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산삼' 이야기를 하는 일이 종종 있다. 처음 떠오른 것은 중국에서 돌아와 유시민 선생과 11월 초 만났을 때 원톄쥔 교수 이야기를 하다가였다. 책을 아직 보지 못한 나도 경향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보고 흥미가 많이 끌려 있었다.
그 책과 원 교수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유 선생이 거듭거듭 탄성을 발한다. 서로 다른 여러 계열의 분석도구를 그토록 효과적으로 함께 활용하는 경제학자를 처음 봤다는 것이다. 여러 분석도구를 그렇게 병용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상상도 못했었다는 것이다.
내게는 그보다 더 앞서서 놀라운 일이 있다고 했다. 내 또래의 중국 학자(원 교수는 나보다 한 살 아래다.)에게서 괄목할 만한 업적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고 했다. 내 분야의 국제 학회에서 나보다 열 살 아래위로는 학자다운 학자를 본 일이 없었다. 소질과 적성에 따라 학문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 문혁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원 교수도 고중(고등학교) 때 문혁을 맞아 하방했다가(부모가 모두 인민대학 교수였는데도!) 10여 년 공백 뒤에야 학문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서른 살 나이까지 육체노동으로 살았던 것이다. 한창 공부할 시절을 그렇게 지낸 사람이 그처럼 풍성하고 탄탄한 학문을 쌓아올리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그때 떠오른 것이 산삼 생각이다. 토질도 척박하고 볕도 적은 곳에서 자라는 산삼은 덩치가 작지만, 산삼 중에서도 진짜 약효가 뛰어나다고 한다. 환경 좋은 온실에서는 우수한 학자들이 많이 자라날 수 있지만, 그저 우수한 정도를 넘어 획기적인 업적을 낼 수 있는 큰 학자는 오히려 척박한 조건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닐지. 문혁의 척박한 환경에서 학자들이 많이 자라날 수 없었지만, 진짜 큰 학자를 그런 데서 얻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유 선생도 그냥 그럴싸한 정도가 아니라 현실의 정확한 설명일 수 있겠다고 수긍해 주었다.
얼마 후 산삼 얘기를 또 꺼낼 기회가 있었다. 연말에 정욱식 선생을 만났을 때다. <냉전 이후> 작업 중 군사적 측면에 정 선생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청해 인사를 나눈 자리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정 선생이 겸양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했다. "저는 연구자도 아니고 운동가일 뿐인데요." 그냥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이 말씀에 내가 왠지 좀 흥분해서 잠깐 열변을 토하게 됐다.
학문의 본질을 문제 해결(problem solving) 아닌 문제 제기(problem raising)로 보는 내 관점을 앞세워, 운동가의 자세에서 문제 제기의 동력을 얻는 것이 진정한 학문의 필요조건이라는 얘기였다. 동력이 없이 운전대만 있는 자동차는 떠밀어주는 흐름이 있을 때는 그럴싸하게 자동차 노릇을 하는 것 같지만, '스스로 움직인다는' 자동차의 본질을 실현하지 못한다, 연구자와 운동가의 입장을 상호보완적으로 받아들일 때 연구자 노릇도 운동가 노릇도 제대로 할 수 있으리라는 내 생각을 얘기했다.
이런 얘기 끝에 산삼 생각이 나서 덧붙였다. 우리 사회에는 운동가와 연구자를 겸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이 미비한데, 그런 여건에서 길을 만들어가는 정 선생이 척박한 땅에서 자라나는 산삼처럼 훌륭한 성과를 바라볼 것을 기대한다고. 정 선생도 내 격려의 뜻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고, 함께 앉았던 이들도 감동적이면서 설득력 있는 말씀이라고 칭찬해줬다.
심꾼들 중에 산삼이 눈에 잘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차이를 가져오는 원인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절실한 마음도 하나의 요소일 것 같다. 내게 산삼의 비유가 쉽게 떠오르는 것은 그 이치가 내게도 적용되기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아닐까. '사이비'의 길을 피하고 '비이사'의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일이 있는데, 요컨대 내 분수를 알고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확인한다.
원톄쥔의 책이 어제 도착해서 읽기 시작했다. 내가 키워온 생각과 통하는 점이 놀랄 정도로 많다. 몇 해 동안 매달려 있던 한국현대사 공부로부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공부로 돌아갈 생각을 근래 굳히고 있는데, 좋은 출발점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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