열릴 수 없게 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북측은 성명에서 남측이 “남조선 전역에 비상전시체제를 선포하고 사상 유례 없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사실과 다른 주장을 했는가 하면 팀스피릿 합동군사훈련에 대해서도 “위험한 전쟁접경에로 끌어가고 있다”고 비난하였다.(같은 책 147쪽)

 

김해원이 대화 중단의 책임을 북측에 씌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마지막 인용문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남한 정부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대화를 추구하는데 북한이 별 것 아닌 꼬투리를 잡아 대화를 회피한다는 것이다.

 

핵공격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세계 최대의 연례 군사훈련이 자신을 겨냥하여 벌어지는 것을 별 것 아닌 일로 볼 수 있을까? 고위급회담과 그 예비회담이 팀스피릿 계절마다 중단된 자취를 보며 북한이 얼마나 팀스피릿을 싫어하고 무서워했는지 새삼 실감이 난다. 김해원의 주장처럼 북한이 대화를 회피하는 자세였다면 왜 애당초 회담에 임했겠는가? 북한은 예비회담 재개를 앞둔 1990년 5월 31일 군축제안에서 팀스피릿 중단을 요구했다. 그 후의 회담에서 완전 중단이 어렵다면 일시적으로라도 중단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야말로 ‘애걸’이었다. 팀스피릿 중단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북한은 제1차 본회담에 앞선 90년 5월 31일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한 군축제안’을 내놓았다. 전반적인 내용은 88년에 발표한 ‘포괄적 평화방안’과 흡사한 것이었지만, 10개항에 걸친 항목에서 직통전화 개설 및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등 남북신뢰조성을 앞에 배치한 것이 주목되었다. 그러나 군사훈련에 대한 시각 차이는 현저했다. 남한은 군사훈련 실시를 전제로 상호 통보와 참관을 신뢰구축 조치로 제시한 반면에, 북한은 대규모의 군사훈련 실시 자체를 중단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는 한미연합군의 팀스피릿 훈련 중단을 겨냥한 것으로, 이에 따라 팀스피릿은 이후 기본합의서 협상은 물론이고 남북미 3자관계의 최대 변수로 등장했다.

 

북한은 90년 7월 8차 예비회담과 서울에서 열린 9월 1차 본회담에서 자신의 군축 제안을 바탕으로 군사문제를 풀자고 요구했다. 또한 팀스피릿 훈련을 영구히 중단하는 것이 어렵다면, 회담 활성화 차원에서 2-3년간이라도 중단해달라고 요구했다. 남한은 노태우 정부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기초한 8개항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안)’을 제시하면서 교류협력과 신뢰구축 우선론을 제시했다. 그러자 북한은 남한측의 선 신뢰구축론에 대한 반박 논리를 내놓았다. 90년 12월에 열린 3차 본회담에서 북한은 남한의 제안이 극히 일반적인 방향만 밝힌 ‘신뢰조성 우선론’이라고 비판하면서 군축을 중심으로 한 군사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91년 10월 4차 본회담에서도 군축을 신뢰구축 이후로 보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피하는 소극적인 태도라고 비판했고, 91년 12월에 열린 5차 본회담에서도 남측이 제시한 신뢰구축 단계만도 10여년이 걸린 유럽식 경험을 적용하는 것은 한반도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욱식-김종대 “한반도 군축과 군비통제의 새로운 접근"(진보신당 정책용역보고서, 2011) 35쪽)

 

북한은 ‘군비축소’의 선행을 요구한 반면 남한은 ‘신뢰구축’이 이뤄진 후에 군비축소가 가능하다고 맞섰다. 그래서 고위급회담의 1차 목표인 기본합의서에도 북한은 ‘불가침선언’을 꼭 넣자고 주장한 반면 남한은 ‘화해와 협력’만을 넣자고 주장했다. 남한이라 해서 군비축소를 반대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군비축소가 북한에게 더 절박한 과제였기 때문에 군비축소를 가능한 한 뒷전으로 돌리려 한 것이었다.

 

1991년 12월에 채택된 기본합의서 이름에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이 다 들어간 것은 양측 주장을 절충한 결과였다. 그보다 1년 전인 1990년 12월의 제3차 회담에서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을 북측이 제안했다. 그런데 남측이 ‘불가침’을 넣으면 안 된다고 고집해서 타결이 1년 늦어진 사실을 임동원은 아쉬워한다.

 

한편 북측은 지난번 평양회담 2일차 회의에서 우리측이 수정제의한 바 있는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공동선언’과 북측이 제의한 ‘불가침선언’을 통합하여 ‘남북 불가침과 화해-협력에 관한 선언’이라는 하나의 문건으로 채택하자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사실 우리측의 관계개선 기본합의서 내용과 북측의 수정안 내용은 많이 근접해 있었다. 명칭도 나중에 채택된 문서명칭인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근사한 것이었다. 북측은 분명히 합의를 원했고, 우리측에서 협상할 의사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타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상회담 개최를 원했던 우리는 ‘불가침’을 문제삼아 지연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협상 타결의 좋은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큰 실책을 범한 것이다. 결국 정상회담도 성사시키지 못한 채 기본합의서의 채택이 1년이나 지연되는 파행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그 후 부속합의서를 채택했을 때는 이미 노 대통령의 집권말기였고, 대통령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하자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일련의 의욕적인 사업을 펼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했던 노태우 정부는 남북합의사항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시간을 영영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피스메이커> 202-203쪽)

 

1년이 지난 후 남측은 ‘불가침’을 받아들였다. 1992년도 팀스피릿훈련 중단도 결정했다. 그리고 북한에게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인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가 이뤄졌다. 유엔 동시가입, 기본합의서에 이어 연말에는 남북 핵협정까지, 일련의 한반도 긴장완화 조치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앞 회에 인용한 돈 오버도퍼의 핵협정 체결 상황에 대한 소감처럼, 북한은 남한 관리들이 놀랄 만큼 이 진행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2년 1월 21일 김용순 로동당 국제비서와 아놀드 캔터 국무부 차관의 뉴욕회담에 북한은 어떤 기대를 걸고 있었을까. 미국과의 첫 고위급회담을 가지면서 유엔회원국이 된 보람을 느끼지 않았을까? 40년 전의 전쟁 이래 북한의 존재를 위협해 온 숙적을 상대로 시비를 따지기보다는 적대관계의 종식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반년 이상 이어지고 있던 북한의 행보에서 짐작할 수 있다.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노선 선회 등 동맹관계의 변화도 적대관계의 해소를 바라는 북한의 입장을 더욱 절박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이 회담에서 극히 냉담한 입장을 보였고, 뒤이어 미국의 압도적 영향을 받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에 대해 고압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보고서 내용에 대한 불신을 이유로 특별사찰을 요구한 것은 IAEA 역사상 없던 강압적 정책이고, 핵무기 미보유국의 불이익을 보상하는 NPT 조약정신과도 배치되는 조치였다. 이 문제가 제기되어 있는 상태에서 1992년 10월 팀스피릿 재개 방침 발표는 1년 남짓 계속되어 온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 노력에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북한의 반발은 예견된 것이었다. 발표 수위는 점차 높아지면서도 거기에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담겨 있었다. 10월 12일에는 한미 양국의 발표를 비난하면서 철회를 요구했고, 12일 후에는 팀스피릿 훈련 강행시 남북대화의 동결을 경고했다. 11월 2일에는 이 훈련 재개시 “핵안전조치협정 이행에 새로운 엄중한 난관이 조성되게 될 것”이라며 IAEA 사찰 거부를 경고했고, 11월 3일에는 남북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 불참을 통보했다. 그러면서도 11월 말까지 팀스피릿 훈련 재개 방침을 철회하면 12월에 공동위원회 회의를 열 수 있다고 말했다. 11월이 지나도 한미 양국 입장에는 변함이 없자, 12월 15일을 새로운 시한으로 제안했고, 그래도 호응이 없자 이듬해 1월 29일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하고 말았다.

 

급기야 북한은 1993년 3월 팀스피릿 훈련 재개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결의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그 부속 합의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한반도 핵위기가 전면화되고 만 것이다. (정욱식-김종대 “한반도 군축과 군비통제의 새로운 접근" 35-36쪽)

 

북한이 이 방침 철회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팀스피릿훈련을 무서워했는지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북한은 NPT 탈퇴 이유로 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남북대화 중단 이유로 팀스피릿훈련 재개를 나란히 제시했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팀스피릿 문제가 더 결정적인 것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팀스피릿 재개 방침만 나오지 않았다면 특별사찰 요구에는 훨씬 더 끈기 있는 대응자세를 보였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