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중국의 ‘전통시대 천하체제 복원’ 가능성을 언급했다. 원고를 보내면서도 너무 앞서 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만큼 살펴본 뒤에나 주관적 해석을 내놓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냉전 이후 상황 전개를 윤곽도 그려놓지 않은 단계에서 내 해석을 내세운다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런 해석의 가능성만 일단 제시해 놓고 상황 전개로 돌아갔다가 연재 끄트머리에 가서 집중적으로 해석을 시도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해석의 큰 줄기를 먼저 내놓고, 그런 해석의 가능성을 상황 전개에 비추어 함께 검토해 나가자고 읽는 분들에게 청하는 편이 나은 점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업을 저 사람이 왜 하고 있는 건지 더 잘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선 ‘전통시대 천하체제 복원’이란 말에 내가 무슨 뜻을 담은 것인지부터 설명해야겠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말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없다면 독자들은 조공과 책봉으로 맺어진 중화제국의 ‘패권’체제를 떠올리기 쉬울 것 같다.
‘천하체제’란 말에서 내가 초점을 두는 의미는 유기론적 관계다. 근대 세계체제의 원자론적 관계와 대비시키는 뜻이다. 이 차이를 1860년대 동아시아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56~1860년의 제2차 중영전쟁에 패퇴한 중국은 열강의 ‘개방’ 압력에 직면했다. 개방의 원리로 제시된 것이 ‘만국공법’이었다. 선교사 윌리엄 마틴이 번역한 헨리 휘튼의 국제법 이론서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가 1864년 <만국공법>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제목이 동아시아에서 ‘근대적 국제질서’의 대명사로 통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듬해 일본에서도 간행되었고, 1868년에는 일본어 번역판도 나와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중국인이 이 책을 받아들인 태도를 이삼성은 이렇게 설명했다.
<만국공법>의 출간은 청나라 조정이 나서서 서양 국제법을 학습했음을 증거한다. 청조는 초판 300부를 각 지방 관아에 배포토록 하였다. 당시 중국 관료집단은 서양 국제법 학습에 소극적이거나 저항적인 태도를 보여 제대로 배포되거나 보급되지 않았다. 이것은 <만국공법>이 발간된 지 10년이 지난 후에까지도 서양제도를 옹호하는 저술의 도입이나 유포에도 중국 관료층이 저항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그만큼 아편전쟁 후 중국 지도층 일반이 서양의 규범과 제도를 인식하는 태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1880년 일본을 방문한 윌리엄 마틴의 발언은 유의할 만하다. “중국인은 서양 국가들을 보고 익히지만 서양제국의 정치제도를 채택하여 자국의 체제를 바꾸는 것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 중국의 개항은 일본보다 십 년 정도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문화의 흡수가 일본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다.”(<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한길사 펴냄) 306-307쪽)
전쟁의 패배로 인해 강요된 질서이기 때문에 반감을 느낀 면도 있고, 천하체제의 기득권을 위협받기 때문에 반발한 면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를 넘어 천하체제와 만국공법체제 사이의 이론적 타당성을 비교할 수 있을까?
이삼성은 위 책 308쪽에 “서양제국의 정치행동이 ‘도리(道理)’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무력이 유일의 법이 아니라는 것을 이 번역을 통해 중국인이 이해하길 바란다.”는 말을 마틴의 회고록에서 인용했다. 번역자인 마틴은 만국공법만이 ‘도리’, 즉 일반적 원리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를 수긍한 중국인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마틴의 믿음은 계몽주의적 믿음이었고, 그 내용은 원자론적 세계관이었다. 19세기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존 돌턴이 발표한 원자론은 개인의 인권을 중시하던 당시의 계몽주의 사조와 딱 맞아떨어졌다. 모든 물질이 독립적 원자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원자론에 맞춰 모든 사회가 독립적 개인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힘을 얻었다. 이 관점은 19세기를 풍미하면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뒷받침해 주었고, 사회과학의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뒤쪽에는 물리학계에서 원자론이 사라졌지만 그 영향을 받은 사상과 제도는 살아남았다. 국제사회가 독립적 국가로 구성된다고 하는 ‘만국공법’ 사상도 그중 하나였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천하체제는 이에 비해 유기론적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어느 구성원도 절대적 독립체가 아니었다. 큰 나라에게는 ‘자소(字小)’의 책임이, 작은 나라에게는 ‘사대(事大)’의 책임이 있었다. 크고 작은 나라들이 지속적인 상호책임 관계로 얽혀 있었다. 각 나라의 내부도 원자화된 개인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본분에 따라 역할을 맡는(군군신신(君君臣臣)) 유기적 조직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봉건적’이라고 하는 사회체제다.
하급자의 충성과 상급자의 승인(및 보호)을 교환하는 봉건관계를 근대인은 ‘인신 예속’이라 하여 미개한 제도, 심지어는 사악한 제도로까지 여겨 왔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절대시하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천하체제의 해체는 ‘만국평등’ 이념의 자랑스러운 승리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만인평등’ 이념이 구호만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해 왔다. 오히려 이 구호는 현실의 불평등을 가려놓음으로써 강자를 견제하고 약자를 보호할 필요를 부정하여 세상을 정글상태로 만드는 데 이용되어 왔다. ‘만국평등’도 마찬가지였다. 개항기 조선이 겪은 상황을 돌아보자.
1876년 일본의 강요로 맺은 강화도조약의 제1조가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막 배워온 만국공법 원리를 구사하고 나선 것이다. 1895년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의 제1조로 내세운 것도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 독립’을 위해 전쟁을 치른 것인가?
일본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주장한 것은 천하체제에서 떼어내 마음대로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개항기 조선의 ‘독립’에는 중국과 떨어져 일본의 영향 아래 들어간다는 뜻이 들어 있었다. 이완용이 독립협회 간부를 지내고 독립문 현판을 쓴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삼성의 위 책 310-311쪽에는 “백 권의 만국공법은 많은 대포만 못하고, 몇 장의 화친조약은 한 광주리의 탄약만 못하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만국공법의 ‘만국평등’이 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대 조선 정책에 이것을 들고 나온 것은 일본의 국익에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만국공법 원리는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의 제국주의 논리에 활용된 것이다. 원래는 좋은 원리였는데 시대 상황 때문에 악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현실의 국가들 사이에는 강약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부정하면 무한경쟁의 길이 열린다. 무한경쟁의 폐해는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의 고통에 그치지 않고 국제사회 전체의 손해를 가져온다. 무한경쟁의 구조적 문제점을 한국사회의 여러 현상에 비추어 논술한 좋은 책을 지나는 길에 소개한다. <무한경쟁이 대한민국을 잠식한다>(서상철 지음, 지호 펴냄). 개인 사이에도 강약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개인주의가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무한경쟁으로 흘러가기 쉽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세동점의 위세 앞에 동아시아 천하체제가 무너진 후(이슬람세계의 전통적 국제관계도 비슷한 형편으로 무너졌다.) 전 세계를 만국공법 원리가 휩쓸었다. 수많은 새 국가가 그 틀에 맞춰 세워져 자주독립의 실질적인 조건에 관계없이 형식적 주권을 갖게 되었다. 한반도에도 두 개 국가가 그 틀에 맞춰 만들어졌다.
원자폭탄의 기본원리를 발견했던 아인슈타인이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에 충격을 받고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말했다.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을 조정해주는 세계정부 없이는 인류가 자기 파괴의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세계정부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1945년 당시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아인슈타인만이 아니었고, 그 노력이 유엔으로 모였다. 그러나 유엔은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 유의미한 세계정부로 발전하지 못했고, 세계는 패권이 횡행하는 무정부상태에 머물렀다.
1990년을 전후한 냉전 해소를 계기로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그 세계화는 경제적 세계화일 뿐, 정치적 세계화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이 경제적 세계화는 세계적 질서의 강화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능의 약화를 통해 무정부상태를 더욱 심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계기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바닥이 드러났다. 재정적자를 동력으로 패권을 유지해온 미국이 그 역할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패권체제의 구조조정을 겪거나 패권체제를 세계정부체제로 바꿀 지점에 와 있다.
지난 150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만국공법’이란 이름의 패권체제에 지금의 세계인은 익숙해져 있다. 세계정부체제로의 전환보다는 패권체제의 구조조정이 더 쉽게 떠오르는 대안이다. 그러나 1945년에 비해서도 지금 세계정부의 필요성이 더 절박하게 되어 있다. 자원과 환경의 벽이 코앞에 닥쳐 있기 때문이다.
이런 판국에 ‘초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유기론적 세계질서라 할 수 있는 천하체제를 2천 년간 운용해 온 나라다. 중국의 득세가 유기론적 세계질서로의 전환을 가져올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사실, 근대 이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유기론적 사회질서가 보편적인 것이었다. 원자론적 질서란 것이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예외적 현상이었다. 인간이란 존재가 원자론보다는 유기론으로 더 잘 설명되는 존재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인류사회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급격한 기술 발달로 인해 일시적으로 환원주의적 원자론이 풍미하는 과도적 단계 하나를 거친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산업혁명 이후의 3백년 기간을 ‘근대’라기보다 ‘가(假)근대’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안정된 농업사회 단계를 ‘중세’로 보고 안정된 산업사회 단계를 ‘근대’로 본다면, 지난 3백년(동아시아에서는 150년) 기간을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도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패권체제 시대에는 ‘문명 전통’을 적게 가진 나라들이 패권을 누리기 쉬운 조건이 작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영국과 독일은 근대 이전에 유럽문명의 주변부에 있던 나라들이다. 미국과 소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류문명의 일반 원리와 어긋나는 방향으로 소위 근대문명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문명의 관성이 약한 지역이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근대의 역사관은 진보주의,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기조로 삼아 왔다. 고대보다 중세가, 중세보다 근대가 더 나은 시대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근대화’란 말에 담겨있었다. 나쁘던 시대에서 좋은 시대로 진입하는 것이 근대화이므로 어느 사회에나 주어진 절대적 과제로 인식되었다. 이 믿음 위에서 근대 이전의 유기론적 질서가 ‘봉건의 잔재’로 타기되었다.
근대적 세계관과 가치기준을 의심하는 ‘탈근대’ 담론이 몇 십 년 전부터 자라나 왔다. 이것 역시 근대체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 근대문명을 지고지상의 문명으로 보는 주장은 뉴라이트처럼 신자유주의에 집착하는 세력에서나 나오고 있다. ‘근대화’는 세계정세의 변화에 발맞추기 위한 하나의 상대적 과제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에게나 자존심은 있다. 중국의 ‘대중화주의’는 중국인의 자존심 표출인데, 그중에는 패권체제 시대의 관념에 얽매여 중국의 패권을 추구하는 경향도 있지만, 영국, 독일이나 미국, 소련의 패권과 다른 차원의 ‘문명 전통’에 대한 자부심도 크게 잠재해 있다고 본다. 후자가 크게 나타날 경우 진행 중인 중국의 변화가 유기론적 세계질서의 형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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