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후 미국 대외정책의 기조는 ‘봉쇄’(containment)정책에서 ‘개입’(engagement)정책으로 옮겨졌다. 봉쇄정책은 접촉과 교류를 줄임으로써 상대방을 괴롭히려는 목적으로 군사적 논리를 주축으로 하는 것인 반면, 개입정책은 접촉과 교류를 늘림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는 목적으로 외교적 논리에 기울어진 것이다. 그리고 봉쇄정책은 이쪽에 대한 상대방의 영향을 줄이는 데 중점을 두는 소극적인 것인 반면 개입정책은 상대방에 대한 영향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는 적극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반공독재 시절 한국은 미국의 공산권에 대한 태도가 온건한 쪽으로 기울 때마다 대결정책에 대한 집착으로 한미관계에까지 어려움을 겪곤 했다. 정권의 정당성을 공산권과의 대결에 의존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군사독재가 끝난 1987년 이후 한국의 대북정책이 맹목적 대결주의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북한에 대한 유연한 태도는 햇볕정책으로 발전하게 된다.
김근식은 <대북포용정책의 진화를 위하여>(한울아카데미 펴냄) 42쪽에서 대북포용정책의 개념적 연원을 미국의 탈냉전 이후 개입정책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개입’이란 번역어의 적절성을 잠깐 짚어본다. ‘engagement’의 원래 뜻은 관계를 만들고 접촉면을 키운다는 것이다. 대북관계의 ‘지렛대’란 말을 흔히 하는데, 지렛대를 크게 만드는 것이 바로 ‘engagement’다.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느낌의 ‘개입’보다는 오히려 ‘포용’이 더 적절한 것 같다.
대결은 곧 경쟁이다. 냉전 후 유일한 슈퍼파워가 된 미국이 적극적 개입정책으로 돌아선 것은 경쟁에서 초연한 위치에 왔기 때문이었다. 남한이 북한에 대해 포용정책을 발전시키게 된 것 역시 40여 년의 체제경쟁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했다는 자신감 덕분이었다.
남북 간 체제경쟁이 펼쳐져 온 양상을 살펴보면 1990년대 이래 남한의 포용정책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1960년대 말까지 남북 간에 말도 섞지 않고 지내던 시절에는 경쟁의 양상을 깊이 살필 만한 장면도 나타나지 않는다. 1970년대 들어 세계적 데탕트의 전개에 따라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 경쟁의 무대가 제대로 차려진다.
홍석률은 <분단의 히스테리>(창비 펴냄)에서 1970년대 초에 나타난 경쟁 양상 중 북쪽의 ‘남조선혁명론’과 남쪽의 ‘자유의 바람’을 대비시킨다.
남북대화 과정에서 북한이 보여준 행태는 남쪽에서 혁명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실질적인 목표를 두었다기보다는 지극히 자기만족적인 측면이 있었다. 예컨대 북의 언론들은 남북대화를 보도하며 ‘남조선 인민’들이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배려에 무한히 고무되면서 북과 남 사이의 교류를 열렬히 바란다”고 보도하였다. <로동신문>은 남쪽의 주민들이 북한 대표단 가슴에 달려 있는 김일성 초상 배지를 보고, “저걸 보십시오. 김일성 장군님의 사진을 달았어요. 건장하시구만요”라고 수군대고, 배지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가던 길을 먼추고 다시 돌아와 보고 갔다고 보도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던 날 신문에 김일성 사진이 나오자 남쪽 주민들이 이를 보기 위해 신문 가판대로 모여들었으며, 사람들이 ‘김일성 만세’를 부르는 일이 늘어났다는 보도도 있었다. (...) 심지어 남쪽에서 온 적십자 대표단이 김일성 생가를 방문하기를 원했고, 김일성을 위대한 인물이라 칭송했다고 전했다.
이와같은 북한 관리의 언급과 언론보도에 대해 그 진위 여부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이 결코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의 정부와 언론은 내외적으로 남쪽 사람들이 북의 지도자와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선전하였다. 결국 이같은 선전은 남쪽 주민들도 김일성을 열광적으로 숭배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김일성을 우상화하고, 이를 통해 북한 주민들을 통제하는 자기만족적 행위라 할 수 있다. (260-261쪽)
예컨대 1972년 4월 19일 김덕현이 북한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합법적으로 남한을 방문했을 때 그의 야간일정은 대단히 조밀하게 짜여 있었다. 4월 20일 저녁 일정을 살펴보면, 세검정 안가에서의 만찬을 시작으로 서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3-1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오진암이라는 요정에서 밤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자정이 넘어 4월 21일 새벽 1시 40분경 이후락 부장이 직접 모는 차를 타고 김덕현은 풍전호텔 고고클럽으로 인도되었다. 새벽에 숙소인 조선호텔로 돌아온 후에도 소규모 술자리를 갖고, 새벽 4시 30분에야 잠이 들었다. 후일 이후락은 미국CIA 한국지국장에게 김덕현의 서울 체류를 설명하며 “처음에는 냉혈적이던 그가 시시각각 녹아나서 떠날 때는 여심에 도취되는 등 매우 재미를 보고 갔다”고 했다. 북의 적십자 대표단이 왔을 때도 양상이 비슷했다. 북의 대표단을 워커힐호텔로 데려가 무희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캉캉춤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고고클럽에 데려가기도 했다. 남쪽의 ‘자유’를 맛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남측이 북쪽에 불어넣으려고 한 ‘자유’는 대체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남쪽 인사들은 이처럼 다분히 속물적인 자유의 분위기를 북에 보이려 했고, 북쪽 사람들이 이를 맛보면 이념적인 세뇌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본성과 감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이는 남북대화의 쟁점이었던 인도주의와 통일(정치)논쟁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남쪽에서 ‘인간적’이라는 의미는 종종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65-266쪽)
“제 눈에 안경”이란 말 그대로다. 북측은 ‘혁명’ 빼고는 말할 것이 없고, 남측은 ‘향락’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북측 대표단은 돌아가 “우리가 보여주니까 남쪽 사람들도 혁명에 눈을 뜬다”며 자기들끼리 좋아하고 남측에서는 “우리가 보여주니까 북쪽 사람들도 자유에 눈을 뜬다”고 신이 났다.
1970년대 초의 남북대화는 형편에 떠밀려 마지못해 벌인 것이었다. 각자 자기 가치기준 위에서 자기 진영을 향한 선전에만 바쁘지,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화’란 이름이 무색하다. 그래도 양쪽 국력이 꽤 비슷하게 어울린 시점의 접촉으로서 본격적 체제경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국제무대에서는 이런 ‘자기만족적’ 관점이 마음대로 통하지 않는다. 강대국들의 데탕트 정책은 남한과 북한이 그때까지 적대시하기만 하던 반대진영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남북 간의 치열한 외교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1970년에서 1975년 사이에 남한의 수교국이 81개국에서 93개국으로 늘어나는 동안 북한의 수교국은 35개국에서 88개국으로 늘어났다. 남한 수교국이 12개 늘어났을 뿐인데 북한 수교국은 53개나 늘어난 것이다. 남한 수교국이 아직 더 많기는 하지만, 이 외교 경쟁의 승리자가 북한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방진영의 핵심국가들이 남한 입장을 배려해서 북한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데도 불구하고 북한은 이 기간에 종래의 고립상태를 크게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외교 경쟁을 통해 남북 양측은 종래의 ‘하나의 한국’ 주장에서 한 걸음씩 물러섰다. 남한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의 몰락을 계기로 북한을 절대적으로 무시하던 관점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1970년대 초 데탕트 상황에서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계기를 맞았다. 1973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의 ‘6-23선언’이다.
6-23선언은 공산권과의 호혜평등 외교를 추구할 것과 함께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을 제안했다. 당시로서는 놀랄 만큼 적극적인 태도였다. 19개월 전인 1971년 11월 김대중이 동시 유엔 가입을 처음 제안했을 때 박정희는 “민족의 통일을 위한 염원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불과 5개월 전인 1973년 1월에도 남한 외무부는 재외공관에 내린 지침에서 남북 모두가 “통일 이전 가입을 원치 않으며”, “동시가입은 남북분단을 항구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가 반대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홍석률 위 책 327-334쪽)
6-23선언은 한 달 전 북한의 WHO 가입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홍석률은 해석한다. 북한이 어차피 유엔본부에 항구적 접촉점을 갖게 되어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을 가로막던 종래의 봉쇄정책이 실효성을 잃게 된 바에야 선제적 조치로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도로 중앙정보부에서 기획한 것이라는 전직 중앙정보부 관리들의 증언을 인용한다.
한편 북측은 당시의 정세 변화를 자기네에게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조선혁명론’을 마음속으로는 고수하면서도 유연한 대외전략에 나설 수 있었다고 김해원은 <북한의 남북 정치협상 연구>(선인 펴냄) 70-71쪽에서 설명한다.
1970년대 초에 있어 북한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국제환경의 변화가 자신에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여 고무되었던 입장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베트남에서의 철수와 닉슨 독트린을 남조선혁명 달성에서 유리한 요소로 판단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컨대 1970년 11월 초 노동당 제5차 전당대회 총화보고에서 김일성은 국제정세의 호조로 혁명의 ‘만조기’에 들어섰다고 현 정세를 진단하고 호치민의 월맹 해방군이 민족해방전쟁을 성공리에 마무리 짓고 있으며, 미군은 한반도에서도 철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남한에 대해 “내부의 계급적 모순이 첨예화되어 있고 따라서 인민대중의 혁명적 진출이 적극화되어 있는 상황”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북 간의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1970년과 1971년 2년 동안 북한은 적극적인 평화공세로 미-중 긴장완화에 적응하며 통일문제에서 주도권을 잡고, 이를 궁극적으로는 주한미군을 완전 철수시킬 계기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베트남으로부터 미군 철수사례는 북한이 한반도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북한은 1960년대 후반 울진-삼척사태, 1-21사태 등과 같은 이전의 대남 무장공비의 직접침투 방식을 지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북한의 평화공세는 동맹국들에 대한 안보책임을 줄여가고자 하였던 닉슨정부의 정책을 이용하려는 입장에서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여진다.
1970년대 초의 남북대화는 피차 전략적 동기에 따라 접근한 것이었고, 상대방과의 절충에 따라 길을 찾아 나간다는 진정한 ‘대화’의 의미는 갖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화의 시늉이라도 하면서 직접적 경쟁의 양상을 드러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방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경쟁을 드러내는 단계로 접어들면서 남북 모두 체제 단속의 수준을 높일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남한에서는 1972년 10월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고 북한에서는 1972년 12월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남쪽의 유신이나 북쪽의 사회주의헌법이나 모두 체제 강화를 노린 것이었지만 억지스러운 면은 유신이 더했다. 공산권 국가들이 어느 정도 사회주의 정착 단계에 들어설 때 건국 초기의 인민민주주의헌법을 사회주의헌법으로 바꾸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북한의 경우 김일성 개인숭배와 주체사상의 강화 현상이 덧붙여지기는 했지만, 기본 축은 사회주의체제의 안정에 있었다. 반면 남한의 유신체제는 ‘체제의 발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조치였다.
김근식은 <대북포용정책의 진화를 위하여> 44쪽에 개입정책의 성립 조건을 몇 가지 열거했는데, 그중에는 적대적 세력 간의 ‘대화’를 위한 일반적 조건으로 볼 만한 것들도 있다.
그러나 개입정책이 항상 어디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책으로서 추진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있는데 주체국가 대상국 간 접촉이 초기에 낮아야 하고, 관계 개선과 교류 확대를 대상국이 매우 필요로 해야 하고, 대상 국가는 주체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가능케 하는 자원으로 간주해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개입정책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대상국가의 정책결정이 매우 중앙집권적이어야 하고 주체국가의 대내적 지지 확보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 대상국가에 대해 과도한 ‘야심찬 목표’가 아니라 ‘적당한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대내적 지지 확보” 같은 것은 개입정책만이 아니라 어떤 대외정책의 추진에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남북대화가 시작되는 단계에서, 그 대화의 성공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제반 자유를 봉쇄하는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가. 내부의 지지를 포기하는 조치였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없이 국민의 지지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박정희 정권에게 남북대화를 발전시킬 뜻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연한 증거가 유신 선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한과의 경쟁에 자신이 없었고, 자신을 못 가지는 가장 큰 이유가 체제의 안정성 문제였다. 서울에 온 북한 대표에게 남쪽의 우월한 면을 보여준다고 기껏 데리고 다니는 곳이 요정이고 호텔이고 고고클럽이라니, 남한의 현실에 얼마나 자신감이 없었단 말인가. 남북대화를 강요하는 국제정세로부터 국내사회를 차단하기에 급급한 태도가 유신 선포로 나타난 것이었다.
세계적 데탕트에 이끌려 남북이 시작한 ‘대화’는 1973년 8월 북측의 일방적 성명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다시 대화 재개의 시도가 나타난 것은 1980년 1월 이종옥 정무원 총리와 김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남한 국무총리 등에게 보낸 편지였다. 박정희가 죽은 후의 혼란을 이용하려는 의도였던 듯, 몇 차례 실무회담 끝에 남한 국무총리가 ‘서리’이기 때문에 자격이 안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이유로 접촉이 중단되었다. (김계동 <북한의 외교정책과 대외관계>(명인문화사 펴냄) 198쪽)
1981년 9월 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되면서 체제경쟁과 외교경쟁에서 남한의 우위가 확인되었다. 이제 10년 전과 달리 남한 정부는 자신감을 갖고 북한을 상대하게 되었기 때문에 1983년 10월의 아웅산 사건을 겪고도 이듬해 북한의 수해물자 지원 제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공산권의 침체와 붕괴 등 국제정세의 변화는 북한의 개방을 요구했다. 전두환 정권 말기에 시작된 북방정책은 1987년의 민주화를 거치며 포용정책(개입정책)으로 발전할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1988년 이후 노태우 정권의 대북정책은 10년 후 햇볕정책으로 만개할 포용정책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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