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권 붕괴에 따라 ‘전 방위 수교’ 시대가 열렸다. 서로 승인하지 않고 지내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국가들이 서로 수교하는 새로운 환경에 남한은 바로 적응해 나갔다. 1990년 9월 소련 수교에 이어 1992년 8월 중국 수교에 이름으로써 남한은 몇몇 특수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북한도 1991년 가을 유엔 가입을 계기로 외교관계를 크게 넓힐 수 있었지만, 미국과 일본이 숙제로 남아있었다. 이 두 나라와의 관계가 북한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평화 보장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필수적이었고, 일본과의 수교는 경제 회복과 발전을 위한 열쇠였다. 남한과 고위급회담 등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중요한 하나의 목적이 미국, 일본과의 수교를 원활히 하는 데 있었다. 중-소의 남한 수교와 미-일의 북한 수교는 모든 관계국의 양해사항이었는데, 북한이 뒤쳐져 있기 때문에 다급한 입장이었다.

 

남북 간의 관계 개선은 경제력-군사력-외교력 등 모든 방면에서 열세에 있던 북한에게 더 절박한 과제였다. 그런데 한 가지 과제만은 남측에서 열심히 매달리고 북측에서 느긋하게 튕기는 것이 있었다. 정상회담이었다.

 

전두환 시절부터 남한 정권은 남북정상회담을 원했다. 국민의 통일에 대한 열망에 부응하고 안보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킬 수 있는 정상회담은 정권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최상의 열쇠였다. 북측에서는 ‘국민의 지지’가 그렇게 절실한 과제가 아니었고, 따라서 정상회담을 남측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카드로 쓸 수 있었다.

 

고위급회담의 출범 단계에서 정상회담이 논의되던 상황을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제2차 회담 후] 지금까지 전향적 태도를 취하며 협상의 조속한 타결을 주도해 왔던 우리 정부의 협상사령탑에서 웬일인지 갑자기 ‘대북불신론’을 제기하며 지연전술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왜 갑자기 이런 지시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남북대표접촉이 열리긴 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이룩하지 못하게 되었다.

 

석 달 가량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1990년] 10월 초 서동권 안기부장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11월 초에는 북측에서 노동당 대남사업담당비서 윤기복이 서울을 방문하여 각각 상대방 정상을 만나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협의했으나 실패했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처음부터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제의했고, 뒤이은 비밀접촉을 통해 “고위급회담에서 채택될 남북합의문서에 양 정상이 만나 직접 서명하고 관계개선을 촉진시킬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정상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한다.

 

그러나 북측은 “정상회담에서는 통일문제를 비롯한 고차원적인 민족문제를 협의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고위급회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 북측은 우리측이 정상회담 개최에 열을 올리면 올릴수록 더욱 고자세가 되어 ‘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 수용만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북측이 정상회담 개최를 사실상 거부하자 남측의 협상사령탑은 지연전술로 협상의 조기타결을 바라는 북측을 압박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피스메이커> 200-201쪽)

 

남북대화에 임하는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북한의 협상전략>(척 다운스 지음, 송승종 옮김, 한울아카데미 펴냄)이란 책을 찾아보았다. 미 국방성 직원이라는 저자가 머리말에 “북한과의 협상은 난해하고도 불쾌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책의 독자라면 협상 과정이 생각보다 훨씬 더 불쾌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 쓴 것을 보면 매우 치우친 서술이 아닐까 의심이 든다. 북한과의 대화가 실패하기를 바라면서 대화에 나서고, 대화 실패의 책임을 북한 측에 미루려 드는 국방성 관리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머리말의 이런 대목에는 그런 입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 같다.

 

국제사회는 협상 테이블에서 당근을 제공하여 북한의 행동을 바로잡아보려 노력하고 있지만, 전쟁이 발발하면 그들의 군사적 우위는 서방측 군대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서방측 협상자들에 의한 부분적 양보 조치가 북한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한 것이다.

 

우리는 ‘벼랑 끝 전술’이란 말에 익숙하다. 어떤 말에 익숙해지면 그 의미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그런 말을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만든 것인지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북-미 대화에서 미국 대표로 나선 관리들 중에 척 다운스와 같은 태도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하나의 강력한 유형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사람들이 북한을 ‘대화가 어려운 상대’로 규정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도 감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북한이 ‘대화가 쉬운 상대’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미국 관리들의 무책임한 유형화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고 다운스의 책을 읽으면 참고할 내용이 없지 않다. 35쪽의 이런 내용은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협상의 역사를 보면 서방측 대표들은 비타협적 입장을 고수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일 협상단이 사소한 문제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다면 워싱턴은 이들의 태도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방측 대표단은 민주사회에서 표출되는 광범위한 여론의 흐름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협상대표들의 상관인 정책결정자들은 명확한 입장 표명을 회피했고 때때로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마지막 순간에 저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협상자들이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군사적 행동을 보일 때면 북한측은 어김없이 굴복하였다.

 

정치가 공개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사이의 협상이란 한쪽 패만 펼쳐놓고 노는 카드게임과 마찬가지다. 상대방 패를 읽고 치는 선수는 마음 놓고 블러핑을 할 수 있다. 다운스는 그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치와 카드게임은 비슷한 점이 있어도 근본적으로 목적이 다른 것이다. 카드게임에서는 당장의 승부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반면 국제정치는 장기적 효과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국민의 승인 아래 입장을 취해 나가면 어떤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다. 꼼수를 써서 목전의 이익을 얻더라도 상대방과 자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입장이 약해지게 마련이다.

 

다운스의 지적에서 더 중요한 점은 “광범위한 여론의 흐름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에 있다. 여론에는 두 측면이 있다. 국민의 원하는 바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존중받아야 하는 측면과 대중의 이해 부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개선되어야 하는 측면이다. 국제정치의 중요한 협상은 전반적 상황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데, 아직 닥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기 쉬우므로 두 번째 측면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한완상의 <한반도는 아프다>(한울 펴냄) 179쪽 1993년 말 통일원 장관에서 물러날 무렵을 회고하는 대목에 이런 말이 있다.

 

이즈음 미국은 북한에 채찍을 쓰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채찍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외교적 노력이 소진될 때까지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고심하는 듯했다. 한국의 냉전 강경세력은 이런 클린턴 정부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실적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한 미8군 사령관 게리 럭은 전쟁불사 같은 강경책이 비현실적임을 잘 아는 현명한 장군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이 승리할 것이 확실하지만, 치러야 할 대가와 비용이 엄청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는 것이 곧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군 장성 중에는 왜 그와 같이 지혜로운 장군이 없는지 안타까웠다. 전쟁을 안 하는 것이 승리라는 논리는 평화가 무력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혜를 깨달았을 때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진리다.

 

한완상의 회고 중에는 강고한 ‘냉전 강경세력’에 대한 안타까움이 거듭거듭 표출된다. 냉전 강경세력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다수 국민의 북한에 대한 불신 내지 혐오감이다. 이 불신과 혐오감은 오랜 냉전기 동안 언론 자유가 없는 독재상황 속에서 주입된 것이다. 민주화시대가 되었다면 오도된 의식이 척결되어야 할 것인데, 이 의식을 더욱더 조장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이 있다. 개선되어야 할 여론이 현실을 지배하는 상황은 민주화의 미숙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거니와, 사라진 지 오래된 냉전의 유령에 붙잡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한다는 것도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세력이 정상회담이라는 이벤트에 집착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우리 국민의식의 표피를 ‘반공’이 덮고 있다면, 그 바닥에는 민족의식이 깔려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북한을 불신하고 혐오하는 다수 국민도 ‘통일’의 가능성이 떠오르기만 하면 열광하게 마련이다. 정치세력에게는 국민의 지지를 일거에 끌어올릴 수 있는 정략적 ‘대박’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반공의 의식 표피를 깨뜨릴 수 있는 묘책이기도 하다.

 

남북정상회담의 정치적 효과를 노린 전두환은 1985년부터 박철언의 이른바 ‘88라인’을 가동했다. 정상적 대화와 별도의 정보기관을 통한 정상회담 추진이 노태우 집권기에도 계속된 사실을 위에 인용한 임동원의 회고에서 알아볼 수 있다. 우리 측 ‘협상사령탑’이란 대통령을 가리킨 말이다. 협상을 늦추라는 지시가 왜 나온 것인지 협상단 간사가 석 달 후에나 알 수 있었다니, 협상의 최대 목적이 정상회담에 있었단 말인가?

 

남한 집권세력에게 정상회담에는 두 개의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민족문제 해결이라는 공적 측면이고, 또 하나는 집권세력의 지지 획득이라는 사적 측면이다. 전두환 이래 남한 집권세력의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어떤 때는 공적 측면이 컸고 어떤 때는 사적 측면이 컸다. 이 사적 측면은 북한 측의 이용 대상이었다. 이 측면을 이용해 북한 측은 유리한 ‘뒷거래’를 벌일 수 있었다.

 

2000년 정상회담을 놓고 뒷거래 문제가 제기된 것은 제기한 사람들이 뒷거래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특검까지 시행해 크게 잘못된 일이 없음이 밝혀졌는데, 아마 노태우의 북방정책을 놓고 특검을 벌였다면 훨씬 건지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대북송금사건’에 대해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피스메이커> 43-45쪽)

 

[2000년] 5월 6일, 박지원, 이기호와 함께 나는 현대의 대북경협사업 합의 내용을 김보현으로부터 보고받았다. (...) 그리고 현대는 사업독점권에 대한 대가로 4억 달러를 북측에 미리 지불하기로 이면합의하고, 합법적인 대북송금을 위해 즉각 통일부에 사업승인을 신청한 후 자금확보에 나서려는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정부도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며칠 후 (...) 대통령은 현대와 북측의 처사에 대단히 불쾌하다는 태도로 반응했다. (...)

 

“현대가 정상회담 개최를 이용해서 북측과 미리 합의해놓고 정부를 물고 들어가려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가 정상회담을 둔 주고 사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왜 모른답니까! (...) 정상회담 후에 순리에 따라 국민과 세계의 축복을 받아가며 당당하게 추진할 수도 있는 일을 가지고 왜 북측에 끌려다니며 굳이 정상회담 전에 합의하려고 서두는 것입니까!”

 

(...) 그러나 현대가 이미 저질러놓은 일을 쉽사리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현대가 우리정부의 사전승인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일이라 해도 북한과 이왕 합의한 이상 정부가 나서서 취소시킬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3년 후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이 특별검찰을 임명하여 주소하도록 했던 이른바 ‘대북송금사건’은 이렇게 잉태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 이기호, 박지원과 임동원 자신이 있었다고 밝힌 것은 대통령 발언의 사실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무래도 다소간의 ‘마사지’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상회담 추진과 나란히 진행되고 있던 현대의 사업 추진 내용을 정부 측에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그래도 북측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을 정부 부담으로 하지 않고 기업에게 맡겼다는 것은 정도를 지키고자 노력은 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에 비해 노태우 정권에서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고위급회담에 ‘지연전술’을 쓴 것은 정도에서 크게 벗어난 태도였다. 냉전 해소의 격변 상황에 서둘러 대응하지 않고 대화를 지연시킨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사적인 동기에 그처럼 얽매이지 않고 당당히 진행해 나갔다면 김영삼과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훈령 조작’ 같은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김영삼 역시 정상회담을 열심히 추진했다. 예정된 날짜를 앞둔 김일성의 죽음으로 정상회담이 불발된 후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이 극단적으로 적대화하는 과정에서도 정상회담의 성립 여부가 크게 작용했다. 정상회담은 남북관계에서 하나의 중요한 변수였다.

 

 

Posted by 문천